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재언이 집 근처까지 왔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는 중이었다. 빌라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밖으로 나온 재언은 핸드폰을 들어 지금 시간이 저녁 7시인 걸 확인한 뒤 광지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집을 정리하다가 캠핑이 물건을 찾았습니다.
어차피 저는 쓸모도 없으니 드리고 싶은데
언제 시간 괜찮을까요.
제가 댁으로 방문하겠습니다.]
성공적으로 발신한 메시지가 금방 읽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던 그녀는 약 2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답장했다.
[괜찮아요.
저… 오늘 찍은
캠핑이 사진 드릴게요.
그리고 남친이
진짜 오해하니까
오빠 연락하지 말아주세여ㅠ]
광지혜가 보내 준 사진 속 검은 고양이는 일주일이 넘었는데 아직도 울타리 안에 있었다. 여전히 배가 볼록하고, 흰 고양이를 노려보는 사진이었다. 재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가 보내 준 사진을 더욱 자세히 관찰했다.
나비의 출산일은 이번 주였는데, 지금은 이미 토요일이니 날짜가 훨씬 지난 셈이다. 재언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 올려 광지혜가 사흘 전 보낸 사진과 비교했다.
역시 두 사진은 각도만 다를 뿐 같은 날 찍은 게 분명했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고양이 장난감의 위치나 흰 고양이의 왼쪽 털이 살짝 뭉개진 것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설마… 사진을 잘못 보낸 거겠지.”
초조한 듯 화면에 떠 있는 사진을 몇 번이고 확대하던 재언은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통화가 빠를 것 같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들리고 통화 불가 안내음으로 넘어갔다. 몇 번을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메시지를 보내도 읽음으로 바뀌지 않았다. 재언은 주차장에서 나와 길거리에서 멍하니 핸드폰만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뒤에서 걸어오던 여성들과 부딪칠 뻔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쓸며 눈을 꾹 감았다.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을 가지기 전까지 재언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 없지만 나름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감정적으로 모자람 없이 자랐다.
하피 혼혈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차별도 혼자의 힘으로 극복해 냈다. 고등학교 때 잠깐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내긴 했어도 금방 털어 내고 사회에 적응했다.
물론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했고, 하피들을 향한 유리천장도 분명히 있다. 그래도 세상을 멸망시키거나 힘없는 일반인들을 죽일 만큼 성격이 파탄 나지 않았다.
비록 어쩌다가 얻은 희한한 능력으로 여덟 명의 자식을 만들었지만, 신재언 나름대로 자신이 정한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광지혜의 사생활에 깊게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었다.
한참 동안 눈을 가린 채 고민하던 재언은 깊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조각난 장난감. 광지혜의 집안을 살펴보고 와 줘. 검은 고양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만 확인해 주면 돼. 너도 우리 집에서 봤던 고양이 알고 있지?”
고양이와 함께 지낸 시간은 한 달도 채 안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걱정되었다. 재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눈알이 허공으로 떠오르다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엔레이드맨이 그녀가 광지혜의 집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와준 듯했다. 재언은 아무도 없는 골목길 안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초조한 표정으로 조각난 장난감을 기다렸다.
잠시 후, 재언이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자 조각난 장난감이 자신의 잘린 손목과 함께 돌아왔다. 그녀는 신재언의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 어플을 켜고 톡톡 두드리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그 여자의 집에 검은 고양이는 없었어요.]
한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탓에 단어가 완성되는 게 매우 느렸지만, 그녀가 치는 문장을 읽어가던 재언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흰색 고양이밖에 없었어요. 집안을 샅샅이 살펴봤는데 숨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재언은 커서가 깜박이는 화면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봤다.
“…광지혜는 문자를 보내지도 못할 만큼 바빴니?”
조각난 장난감은 눈알을 굴리며 재언의 눈치를 보다가 사실대로 전했다.
[아니요. 집에 없어서 찾아봤는데, 집 근처 술집에 있었어요.]
캠핑이를 제발 돌려 달라고 했었던 광지혜의 눈물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녀에게 악의나 증오가 느껴졌다면 신재언도 고양이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캠핑이를 찾고 있었고,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의 집에 검은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는 미리 찍어 두었던 사진을 보내며 재언의 연락을 피했다.
“하아…….”
재언은 또다시 한숨을 쉬며 마지막 이성을 끌어모았다. 지금 당장 광지혜가 친구들과 있다는 술집으로 찾아가 경위를 따지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눌렀다.
새벽에 귀가하는 광지혜의 뒤를 몰래 밟아 고양이를 어떻게 했냐고 묻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희망 때문이었다.
임신 중인 고양이가 출산 중에 어딘가 잘못되어 병원에 입원했거나 하는, 그런 위급한 상황이라고 믿고 싶었다.
임 대리는 입양을 보낼 때 제발 입양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인간이기를 하늘에 비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입양을 받기 전까진 좋은 주인인 척, 고양이를 위하는 척하는 인간들이 널리고 널렸다고 했다.
그렇다고. 어떤 방법을 써도 그런 사람들을 거르기도 쉽지 않고, 아무리 백번 조심한다 해도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면 어떻게 될지 모른단 말이었다.
10년을 키운 고양이도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버리는 인간들이 수두룩한데, 그들도 지난 10년 동안 고양이를 귀여워하지 않았겠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아무리 해도 돌아오지 않는 광지혜의 답장에 신재언은 결국 최후의 방책을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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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귀가한 광지혜는 술에 취한 상태로 씻지도 않고 침대에 벌러덩 엎드렸다. 그녀는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었는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훌쩍거렸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흰색의 긴 털을 자랑하는 고양이가 다가와 발바닥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다가 침대로 올라가 그녀의 무릎 옆에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런데 고양이가 갑자기 고개를 퍼뜩 쳐들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자신의 영역에 침입자가 온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린 고양이가 경계 어린 눈으로 한곳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내 광지혜밖에 없었던 어두운 집에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신재언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의 옆에 열여섯 살 소년의 모습을 한 엔레이드맨이 함께했다. 엔레이드맨이 왼손을 아래에 놓고 오른손을 위로 겹쳐 결계를 만들어 냈다.
그의 손에서 작은 돔 모양의 타원형 결계가 점점 커지더니 광지혜의 원룸을 가득 채웠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을 향해 하악질하는 고양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방 안에는 신재언과 광지혜만이 남게 되었다.
엔레이드맨의 둠(doom) 안으로 광지혜만 들어오게 된 것이다. 재언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고양이의 흔적에 엔레이드맨에게 고갯짓했다.
“네, 아버지.”
엔레이드맨이 공손하게 대답하며 신재언의 명령에 따랐다. 술에 취해 울다 잠이 든 광지혜의 머리 위로 나비가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만 한 나비가 살랑이며 날갯짓을 하다가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졌다. 그러자 그녀가 흐릿한 시선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아마 지금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몽롱할 것이다. 비각성자에게는 능력자의 능력이 훨씬 잘 먹히는 것도 한몫했다.
“어…으…….”
“광지혜씨.”
“아… 재언 오빠다.”
“…….”
자연스럽게 나오는 호칭에 재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캠핑이 어딨습니까?”
“캠핑이요… 캠핑이…….”
재언의 물음에 광지혜가 우물쭈물하더니 눈동자 가득 눈물이 고였다.
“캠핑이… 흐윽… 설희랑 잘 지내는 줄 알고… 울타리 밖으로 꺼내 줬는데… 설희랑 미친 듯이 싸우는 거예요. 설희랑 하악질 하면서 싸우더라고요……. 거기에 놀라서 설희를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는데 밖에 있던 남친이 그 소리를 듣고 현관문을 벌컥 열어 버렸어요.”
그녀의 말이 점점 어눌해지고 힘이 없어졌다.
“전 정말 놀라서 그랬어요. 남친이 갑자기 문을 열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에요. 그런데 캠핑이가 놀랐는지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저도 바로 쫓아가려고 했는데, 설희가 많이 놀란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설희를 달래 주고 밖으로 나갔는데 아무 데도 안 보였어요…….”
그녀가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밖에까지 찾아봤는데도 없어서, 나중에 경비실에서 CCTV를 돌려 보니까……. 지하실에 숨어 있었던 거예요. 전 그것도 모르고 밖에서만 계속 찾았는데…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밤에 사람이 빠져나갈 때 같이 나가 버린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찾고 있는데 보이질 않아요.”
그녀의 말에 신재언은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물었다.
“그럼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신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잃어버렸다고 하면 화낼까 봐 무서워서 그랬어요……. 그래서 캠핑이 찾으면 다시 문자 보내려고 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죄송해요, 오빠. 캠핑이 진짜 잘 키우려고 했는데…….”
차라리 잃어버린 날 신재언에게 말이라도 해 주었다면, 그의 자식들과 차민재가 누구보다도 빠르게 고양이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광지혜가 말하길, 캠핑이를 잃어버린 지 벌써 사흘이라고 했다.
그 순간, 재언은 문득 편의점 주인 부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김향숙이 검은 고양이를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었다.
“길고양이가요… 사람을 좋아하면 정말 큰일 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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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 고양이 새끼는…….”
남자는 저 멀리 보이는 고양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검은 고양이는 배도 불렀으면서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가오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남자는 배가 볼록 나와 살집이 두둑한 남자였다. 고양이를 본 그가 히죽 웃었다.
“그 x창 새끼가 키우는 고양이 아니야?”
아니면 뭐 어때. 그 새끼가 데려간 고양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남자는 들고 있던 뜰채로 고양이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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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끼치는 사람이 있어도 도망가질 않는 거예요. 사람이 좋으니까요……. 차라리 도망가고 경계했으면 그런 놈들한테 잡히지 않을 텐데, 사람을 좋아해서 죽는 거예요. 길고양이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