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00화 (200/324)

200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는 재언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자 남무혁은 그동안 말하지 않고 숨겨 왔던 게 미안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인사과 사람들은 재언 씨랑 임 대리님이 그럴 리 없다는 거 잘 아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데 요즘 새로 들어온 교육생이나 신입사원들은 두 사람을 잘 몰라서 그런가 믿는 눈치더라고요. 이번 프로젝트에 두 사람이 같이 묶여 있으니까 소문이 더 과장되고 있고요.”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던 남무혁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말 안 한 건 정말 미안합니다! 재언 씨도 이렇게 알게 돼서 좀 당황스럽죠?”

“네… 당황스럽긴 하네요.”

신재언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서늘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남무혁은 서리가 앉을 정도로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남무혁이 아는 신재언은 다정다감하고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일이 불합리해도 일단 처리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태도는 타 부서에도 평판이 좋았다.

착하고 다정하면 얕잡아 본다고 그랬던가. 회사에서 누구와도 문제가 없이 지내는 그를 오히려 시기 질투하는 사원이 많았고 그 때문에 가십에 휘말리곤 했다.

남무혁은 이기적으로 사는 게 편한 세상에서 일에 휘말릴 때마다 초연하게 넘어가는 그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런 신재언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습관적으로 지어 왔던 미소도 지운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이번엔 조금 도가 지나치네요.”

다음 날, 김 대리가 사고로 두 달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불합리한 순간이 생기곤 한다. 그리고 순간을 겪게 만든 상대방에게 맹렬한 살의를 느낄 때도 있다.

재언은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죽이고 싶다고 하면 말린 적은 없지만, 막상 자신이 피해자가 됐을 땐 감정에 브레이크를 거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기분에 따라 휘하에 있는 자식들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죽을 만한 짓을 저질렀나?’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겨도 죽을 만한 짓을 저지른 게 맞는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

인터넷에 이따위 게시글을 올린 글쓴이는 알 수 없지만, 댓글에서 신재언과 임 대리를 향한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이가 누구인지는 짐작이 갔다. 아니,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재언은 자식들을 시켜 김 대리의 핸드폰에서 인터넷 방문 기록과 댓글 기록이 있는지 확인해 봤다. 역시 Kim82라는 악의적인 댓글을 단 놈은 김 대리가 맞았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이런 자식은 죽여야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점차 냉정해졌다.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하던 재언은 그게 죽을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면서 결론지었다. 자신이 그어 둔 선을 아슬아슬하게 줄 타는 대머리를 떠올리면 열불이 나긴 하기에 도가 지나치게 행동한 것만은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엔레이드맨. 손 좀 봐줘……. 죽이진 말고.”

그리고 원글은 이미 삭제되었고, 웹사이트가 해외 전산망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한국에선 IP 추적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삭제하기 전에 PDF로 저장해 두었다면 모를까.

“김 대리 이 새끼는 방구석에서 이딴 웹사이트나 쳐 하고 있으니 성공도 못 하고 머리나 까졌지.”

아무리 해도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임 대리에게 어떻게 전해 주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남무혁이 말한 대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 같고 괜히 임 대리까지 불쾌해질 뿐일지도 모른다. 얼굴이 공개된 건 자신뿐이니 임 대리에게는 사건이 모두 해결된 나중에 넌지시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엔레이드맨이 김 대리에게 무슨 짓을 해서 그가 어떻게 다쳤는지까진 알 수 없었다. 사실 거기까지 재언이 알 바는 아니었다.

재언이 이를 가는 만큼 자식들의 김 대리를 향한 증오심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기에 엔레이드맨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서 모습을 감췄다. 아마도 허용한 범위까지 최대한으로 지켜 김 대리를 몰아붙인 건 분명했다.

그동안 재언은 자신의 집 옥상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담배를 피웠다. 무슨 일이 겨우 해결되면 또 다른 새로운 일이 터지는 인생에 금연이 힘들었다.

담배꽁초를 주머니에 쑤셔 놓고 집에 돌아오자 현관문 앞에서 검은 고양이가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반겼다.

“애옹!”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 침대에 기대앉으며 따라온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이 좋은지 그릉그릉 소리를 내며 이마를 손목과 손바닥에 비벼 댔다. 그러다 앞구르기도 하고 벌러덩 몸을 뒤집더니 배를 만지라는 듯 신재언을 똑바로 바라봤다.

고양이는 배 만지는 걸 아주 싫어한다고 하던데, 그것도 고양이마다 다른가 보다. 재언은 폭신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고양이를 떡 주무르듯이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런 나보단 멀쩡하게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사람한테 보내는 게 낫지.’

김 대리를 손봐주었으니 후련해야 할 텐데 입맛이 씁쓸했다. 어쨌든 자신은 깨끗하다고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멀쩡한 직장을 가지고 있어도 그와 별개로 미래가 불투명했다.

사회의 주적들을 자식으로 둔 데다가 이번에 내쫓은 알례리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러니 욕심난다고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것보단 차라리 평범한 사람에게 보내는 게 나을 것이다.

“이번엔 정말 잃어버리지 않을게요!”

그래도 아직은 사람을 믿고 싶었다.

@

야옹-.

집에 있을 땐 애교가 잔뜩 섞인 간드러진 목소리로 울더니, 지금은 상당히 굵은 울음소리를 냈다. 검은 고양이가 겁에 질린 듯 이동장 구석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동공을 잔뜩 확장한 채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재언이 옆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조수석에 앉은 차민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이동장에 자꾸 시선이 갔다.

“불안한가 봅니다.”

“그렇죠.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자주 돌아다니는 건 안 좋다고 하더군요.”

“이번이 마지막 이동이니까 조금만 참아.”

운전대를 잡고 있는 신재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들은 지금 나비를 옛 주인에게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재언의 집에 놀러 와 낚싯대 장난감을 흔들던 차민재는 오늘 나비를 보내야 한다고 말하자 무심한 건지 아쉬운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거기다가 분양 확인서를 작성하느라 끙끙대는 재언에게 레드-헬-파이어의 전속 변호사를 소개해 주려고까지 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거절하긴 했다.

애초에 임시 보호이고 옛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것뿐이기 때문에 분양 계약서까지는 쓰지 못하지만, 확인서 정도는 받고 싶었다. 어느덧 재언이 운전하는 차가 광지혜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재언은 주차장 앞에 광지혜가 발을 동동 굴리며 서 있는 걸 보고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주차도 대충하고 차에서 내렸다. 아직 제법 추운 날씨인데 그녀가 민소매 배꼽티에 짧은 바지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 춥지 않습니까?”

“네. 캠핑이가 오고 있다고 해서 급하게 나오느라고요! 걸치는 걸 깜박했어요.”

그녀의 옷차림이 추워 보이는 것도 있지만, 꼰대스러운 면모가 있는 재언에게는 살짝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것이어서 재언은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양한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입고 싶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가 없었다.

광지혜는 발을 동동 굴리면서도 차민재의 품 안에 있는 이동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올라오실래요? 설희랑 합사 적응 기간이 필요하대서 캠핑이가 머무를 공간에 울타리를 설치했거든요.”

그녀가 핸드폰을 내밀어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위쪽이 막혀 있는 커다란 울타리가 침대 근처에 설치되어 있었다.

“검색해 봤는데 고양이 합사가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네…….”

재언은 차민재에게 이동장을 건네받고 한 번 꼭 안았다가 광지혜에게 넘겨주었다. 넘겨받은 이동장을 끌어안으며 광지혜가 환하게 웃었다. 잃어버린 줄 알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다시 찾아 기쁜 모양이다.

재언은 집에 들렀다 가라는 그녀의 말에 마음 한구석의 미련이 들킬까 봐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집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차민재와 차에 올라탔다.

“민재 씨. 저는 불행을 사랑해요. 아… 말이 조금 이상한데……. 불행한, 혹은 불행할 이들이 눈에 계속 밟히더라고요. 엔레이드맨, 그리고 타락한 추기경이 그랬죠. 다른 자식들도 다르지 않아요.”

차민재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재언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운전에 집중했다.

“나비가 계속 신경 쓰였던 건 그 애가 훗날 불행해질 게 분명했다는 소리예요. 근데 이게 또 느낌이라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서 아주 애매해요. 나비가 제 옆에 있었다면 불행해졌을지도 몰라요. 옛 주인이라는 사람이 좀 못 미덥긴 한데……. 제 옆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 후, 집으로 돌아가자 울타리 안에 무사히 들어갔는지 광지혜에게서 사진이 담긴 메시지가 몇십 개씩 도착했다.

그녀가 준 사진 속 울타리 안에는 나비, 아니 캠핑이가 아늑하게 쉴 수 있는 숨숨집도, 출산할 때를 대비해 넓고 부드러운 담요도 깔려 있었다. 화장실과 밥그릇, 물그릇이 한 곳에 있는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집이 좁아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서운지 동공이 잔뜩 열린 캠핑이가 숨숨집 안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있었다. 한 달 동안은 꾸준히 사진을 보내 준다고 했으니 그걸 보고 마음의 위안이라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광지혜의 연락이 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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