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06화 (206/324)

206화

새빨갛게 물들었던 하늘이 원래대로 까맣게 변하고 옥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골목길에서 엔레이드맨과 코루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울고 웃는 가면을 벗은 코루루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엔레이드맨에게 물었다.

“왜 아버지는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이렇게 보낸 거예요? 왜 살려 준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엔레이드맨이 쓰고 있던 헤드셋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아버지께선 그자를 살려 준 게 아니야. 아버지께서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내버려 둔 그자를 알례리가 가만히 둘 리 없지. 그걸 잘 알고 계셨던 것뿐이다. 하지만 어째서 직접 처리하지 않고 일부러 귀찮은 짓을 하셨는지 모르겠군.”

엔레이드맨의 말대로 재언은 김원창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반성하는 듯 눈물을 흘리는 김원창 같은 놈들을 수두룩하게 봐 왔다.

사실 신재언이 김원창을 잡아갔다는 것만으로도 알례리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김원창이 신재언을 모독했다는 사실을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재언이 그를 용서해도 알례리는 절대로 그 남자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재언은 아무리 알례리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해도 이번만큼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굳이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김원창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편할 테니까 말이다.

역시나 알례리는 신재언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였다.

다음 날, 김원창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실종되었다는 인터넷 기사가 떴다. 그리고 남자의 집에서 최근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하는 고양이 살해범이 실종자라는 증거가 끊임없이 발견되며 경찰은 납치로 추정했다.

인터넷에서는 그런 쓰레기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의견과 아무리 그래도 고양이를 죽인 걸로 납치보다는 법적 처벌을 받는 게 옳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렇게 김원창은 사라졌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제2의, 제3의 김원창이 버젓이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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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은 출장을 다녀온 차민재에게 어렵사리 나비의 죽음을 알렸다.

인간이 불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였기에 무덤덤하게 반응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차민재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풀이 죽었다. 슬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때쯤 민재가 불쑥 물었다.

“그 남자는 죽였나요?”

재언은 히어로에게 어느 정도까지 말해 주어야 하는지 헷갈렸지만, 말하지 않으면 전 세계를 샅샅이 뒤져서 남자를 불태워 죽일 것 같은 분위기라 솔직하게 불었다.

“…납치해서 위협하긴 했지만, 그 뒤는 저도 몰라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멀쩡히 뒷골목에 놔줬으니까요. 뭐, 말을 안 들어서 파문당한 자식 때문에 골치 아프긴 한데…….”

“…….”

광지혜도 나비의 죽음에 일조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여기면서도 재언은 그녀에게까지 손을 대거나 벌을 주진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벌을 줄 만큼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광지혜가 알려 준 SNS 계정에서 그녀가 새로운 새끼 고양이를 또 들였다는 글을 봤을 땐 진심으로 씁쓸해졌다.

[남자친구가 선물로 준 까만 고양이♡]

어이없는 문구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긴 털을 가진 검은 고양이가 찍혀 있었다. 지금도 기르고 있는 하얀색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품종묘였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건만 그 이후로 그녀가 올리는 게시글은 재언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기 충분했다.

[엄마가 미숙해서 멀리 떠나 버린 우리 캠핑이… 하늘에서 엄마 기다려 줄 거지?]

그녀는 나비의 어릴 적 사진을 올리며 죽은 고양이를 그리워하는 듯한 글을 올렸다.

댓글에는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유기묘를 데려와 그만큼 행복하게 키워 주었으니 분명 좋은 곳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글도 간간이 보였다.

사람들은 내막을 모른 채 진심으로 광지혜를 걱정했다.

세상일이 참으로 모순적인 것이 그 게시글 하나로 광지혜가 유명해졌다. 고양이 살해사건으로 인터넷이 한창 민감할 때 그녀가 올린 선행 글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기 충분했고 덩달아 그녀의 타투샵도 손님으로 북적였다.

한 달 전부터 예약하지 않으면 시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예약이 넘쳤다. 그런데 한창 그녀의 SNS와 타투샵 인기가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 헤어진 남자친구의 폭로 글이 올라왔다.

저번에 택이라고 소개했던 남자친구인 듯한 그의 폭로는 광지혜에겐 무척이나 독이었다. 고양이와 관련된 것은 물론 그녀의 사생활에 관련된 것까지 적나라하게 대중에 까발려졌다.

인터넷을 즐겨 하지 않는 재언은 잘 몰랐지만, SNS상에서는 뜨거운 감자였다고 한다. 그 후로 광지혜는 급하게 SNS 계정을 비공개로 돌리고 과한 비난은 고소하겠다고 글을 올렸으나,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재언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렇게 인기 있었던 타투샵을 접었다는 소식만 들려올 뿐이었다.

살아남은 새끼 고양이는 병원에 있어 봤자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집에서 사람이 정성껏 보살피는 게 더 낫다는 진단을 받고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낑낑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고 나비를 닮은 검은색 털이 솜털처럼 삐죽삐죽했다. 분유도 4시간에 한 번씩 먹이고 화장실 가는 것도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재언은 그 새끼 고양이를 데려가지 않았다. 재언은 자신이 동물을 책임지고 키울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끼 고양이를 차민재가 입양했다. 겉으로 봤을 땐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동정심도 없는 그가 동물을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적어도 두 번 다시 고양이를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돈이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아서 그런 건지 새끼 고양이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고양이가 차민재와 함께 산 지 2주 정도 되자 이유식을 혼자 먹고 화장실을 혼자 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조금 자랐다.

겨우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여도 나름 넓은 집 안을 모험하고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사고를 쳤다. 그러고 힘든지 하루 19시간 이상을 내리 잠만 잤다.

“신 선생님…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고양이 사건의 내막을 들은 이레일은 그 누구보다도 매우 침울해하고 안타까워했다.

“혹시라도 사장님이 배추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면, 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막겠습니다!”

그리고 새끼 고양이에게는 ‘배추’라는 이름이 붙었다. 날이 갈수록 쑥쑥 커지고 활동량도 많아진 새끼 고양이는 틈만 나면 배춧잎 모양의 장난감 인형을 공격했고 그게 눈앞에 없으면 온종일 찾으면서 울었다.

그래서 배추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는 차민재의 작명 센스 또한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다고 재언은 생각했다.

한 달 뒤 김원창의 시신이 강원도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산악회 회원들이 산을 오르다가 시신을 발견하고 신고했다고 한다.

외상은 전혀 없이 깨끗했지만, 속이 텅 비어 있는 괴이한 상태였기에 잠깐은 인터넷이 시끌벅적했다. 운 나쁘게 잔악한 빌런의 손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식으로 보도된 후 김원창의 일은 대중에게 점점 잊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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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불린 사료를 혼자서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란 새끼 고양이는 아직도 민들레 홀씨처럼 삐죽삐죽한 털을 가졌다. 아직도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성묘가 되면 눈 색이 바뀐다고 하니 나비를 닮아 초록빛이 나는 노란색 눈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전에는 차민재가 신재언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었다면 지금은 정반대가 되었다. 새끼 고양이를 두고 외박을 할 수 없는 차민재의 집으로 재언이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그의 집은 결계가 겹겹이 쌓여 있어 자식들이 마음껏 드나들 수 없었다. 그래서 원성이 자자한 자식들을 배려한답시고 출입이 가능하게 만들어 주긴 했지만, 자식들은 히어로의 집에 들락날락하는 건 조금 꺼리는 듯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배추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소파 밑에 숨어 있다가 차민재가 지나가면 덮치려는 듯 앞발을 치켜세우고 뛰어들었다. 그래 봤자 짧은 꼬리와 살랑이는 엉덩이가 다 보였다.

차민재는 자신의 종아리를 향해 뛰어든 작은 고양이를 한 손으로 잡고 뒤집어 약을 먹일 준비를 했다. 아직도 몸이 작고 경련 증세가 잦은 탓에 영양제와 약을 주입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엔 워낙 작아서 캡슐 알약보단 가루약을 먹이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에 물에 타서 약을 먹였었다. 그러나 고양이가 약을 먹자마자 게거품을 물고 약을 뱉어 버렸다.

결국, 아주 작은 알약으로 만들어 두 번 정도 강제로 먹였다.

재언은 차민재의 집에 놀러 와 책을 읽으며 새끼 고양이와 씨름하는 그를 구경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알약을 조심스럽게 잡고 이빨도 제대로 안 난 조막만 한 고양이의 입을 벌려 안으로 욱여넣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물을 담은 작은 주사기를 입 안에 쏘아 댔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재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계 최강의 히어로가 손바닥만 한 고양이에게 쩔쩔매며 약을 먹이다 못해 고양이가 차민재의 얼굴에 퉤 하고 알약을 뱉어 낼 거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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