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99화 (199/324)

199화

직장인들 대부분의 점심시간이 12시에서 2시 사이라고 한다면, 요즘 재언의 점심시간은 2시를 훌쩍 넘기곤 했다. 재언뿐만 아니라 요즘 회사 전체 분위기가 그랬다.

이번에 본사에서 전 세계에 유통되는 해외 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진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시작부터 삐끗거렸던 탓에 재언을 비롯한 여러 팀원의 잔업, 야근, 늦은 점심시간 등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김 대리 죽었으면…….”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에 재언은 더 심한 말을 얹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침묵으로 긍정을 표현했다. 김 대리의 실수로 계약이 무산된 인테리어 업체를 다시 찾아간 박 부장의 눈물 어린 사과와 계약금 인상으로 겨우 업체 사장의 마음을 돌려놓기는 했다.

하지만 첫 일정부터 뒤로 밀린 탓에 넉넉하게 잡았던 촬영 기간도 짧아지면서 홍보 기간에도 차질이 생겼다. 자신이 몇 개의 부서에 민폐를 끼쳤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대리는 요즘 기가 살아서 기세등등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핸드폰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분 나쁜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대로 김 대리를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는 임 대리는 날이 갈수록 표정이 썩어 들었다.

그녀는 탕비실에서 재언과 마주치거나 점심시간만 되면 김 대리를 저주하고 욕하기 바빴다. 그 자식을 필리핀에 보내 놓고 청부 살인 의뢰를 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며 푸념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선이 낮은 만큼 대인관계에서는 가벼운 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면 그 사람이 숨 쉬는 것도 보기 싫어하는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사람 화나게 만들어서 고혈압으로 죽게 만들 수 있다면 김 대리는 살인 청부 업자로 업계 톱을 찍었을 거야.”

임 대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돈가스를 입에 물었다. 회사 건물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경양식 돈가스 가게는 돈가스를 미리 튀겨 놓는지 바삭바삭하지도 않고 눅눅했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주문하자마자 음식이 나온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었다.

재언은 인스턴트 맛이 잔뜩 나는 수프를 한입 먹고 나서 소스 위에 올라간 양송이버섯을 옆으로 치운 뒤 돈가스를 기계적으로 씹었다.

안 그래도 임시 보호 중인 검은 고양이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회사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 재언의 사정을 아는 임 대리가 다른 팀원들에게 대충 둘러대 주며 재언을 일찍 퇴근시킨 적도 한 번 있었다.

그때는 정말 고마운 마음밖에 없었다. 그런데 후에 그게 이상한 소문이 되어 돌아올 줄은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아직도 한가득 쌓여 있는 업무를 처리하려면 카페인이 더 필요할 것 같아 일행을 먼저 보낸 재언이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입사한 지 반년 정도 되는 타 부서 신입이 재언을 보고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신 주임님.”

“네?”

“혹시 임 대리님하고 사귀십니까?”

“…….”

쪼록, 이제 막 한 모금 마셨던 갓 나온 커피가 재언의 입에서 흘러내렸다.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어 손수건을 꺼낸 재언은 파르르 경련하는 눈가를 겨우 진정시키며 뜬금없이 헛소리를 내뱉는 신입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안 사귑니다. 저는 애인이 있고, 임 대리님도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습니다.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아… 두 분이 사이가 좋은 것 같아서요. 실례했습니다.”

저 정도면 실례가 아니라 무례한 것 아닌가. 그런 얘기를 모두가 듣는 공개적인 카페에서 묻는 것도 그렇고, 질문 자체도 사생활과 관련된 것이었다.

성별이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추문이 도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설마 자신과 임 대리일 줄이야.

그런데 단순한 소문인 줄 알았던 것이 이미 몸집이 커져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은 임 대리가 직속 부하와 그렇고 그런 사적인 관계라 불평등하게 편의를 봐준다는 신고가 인사과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불려 가 팀장님과 각각 면담까지 하고 나서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쩐지 아까 점심시간에 사업팀 막내가 이상한 걸 묻더라고요. 저보고 대리님하고 사귀냐고… 당연히 아니라고 얘기했는데……. 그것마저도 이상하게 퍼진 모양입니다.”

“그래, 뭐… 남녀가 함께 있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하죠. 그런데 우리 둘만 따로 어딜 가거나 점심을 먹으러 간 적은 없었잖아요? 설마 이번에 흡연실에서 얘기 좀 나눴다고 그 난리를 치는 건 아니겠죠? 아니, 그러면 옛날에 소문이 났었어야지. 왜 지금?”

재언이 최근에 임 대리와 고양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그런 분위기를 풍긴 적은 단연코 없었다. 임 대리가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사업팀 막내가 그런 얘기를 했단 말이죠? 그러면 그쪽에 내가 아는 동기가 있으니까 한번 물어볼게요.”

보통은 그런 헛소문은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만큼 질이 나쁜 건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임 대리가 신재언에게 작은 칭찬이나 배려하는 것조차도 두 사람이 사귀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뒤에서 말이 나올 것이고, 인사고과에 나쁘게 반영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임 대리가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한다 해도 신재언이 몰래 일을 완성해 줬다거나 홍보팀이 일을 잘해도 임 대리가 뒤에서 봐줬다는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그것만큼은 절대 사양이었다.

“저도 인사과에 친하게 지내는 분이 계시거든요. 그 사람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재언은 그 길로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 옆 부서 남무혁을 불러냈다.

그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신재언이 뭘 물어볼지 아는 듯 곤란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그가 사랑하는 아이돌 color’s 멤버들이 새겨진 괴상한 셔츠를 입고서 말이다.

“재언 씨 몰랐구나… 회사 커뮤니티 같은 거 안 해요?”

“…인터넷을 잘 안 해서요.”

“다른 커뮤니티에 올라온 원글이랑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삭제됐지만, 혹시 몰라서 스샷은 찍어 놨어요.”

남무혁이 핸드폰을 꺼내 이것저것 만지더니 재언에게 내밀며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뭐, PDF로 저장하지 못해서 법적 효능은 없겠지만… 혹시 몰라서요. 이런 글이 얼마나 있었는지 지금은 전부 다 삭제돼서 남아 있는 글은 없어요. 제가 건진 건 이것밖에 없긴 한데……. 처음엔 재언 씨한테 보여 주려다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 봐 걱정돼서 고민 중이었어요…….”

남무혁이 보여 준 사진을 힐끔 본 재언은 이윽고 눈을 부릅뜨고 핸드폰을 낚아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어느 인터넷 웹사이트 게시글을 캡처해 놓은 사진이었다.

대략 여섯 장정도 된 캡처는 신재언을 도촬한 사진 두 장으로 시작했다. 편한 옷을 입고 바깥 풍경인 것으로 보아 회사 내에서 몰래 찍힌 건 아니었다. 몰래 찍은 듯 초점이 잔뜩 흐렸지만, 사진에 찍힌 인물은 누가 봐도 신재언 본인이었다.

사진 속 자신이 입은 옷은 저번 주 주말에 고양이를 데려온다면서 정신없이 지냈던 그때와 같았다. 다행히 함께 있었던 차민재는 찍히지 않은 듯했다.

“제 사진이… 이건 도촬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어서 게시글 링크를 재언 씨한테 보내려고 했는데 30분도 안 돼서 바로 삭제됐더라고요.”

사진을 넘기자 보인 게시글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글쓴이는 신재언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에 대해 악담과 헛소문을 잔뜩 적어 놓았다.

게시글 안의 신재언은 얼굴만 믿고 여자를 후리는 쓰레기 놈이며 그 때문에 어떤 여성은 자살까지 한, 완전히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특히 글쓴이는 신재언이 손목에 찬 시계를 두 번이나 언급했다.

신재언의 여자친구가 이 시계를 구하기 위해 몸을 팔았고, 재언이 그걸 타인인 글쓴이에게 손목을 내보이며 자랑했다고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연애 대상의 성별이 여성이었던 적도 없거니와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자살한 적은 더더욱 없다. 절대로 자신의 아랫도리는 가볍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시계는… 선물 받은 건 맞지만 그건 차민재의 고혈이 아니었다. 레드-헬-파이어에게 그런 시계쯤이야 푼돈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비싸겠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 이 글을 통해 시계가 얼마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하루 출장으로 몇십 억은 거뜬하게 벌어 오는 차민재가 고작 몇 억짜리 시계에 몸을 팔진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았다.

재언이 황당한 마음으로 읽어 내리는 캡처 속에는 임 대리와의 추문도 존재했다. 글쓴이가 아니라 재언과 임 대리를 잘 아는 듯한 누군가가 나타나 장문으로 댓글을 달았다.

글쓴이와 댓글쓴이는 서로 친근한 말투로 시시덕거리며 재언에 대해 신랄하게 아는 척 떠들었다.

[Kim82 : 더러운 새끼 오늘도 걸레 같은 몸 굴려서 다 좆뱅이 치면서 야근하는데 지 혼자만 퇴근함. 그러면서 기세등등하게 처웃는데 아구창 갈길 뻔…….

ㄴㅇㅇ123 : ㅋㅋㅋㅋㅋㅋㅋ거기도 ㅆㅊ났네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어케 됨?

ㄴㄴKim82 : 뭐 어케 할 것도 없음. 그냥 그 새끼만 여자 ㅂㅈ존나 빨아줘서 월급 도둑 되는 거임. 얼굴은 볼만해서 다른 ㅅㄷㄴ들이 눈깔 뒤집혀서ㅇㅎㄱㅇ하는거임ㅋㅋㅋ]

중간중간 무슨 소리인지 이해 못 할 자음들 때문에 읽기가 어렵긴 했지만 딱 봐도 더럽고 저급한 단어들이 분명했다. 애초에 이 게시글이 올라온 웹사이트 자체가 질이 나쁘기로 유명했다.

연예인들은 물론 일반인들 사진을 올리며 성희롱과 욕설을 섞어 가며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곳이었다. 저들의 인생이 얼마나 한심하고 저열한지 재언은 아주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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