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차민재가 동그란 버튼처럼 생긴 무언가를 재언의 눈앞에 내밀었다. 재언이 손바닥을 펼쳐 건네받자 흰색이었던 것이 손바닥과 같은 색으로 바뀌었다.
색이 변하는 걸 확인한 뒤 들어 올리자 다시 원래대로 하얗게 변했다.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크기인 그것의 아래쪽에서는 희미하게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이게 뭡니까?”
“아동학대 방지 경고 알리미입니다.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집에 설치하면, 소란이 일어나거나 폭력을 행사했을 때의 에너지 파동을 잡아내어 알림을 보내는 아이템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게 있었어요?”
“…만든 건 우리나라 히어로 협회가 맞지만, 실사용은 외국에서밖에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인권 침해라는 이유로 반대 여론이 많아서 관련 법안이 처리되지 못하고 있거든요.”
“아동 폭력에 가해자의 인권이 중요했던가요?”
“뭐… 다른 복합적인 이유도 있긴 하지만요. 어쨌든 딱 2주 정도만 이걸 저 여자의 집에 붙여 봅시다.”
재언은 유혹 같은 차민재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락받지 않고 몰래 붙이는 건 불법 아닌가요?”
이미 신재언 본인은 물론 자식들도 불법적인 일들을 줄줄이 저질러 오긴 했지만, 재언은 자신을 나름대로 준법정신이 투철한 모범 시민이라고 여겼다.
“계속 붙여 놓자는 건 아니에요. 어차피 폭력을 행사할 때 나오는 에너지를 감지하는 것뿐이라 영상이 녹화되거나 소리를 들을 수 있진 못해요. 혹시라도 재언 씨가 걱정하는 그런 일이 벌어질 때를 대비한 겁니다. 재언 씨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잖아요.”
“…맞아요. 광지혜 씨 말로는 나비가 어릴 때부터 몸이 안 좋아 자주 병원에 데려갔다고 하지만 제 느낌은 달라요. 그녀의 전 애인이 광지혜 씨 몰래 고양이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것 같거든요.”
처음 동물병원에 갔을 때 나비를 진찰하던 수의사가 고양이의 체구가 머리에 비해 작고 뒤 골반 쪽이 이상하게 꺾인 채 굳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사람이 나비의 뒷다리를 잡고 바닥에 내려쳤을지도 모른단 말에 재언과 차민재는 동시에 학대를 떠올렸다.
아마도 광지혜의 전 애인이 나비에게 폭력을 썼을 가능성이 컸다. 재언이 본 광지혜는 동물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그녀가 폭행 사실을 알면서 숨기려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혹시라도 나비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바로 우리 사무실에 경고음이 갈 겁니다.”
“…….”
결국, 재언은 차민재의 설득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 덕분에 광지혜가 악의를 가지고 나비를 때리거나 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악의가 없다고 그녀에게도 잘못이 없는 걸까. 오히려 악의를 가지고 행동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었을 텐데, 그럴 수도 없으니 재언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오빠가 마음에 드는데… 미움받을까 봐 무서웠어요.”
엉엉 울며 변명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던 재언은 지금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단 사흘 전 집을 나갔다는 나비를 먼저 찾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뒤로하고 집 밖으로 나가 가장 먼저 차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의뢰 때문에 해외에서 임무 중인 그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불이 꺼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발신인은 남무혁이었다.
예상을 모두 뒤엎은 전화에 재언은 그대로 무시하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남무혁이어도 아이돌 찬양 전화를 이런 늦은 시간에 할 리 없었다.
눈치 없는 척, 아이돌 덕후인 척하고 다녀도 사실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다. 회사에서 눈치 빠른 게 얼마나 피곤한지 알기에 적당히 없는 척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니고 있는 거였다.
“네, 여보세요.”
잠시 고민하던 재언이 전화를 받자마자 남무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재언 씨, 혹시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재언 씨가 모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괜찮습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무슨 일입니까?”
- 재언 씨… 임신한 검은 고양이 임보 중이라고 하셨죠? 혹시 고양이 잃어버리셨습니까?
고양이 이야기에 심장이 철렁했다. 재언은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예전 주인이 찾아와 돌려보냈는데, 그 주인이 고양이를 다시 잃어버렸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 맙소사……. 재언 씨, 제가 지금 문자로 링크 하나 보내드릴 테니까 여기 들어가 보실래요? 저번에 재언 씨 사진으로 자기들끼리 저급하게 노는 게 신경 쓰여서 그 커뮤니티를 계속 살펴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좀 심상치 않은 글이 올라왔어요.
일단 빨리 확인부터 하라며 냅다 전화를 끊은 남무혁이 문자를 한 통 보내왔다. 문자에 첨부된 링크를 누르니 이전에 본 웹사이트의 한 게시글이 나왔다.
재언은 그 게시글을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곤두섰다.
남무혁이 보내 준 게시글 안에는 엄청나게 저급한 욕설과 함께 사진이 여러 개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뜰채로 잡힌 검은 고양이가 동공을 잔뜩 확장한 채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나 기억하는 새끼들 있으려나??
씹창새끼가 키우다가 임신시켜서 버린 고양이 주워옴ㅋㅋㅋ
그 새끼가 그럼 그렇지.
쓰레기통 뒤지는 해충털새끼 잡아옴 ㅋㅋ 따봉 20개 넘으면 다리 한 짝부터 자름.
임신했는데 배 갈라서 새끼 꺼내 볼 작정.
동영상 찍을 건데 요청하면 보내줌 ㅋ
경찰에 신고하지 마셈;
새벽 3시까지 따봉눌러라.]
재언이 확인한 현재 시각은 오전 3시 15분이었다.
@
남자가 고양이들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 건 반년 전이었다.
어느 날, 그는 즐겨 보는 여성 BJ의 인터넷 방송에 2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후원했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저 여자가 자신을 특별 대우해 주고 만나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기준일 뿐이었고, 여성 BJ에게는 후원금 20만 원 정도가 높은 축에 속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몇 번 그의 아이디를 불러 주며 감사 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에 남자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BJ는 돈만 받아 놓고 다른 남자를 유혹하는 걸레이자 창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채팅으로 지속해서 요구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채팅창을 관리하는 매니저에 의해 쫓겨났다.
성희롱 발언을 이유로 제한당했기 때문에 매니저가 허용으로 바꿔 주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아이디로는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피 같은 20만 원을 큰맘 먹고 투척했건만 그녀가 단물만 쪽 빨아먹은 뒤에 고작 채팅 메시지 하나 때문에 쫓아냈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니ㄴ ㅂㅈ먹고싶어서 20만 원이나 썼어]
그렇다. 남자에게는 이것이 고작 채팅 하나일 뿐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는 식칼을 신문지에 싸서 가방에 넣고 BJ의 집으로 찾아가 그녀의 면상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하지만 그는 BJ의 집은커녕 근처도 못 가고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러던 중 집 근처의 편의점 건물 옆에서 늘어지게 자는 고양이가 문득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에서 고양이는 해충이나 마찬가지라 죽여도 된다는 글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눈을 번뜩인 남자는 가방에 넣어 놓았던 식칼로 고양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뒤 도망쳤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희열에 몸부림쳤다.
그날 이후로 그는 고양이들을 찾아 죽이는 짓을 반복하다가 그걸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 웹사이트 게시판에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글로 인해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난리가 났다.
평소에 자신이 무슨 글만 써도 욕만 하던 쓰레기들이 칭찬하고 추천해 댔고 다른 곳에서 별 이상한 것들이 설교랍시고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8,000개가 넘어가는 댓글을 본 남자는 낄낄거리며 조소했다. 이걸 공론화시키겠다느니 뭐니 하는 것도 우스웠다.
하면 뭐하나? 지금까지 이 일로 한 번도 잡힌 적도 없었고 딱히 잡혀도 상관없었다. 그깟 고양이 몇 마리 죽였다고 크게 처벌받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대한민국은 씨이발 살기는 개좆같아도 이럴 땐 편하다니까.”
남자는 자신의 집과 조금 떨어진 뒷골목에서 한 손에 토치를, 다른 한 손에는 부탄가스를 들고 무언가가 들어 있는 쌀 포대 쪽으로 걸어갔다.
피로 얼룩진 쌀 포대 안에 작은 생명체가 미약하게 숨 쉬고 있는 듯 작게 꿈틀거렸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남자를 떠올리며 비열하게 미소 지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자신도 이렇게 못생긴 얼굴과 곰보 자국으로 가득한 피부, 키도 작고 살찐 외모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다.
이 사회가 자신을 악마로 만들었다. 그놈처럼 잘생긴 얼굴에 키 크고 몸이 좋았으면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닐 수 있으니까 사회에 불만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남자가 토치를 부탄가스에 꽂으며 불을 붙이고 있을 때, 어두운 골목길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있나?’
그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인터넷상에서는 신고당해 봤자 안 들킬 자신 있으니까 자신만만해한 것이지만, 현행범으로 잡혔을 때의 벌금은 조금 걱정되었다.
그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는 갑자기 온몸에 가해진 충격으로 허공을 붕 날아 벽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다. 기절한 남자를 지나친 재언이 다급하게 쌀 포대 쪽으로 달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포대 입구를 묶은 끈을 푼 재언의 푸른색 눈동자가 죄책감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동물을… 각성시킨 적은 없지만… 각성하면 살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