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05화 (205/324)

205화

‘저 남자, ‘다크 카오스’의 입이 열리면 자신은 반드시 죽는다.’

김원창의 본능이 머릿속에서 그렇게 소리쳤고, 사실 그 촉이 매우 정확했다.

그는 다크 카오스의 입이 열리기 전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숨죽인 채 다크 카오스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빌런들이 김원창의 외침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들은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중간에 가로챈 가축보다 하찮은 남자를 일제히 노려보았다.

머리가 밟혀 위쪽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순 없었지만, 남자는 자신을 향해 느껴지는 살기에 제대로 된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공포가 지배했다. 턱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바닥이 남자가 흘리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백 번 넘게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짓을 이미 저지른 남자를 빌런들이 내버려 두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직 신재언이 그의 처분에 대해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재언이 어떤 명령을 내리든 즉시 따르기 위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안광을 번뜩였다.

“약한 동물에겐 잔악하게 굴었으면서, 우리 앞에선 꼴사납게 우는군요. 아아, 이렇게나 추할 수가.”

코루루가 들고 있는 부채를 펼치며 한껏 조소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튼 그녀의 가면이 언뜻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끝나자마자 다크 카오스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네가 뭘 잘못했지?”

“…….”

“네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사과하는 거잖아. 뭘 잘못했지?”

그의 말에 김원창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이 상황을 끝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죄송하다고 소리쳐 봤지만, 다크 카오스는 질문 하나를 끝으로 입을 꾹 닫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김원창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까지 죽이지도, 놔주지도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김원창은 자신이 이곳으로 끌려온 이유가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게 정답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도 그렇듯이 그가 저질러 왔던 짓이 여기 있는 빌런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지키는 히어로도 아니고 잔혹하기로 유명한 거대 빌런들이 그깟 미물 몇 마리 죽었다고 자신을 납치했다는 것이 아무리 해도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지 않는 이유에 결국 김원창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고… 고양이들을…….”

“…….”

“죽여서…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분노조절장애가 있어서…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어도 방 안에 내려앉은 침묵이 그게 정답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사실 김원창이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면 조금쯤은 신재언이라는 남자를 의심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납치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직도 머리를 밟힌 채 남자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제발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벌은 달게 받을게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평생 고양이들에게 속죄하며 살겠다고 중얼거렸다. 재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그가 진심으로 뉘우쳐서 사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구걸하는 항복일 뿐이었다.

재언은 훤하게 비어 있는 남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그의 바지 주머니에 있었던 핸드폰을 열어 사진첩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처참하고 끔찍하게 죽은 고양이 사진들로 가득했다.

고양이들은 이동장에 가둬져 산 채로 불에 타 죽거나 사지가 잘리거나 배를 갈라 죽어 있었다. 그것을 배경 화면 삼아 남자는 인증이라도 하듯 징그럽게 웃는 표정으로 얼굴 사진을 찍었다.

하나같이 눈동자를 뒤집은, 이상한 표정의 사진들이었다. 사진을 몇 장 확인하다가 속이 더부룩해진 재언은 고양이들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진으로 가득한 남자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급하게 새끼 고양이를 입원시킨 24시간 동물병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신한 나비의 배를 갈라 나비뿐만 아니라 새끼들까지 숨이 끊어진 상황에서 어미를 닮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마저도 태어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새끼 고양이는 탯줄도 잘리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어미에게서 꺼내어진 탓에 체온이 잔뜩 떨어져 위험한 상태였다. 의사도 살 수 있는 확률이 극히 낮다며 고개를 저었다.

라인을 잡을 수도 없고 약으로 조치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따뜻하게 온도를 유지해 주는 것뿐, 모든 건 새끼 고양이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했다.

지이잉.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연락이 드디어 도착했다.

[다행히 위기는 넘겼습니다.]

문자와 함께 첨부된 사진에는 죽은 건지 산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손가락 크기의 작은 고양이가 동물병원 유리로 된 사물함만 한 입원실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혼자서 머리도 가누지 못하는 작은 새끼 고양이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아버지, 어떻게 하시겠어요?”

“…….”

잠시 고민하던 재언은 짧게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

.

.

‘어떻게 된 거지?’

숨 막히는 침묵을 견디던 김원창은 언제부터인지 머리를 짓누르는 무게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럼에도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친 빌런들이 자신을 어떻게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죽을 것 같은 적막이 계속되었다.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던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귀에 인기척이 나지 않자 겨우 용기를 내 고개를 들었다.

“어……?”

그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지금 어두운 방 안이 아닌 골목길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였다.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작게 흙먼지가 올라왔다.

분명 자신은 빌런들에게 납치되어 이상한 지하실 같은 곳에 묶여 있었는데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였다. 꿈이라도 꾼 건지 현실성 없는 감각에 남자는 멍하니 양손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무언가에 묶였던 것처럼 손목에 생채기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번들거리는 이마를 손등으로 닦으며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기분 나쁘게 웃기 시작했다.

“사, 살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남자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찾는 물건이 없자 혹시 떨어트렸나 싶어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점점 현실감이 돌아오는 듯 남자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히힛… 인터넷에 올려야지. 빌런들한테 납치당했다가… 풀려난 썰… 풀어줌…….”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빌런, 그것도 거대 빌런과 마주치고도 살아남았다는 자신의 무용담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면 고양이를 죽였을 때보다 더 뜨거운 반응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그깟 고양이 몇 마리 죽였다고 빌런에게 납치당한 게 아닌 듯했다. 이렇게 멀쩡히 풀려난 걸 보면 착오임이 분명했다.

빌런에게 납치당해 십년감수한 썰이라는 제목의 글을 어떻게 재미있게 써서 올릴지 고민하던 남자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다크 카오스인 것 같은 남자 목소리… 어디서 들었던…….”

남자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드디어 주변을 둘러볼 정신이 생긴 것이다. 겁에 질려 정신없었던 탓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밤낮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이 져 주홍빛으로 변한 아름다운 저녁 하늘이 아닌, 핏빛을 머금은 듯한 섬뜩한 하늘이었다.

그 순간, 김원창이 있는 골목길 맞은편 건물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쳤다. 이내 공포 영화에서만 봤던 광경이 남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히이이익! 괴, 괴, 괴물! 괴물이다! 사람 살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골목을 빠져나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때 그 모습을 느긋한 시선으로 보던 누군가가 손가락을 튕기며 중얼거렸다.

“아버지께서 데려가신 게 너로구나.”

김원창이 본 누구보다도 매력적이고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지닌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봤다. 누군가는 고급 정장을 입은 아주 잘생긴 사내였다.

“끼히히히히!”

이상한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렸다. 이제 보니 사내의 뒤에 목이 두 개가 달린 이형의 사람,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 그리고 등에 검을 매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서 있었다.

사내가 천천히 양손을 펼치자 뒤쪽에서 기괴하게 비틀린 촉수가 김원창을 향해 튀어 나갔다.

“으아아악! 으아아아악!”

촉수는 김원창의 목과 사지를 붙잡아 사내가 서 있는 옥상까지 질질 끌었다. 끌려가는 내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김원창의 모습을 관찰하던 알례리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가 혐오스러운 것을 본 사람처럼 구슬프게 소리쳤다.

“이런 흉측한 놈을 아버지께서 왜… 넌 어떻게 아버지를 화나게 만든 것이지? 네 몰골은 어느 곳도 보고 싶지 않으니……. 이렇게 해서 입만 열 수 있게 만들어 데려가야겠어.”

곧이어 섬뜩한 소리와 함께 김원창을 붙잡은 촉수에 힘이 더해졌다. 골목길에 비친 김원창의 그림자가 점점 일그러지더니 동그랗게 원 모양으로 바뀌었다.

“아아, 이렇게 오랫동안 위대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없다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나의 신이시여…….”

과장된 몸짓으로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알례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