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재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포대 안에서 희미하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증오해 줘… 사람을 미워해……. 널 그렇게 만든, 사람을… 조금이라도 증오한다면…….”
하지만 녹색 눈동자를 힘겹게 뜬 고양이가 재언을 보며 반가운 듯 작게 울었다. 검은 고양이는 이 지경이 되어서도 사람을 증오하지 않는, 그런 멍청하고 착해 빠진 생명체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검은 고양이의 목소리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었다.
“까미는 사람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재언은 비통한 표정으로 포대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그의 자식들이 골목길 안으로 들어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지금 신재언은 후회 중이었다. 광지혜가 원래 주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못 미더워 하면서도 나비를 돌려준 것부터 시작해서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이 편의점 앞에서 시비를 걸었을 때 미리 손보지 않았던 것까지 후회되었다.
아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던 것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신경 썼던 존재들은 대부분 불행해졌으니 눈에 밟히고 챙겨 주고 싶어도 검은 고양이를 내버려 두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 신경 썼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참혹하게 죽은 게 아닐까.
재언은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는 외모로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열등감을 가지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꼬투리를 잡는 사람 역시 적지 않았다.
그런 놈들이 신경 거슬리게 굴었던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지나갈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두통이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저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그 순간, 재언의 귀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포대 안에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낑낑대며 바스락 움직이는 소리였다.
분명히 검은 고양이는 숨이 끊어졌다. 공포에 질린 듯 울던 고양이는 재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안한 감정들을 모두 녹여 버리고 반가운 울음소리와 함께 죽었다.
그런데 이 울음소리는 뭐지. 고개 숙여 확인한 포대 안에서 작은 핏덩이가 분명하게 움직였다.
나비를 포함해 안에 있던 새끼들도 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피 웅덩이에 빠진 검고 작은 덩어리가 앞발을 허우적거리며 다시 낑낑 울었다. 재언은 자신의 손바닥보다 훨씬 작은 새끼 고양이를 꺼내며 아연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나비가 남겨 준 핏덩이 하나가 슬픔에 잠긴 재언을 현실로 일깨웠다.
새끼 고양이를 꺼내 손으로 안은 재언은 무릎을 꿇고 있는 엔레이드맨에게 한 마디 남기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엔레이드맨. 나는 동물병원에 가 봐야겠어. 너는 나비를 잘 수습해 주고 그 남자는… 일단 가둬 놔.”
“네, 위대하신 아버지.”
엔레이드맨은 납작 엎드려 공손하게 대답한 뒤 자신과 형제들, 그리고 죽은 고양이와 남자를 데리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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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이발, 인생 좆 같네!’
남자의 이름은 김원창. 나이는 스물여섯.
길 가다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다가가 번호를 물으면 대부분 똥 씹은 표정으로 거절하거나 자리를 뜨곤 했다. 그나마 끈기 있게 쫓아가 받은 번호조차도 다른 번호거나 남자친구 번호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냥 친구부터 시작해 보자는 건데 혼자 김칫국 마시며 남자친구가 있느니 뭐니 지껄이는 게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얼굴이나 돈만 보는 골빈 여자는 이쪽도 사양이지만, 이러다 섹스 한 번 못 해 보고 죽을까 봐 걱정되기도 해서 인터넷으로 불법 유흥업소를 검색해 찾아가 보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실패했다.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대를 제대한 이후, 남자는 공무원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도 안 하고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 써서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 김원창이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엉덩이가 아프고 불편한 걸로 보아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데, 일어나려고 해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리라도 쳐 볼까 했는데 입이 막혀 있어 말할 수도 없었다.
이게 뭐지?
무슨 상황이지?
김원창이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틀자 바닥이 덜컹거리고 의자가 흔들렸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의자에 온몸이 결박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양 손목과 발목이 단단하게 구속되어 허벅지와 허리도 움직일 수 없게 꽁꽁 묶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에도 안대 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다.
“으읍, 으으으읍!”
그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피어오르는 공포심에 몸을 더욱더 거세게 흔들었다.
시야가 막혀 있고 재갈이 묶인 그의 귀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맑고 청량한 것이 아닌, 거센 비바람에 흔들리는, 폭풍으로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는 그런 소리였다.
“으으으읍!”
그는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드디어 눈치채고 몸을 뒤틀었다.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 때문일까, 오줌을 지린 그의 주변으로 시큼한 지린내가 진동했다. 그가 앉은 의자를 타고 누런 액체가 바닥에 똑똑 소리를 내며 흘렀다.
“…어머나, 이 남자… 오줌을 지렸어요.”
그때, 김원창의 귀에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말소리에 그가 귀를 쫑긋거리며 더욱 발버둥 쳤다. 이런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마치 부대 위 배우처럼 발음이 정확하고 청량한 밝고 아름다운 음색이었다.
기본적으로 여자를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는 여성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딱딱하게 굳었다.
“후후후, 아버지를 이토록 화나게 만든 인간은 드문데요……. 이 남자는 어떻게 될까요? 피부가 벗겨지고 상어 밥으로 바다에 뿌려질까요? 아니면 조각난 장난감 언니의 힘을 빌려 고양이한테 한 것처럼 산채로 사지를 자르고 배를 갈라 버릴까요?”
“그 고양이는 아버지께 어울리는 칠흑 같은 털을 가지고 있었죠. 아아, 이런 돼지 같은 남자에게 죽기엔 정말 아까운 목숨이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에 이어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벌써 기대되는군요. 이 남자는 지금까지 많은 동물을 고문하고 죽였을 텐데. 반대로 본인이 고문을 당하면 어떤 비명을 지를지……. 상상만으로 오싹합니다.”
“체어맨 오라버니는 이럴 때 참 악취미라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겁니다.”
공포에 질린 자신을 제외하고 방 안에 도대체 몇 명이 있는 것인지, 모두가 하나같이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살벌한 내용의 대화를 번갈아 가며 나누고 있었다.
김원창의 턱이 덜덜 떨렸다.
“이 가축 같은 남자가 뭔가 할 말이 있나 봐요. 재갈을 풀어 줘 볼까요?”
남자의 입에 물려 있던 것이 풀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실수로 눈을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도 같이 풀어졌는데,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게 남자에게는 행복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야를 막고 있던 것이 사라진 남자가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어두운 지하실에서 빛이라고는 천장에서 깜박이는 작은 전등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남자가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는 데 모자람은 없었다.
“…누님. 이자의 눈이 풀렸는데 괜찮은가요?”
남자와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어린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아직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대한민국에서 얼굴이 가장 잘 알려진 지명수배범이기도 해서 남자는 소년을 곧바로 알아봤다.
푸른색 깃털 코트에 손은 날개인 하피 종족의 소년, 미성년자를 살해한 학살자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가진 거대 빌런 학살자 버드맨이었다.
“하하하. 어차피 곧 죽을 남자인데 눈이 가려지건 가려지지 않건 무슨 소용이겠니?”
버드맨의 물음에 대답한 이의 발아래에는 말라비틀어지고 뾰족한 손톱을 가진 악귀들의 손이 허우적거렸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귀신들의 성녀는 섬뜩한 얼굴로 김원창을 내려다봤다.
지금껏 평범하게만 살아온 남자는 재앙 같은 빌런과 마주친 적이 한두 번뿐이었고, 그나마도 눈앞의 이들에 비하면 송사리였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경계하는 거대 빌런들, 인터넷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히이익. 히이이익!”
남자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살아온, 생태계에 해충 같았던 고양이 몇 마리를 죽였을 뿐인 일반인이었다.
그런 자신이 이런 이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때, 울고 웃는 가면을 쓴 여성이 우아하게 한 걸음 내디디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필두로 남자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빌런들이 모두 공손한 자세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고개도 못 들고 있던 남자의 시야에 평범한 운동화가 보였다.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새하얀 운동화를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남자의 시야가 다시 캄캄해졌다.
“아아, 이 더러운 남자의 눈에 감히 아버지를 담게 할 수 없지요.”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가 쓰러지고 묵직한 발이 그의 머리를 밟았다. 그는 재갈이 풀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숨이 넘어가는 듯 껄떡이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유일하게 겁에 질린 남자의 귀에 위협적이고 경멸 섞인 것이 아닌 애교와 신뢰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이 남자를 어떻게 할까요. 아버지께서 바라신다면 저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오, 이런… 귀여운 동생의 재미를 빼앗고 싶지 않지만,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저 역시 욕심을 부려 보도록 하죠. 아버지, 저 체어맨에게 맡겨 주신다면 이 남자의 입에서 돼지 같은 울음소리만 나오게 만들겠습니다.”
다들 하나같이 누군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소란스럽고 왁자지껄한 시간이 지나고 곧이어 지옥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짧았지만 김원창에게는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듯한 긴 침묵이었다.
곧이어 ‘누군가’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