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07화 (207/324)

207화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가 헬스장 가득 울렸다. 러닝머신에서 달리고 있던 재언이 숨을 고르게 내뱉으며 기계 전원을 끄고 내려왔다.

40분 정도 유산소 운동을 했으니 웨이트로 넘어갈 타이밍이었다. 재언은 무선 이어폰을 낀 채 목에 두르고 있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덤벨 쪽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편이지만, 요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터지는 통에 아주 오랜만에 헬스장이 온 참이었다. 하지만 처음 올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던 곳인 데다 여러모로 불편했다.

일단 웨이트 운동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너무 협소했고 헬스장을 마치 전세 낸 것처럼 구는 이상한 회원도 몇몇 있었다. 상황을 봐서 원래 다녔던 곳으로 얼른 다시 옮기고 싶었다.

웨이트까지 모두 끝내고 운동을 마무리한 재언이 탈의실로 들어가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때마침 차민재의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재언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빠른 속도로 메시지에 답장했다.

[금방 갈게요. 저도 운동이 방금 끝났거든요.]

아마 오늘도 차민재의 집에서 자고 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럴 때마다 자식들은 치를 떨며 반대하긴 했지만, 새끼 고양이를 양육하기 시작하는 연인에게 맞춰야지 어쩌겠나. 이쪽이 가야지.

“…휴.”

다시 한번 더 크게 한숨을 내쉰 재언이 핸드폰을 사물함에 넣고 옷을 벗었다. 그런데 그때, 엔레이드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 시답지 않은 짓을…….

“엔레이드맨?”

재언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반대편 사물함 벽면에 걸려 있던 달력 안쪽에서 파지직거리는 기계음 소리가 들렸다.

어리둥절함과 황당한 마음을 가득 안고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은 뒤 재언이 달력을 옆으로 밀자 구멍 뚫린 벽 안에 숨어 있는 카메라 렌즈가 선명하게 보였다.

‘남자 탈의실에 몰래카메라가 있다니?’

다행히 재언이 배정받은 사물함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지만, 카메라가 향한 방향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샤워실 앞이라는 건 분명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재언은 탈의실 밖으로 나가 가장 먼저 보이는 헬스장 트레이너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 헐, 잠시만요. 하나야!”

재언의 말에 트레이너가 곤란한 표정으로 멀리서 일하고 있던 직장 동료로 보이는 여성 트레이너를 불러냈다.

“여자 탈의실도 한번 확인해 줘.”

“헐… 네.”

이하나라는 이름으로 불린 트레이너가 후다닥 여자 탈의실로 달려갔고 남자 트레이너, 박찬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재언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휴…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관리가 미흡했어요. 일단 이리 와서 앉으세요.”

“그것보단 경찰에 신고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카메라를 발견한 탈의실에서 샤워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 일단 원래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긴 했는데, 땀범벅이었던 채로 있자니 너무나도 찝찝했다. 이전에 트레이너들끼리 하는 말을 들으니 박찬수는 이번에 헬스장을 인수한 젊은 사장이자 트레이너를 겸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고… 안 됩니다, 선생님. 저희가 회원권 환불해 드릴 테니까 제발 이 일은 소문내지 말아 주십시오. 동네 헬스장이라 입소문 한번 잘못 나면 헬스장 문 닫아야 합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도 우리끼리 제대로 해결할 테니까 부탁드립니다.”

박찬수의 말에 재언이 뭐라 말하기 전에 타이밍도 좋게 이하나가 여자 탈의실에서 나왔다. 수건을 두 손에 쥔 그녀의 안색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보아하니 여자 탈의실에서도 남자 탈의실에서 나왔던 몰래카메라가 발견된 모양이다. 그에 재언은 박찬수에게 더욱 강경한 어투로 밀어붙였다.

“…언제, 어떻게 찍혔는지, 무엇에 쓰였는지도 모르는데 조용히 넘기다뇨. 일단 경찰에 신고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회원권은 환불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눈앞에 놓인 증거에 박찬수도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일자로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에게서 약하게 풍기는 증오의 기운을 느낀 재언은 사건을 조용히 묻으려고 한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의 모습에 기가 막혀서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재언이 이곳 헬스장에 왔던 적은 오늘을 제외하고 약 한 달 전뿐이다. 그때에는 엔레이드맨이 카메라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한 달 사이에 누군가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뜻이었다.

자신은 운이 좋아 찍히지 않았지만, 그동안 자신의 알몸이 촬영되는지 몰랐을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린 건 아니겠지? 내가 카메라를 설치한 것도 아니고 불법행위를 신고한다는데 저런 눈초리를 받다니. 역시 헬스장을 옮겨야겠어.’

굳게 마음먹은 재언이 핸드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누르려던 그때, 박찬수가 고개를 숙이며 간절하게 외쳤다.

“신고하겠습니다! 제가 신고할 테니 제발 지금 시간대만은 피해 주세요. 회원님들이 가장 많은 시간대고 이런 게 설치됐다는 게 알려지면 모두 충격받으실 겁니다. 수치스러워하는 분들도 계실 거고요. 일단 카메라는 모두 회수했으니……. 영업이 끝나기 전에 저랑 다른 선생님들이 경찰에 꼭 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부 회의를 거쳐서 회원님들께 공개도 할 거고요.”

재언은 일단 핸드폰 화면을 끄고 이마를 문질렀다.

“미적거리다가 범인이 증거를 훼손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지금 우리 트레이너 선생님 중에 몰카범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자 남자 탈의실에 모두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양쪽 모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데…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조목조목 따지는 재언의 말에 박찬수가 반박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결국, 그 뒤로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박찬수가 직접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다고 거듭 강조하며 몰래 경찰들을 맞은 박찬수 덕분에 큰 소란이 일어나진 않았다. 경찰이 헬스장에 온 것까지 확인한 재언은 헬스장 밖으로 나오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엔레이드맨. 안에 카메라가 몇 대 설치되어 있었어?”

“남자 탈의실에 한 대, 조각난 장난감이 여자 탈의실에서 네 대 찾았습니다.”

“그걸 이하나가 다 회수했어?”

“아니요. 두 대는 찾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다 부쉈지?”

“일단 카메라 안에 들어 있는 메모리는 부수지 않고 렌즈만 부쉈다고 합니다.”

조각난 장난감의 오른쪽 귀를 들고 전달하는 엔레이드맨의 보고에 재언은 또다시 한숨을 쉬며 역시 헬스장을 바꿔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땀을 제대로 씻어 내지 못해 옷 안쪽이 끈적이는 기분이라 매우 찝찝하고 기분 나빴다.

얼른 차민재의 집에 가서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래서 재언은 얼떨결에 차민재의 집으로 함께 들어가며 둠(doom) 안에 몸을 숨기는 엔레이드맨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차민재의 넓은 아파트에 도착한 재언은 코트를 벗고 자신을 맞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넓은 거실 테이블에 노트북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업무 관련 회의 중인 듯했다.

“너무 오래 끌어안지 마세요. 씻고 나오지도 못했거든요.”

밀어내는 재언의 손길에도 민재는 아직 땀이 덜 마른 그의 뒷머리를 쓸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청개구리도 아니고 하지 말라니까 더 하고 있다.

“그래서요?”

“아니… 운동하고 못 씻었다니까요.”

“흐음. 땀 냄새가 나서 좋은데요.”

“…변태입니까?”

재언이 차민재의 품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는 대체 어느 부분에서 흥분했는지 떨어지기는커녕 재언의 상의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빨리 씻고 싶은데 문어에 빙의한 차민재의 빨판에 벗어날 재간이 떠오르지 않았다.

엔레이드맨이 혀를 차며 사라지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재언은 현관 앞에서 큰일을 치르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그때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무언가를 느꼈다.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니 그새 또 몸집이 커진 검은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서서히 노란빛을 띠어 가고 있는 것을 보아 노란색에 초록빛이 섞인 묘한 눈동자를 가진 검은 고양이가 될 게 분명했다.

“와, 많이 컸네요?”

필사적으로 흥을 깨려는 재언의 노력에 결국 차민재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재언은 그대로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고양이의 턱을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값비싼 고급 사료를 먹어서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이제 경련하는 횟수도 줄었고 1차 예방접종까지 끝냈다고 하니 이대로 잘 자라 주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왜 못 씻었는데요?”

차민재가 바닥에 떨어진 재언의 코트를 정리하면서 물었다.

“…몰래카메라가 발견됐어요. 엔레이드맨이 발견해서 다행이지만 찝찝해서 그냥 나왔거든요.”

재언이 욕실 문을 열며 상의를 벗었다.

“거기 사장님이 신고하는 걸 꺼려서 경찰이 도착하는 걸 보고 오느라고 씻을 타이밍을 못 잡았어요……. 민재 씨?”

“네.”

차민재가 싱글벙글 웃으며 욕실 안으로 들어온 재언의 뒤쪽에서 대답했다. 혹시 화장실이 급해서 따라 들어온 건가 싶었지만, 그의 왼쪽 허벅지가 두툼해진 걸 보니 그 이유는 아닌 모양이다.

“왜 들어와요?”

차민재가 화장실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왜인 거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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