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08화 (208/324)

208화

수증기로 자욱한 욕실 안에서 재언이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옷을 챙겨 입는 재언의 발치에 새끼 고양이가 작게 울며 다가왔다.

한참 동안 욕실에서 나오지 않는 두 사람을 기다리다 지친 모양인지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재언은 그런 고양이를 쓰다듬기 위해 허리를 숙여 머리부터 꼬리까지 손바닥으로 쓸었는데, 이상하게 고양이를 만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의아한 얼굴로 살펴보니 고양이가 신재언의 손이 쓸어내리는 것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려 피한 것이다.

만져 달라고 온 게 분명한데 피하는 모양을 보니 괜히 오기가 생겼다. 그러나 차민재와 욕실에서 세 번이나 큰일을 치른 뒤라 쫓아갈 기력이 없었다.

예쁘고 고운 얼굴과는 반대로 차민재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할 때마다 부끄럽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말이다.

눈만 끔벅이면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쉬고 있는 재언의 주변을 고양이가 알짱거렸다. 이제 겨우 생후 3개월인 고양이는 크기는 작아도 제법 고양이 태가 났다.

재언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양이가 앞발로 신재언의 허벅지를 톡톡 치며 가늘게 울었다. 분명히 병원에선 수컷이라고 했는데 왜 저리 간드러진 울음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암컷인 제 어미보다 예쁜 목소리였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고양이를 내려다본 재언의 머릿속에서 저절로 어떤 대화가 이루어졌다.

‘쓰다듬어.’

‘네?’

‘쓰다듬으라고.’

‘네… 넵!’

‘필요 없어!!’

정말로 쓸데없는 상상이었다.

그런 재언의 곁으로 욕실 뒷정리를 끝내고 아까보다 더 뽀송뽀송해진 분위기의 차민재가 다가왔다.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샤워기 밑에서 그 난리를 친 바람에 반듯했던 머리가 엉망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지저분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옷이 젖는 바람에 가운을 입고 나온 그의 모습에 이러다 또다시 큰일을 치르자고 할까 봐 재언은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나이 차이가 고작 두 살밖에 안 나는데 저쪽은 왜 저렇게 젊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재언은 20대 땐 챙겨 먹지도 않았던 영양제를 요즘 꼬박꼬박 챙겨 먹기까지 했다.

“아, 맞다… 저 내일 약속 있습니다.”

운동하는 헬스장에서 몰래카메라를 발견하고 차민재의 집에선 운동 아닌 운동까지 해 힘든 하루를 보낸 탓인지 나른하고 졸렸다.

“내일 김 대리의 문병을 하러 가거든요. 곧 퇴원이라고 하던데 시간 참 빨리 가지 않습니까? 어쨌든 퇴원하기 전에 부서에서 두 명을 뽑아서 문병 가 주기로 했는데 하필 제가 뽑혔어요.”

김 대리를 싫어하는 신재언의 감정에 잔뜩 영향을 받아 온 엔레이드맨이 사심을 듬뿍 담아 손봐 준 지 벌써 3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김 대리가 없는 3개월이 참 편하고 좋았는데 다시 볼 생각을 하니 퇴사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시간의 속도를 새삼스럽게 체감하는 재언의 뺨을 민재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재언은 그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차민재는 정말 그가 말했던 것처럼 지금까지 신재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이상적인 연인이 되어 주었다. 새삼스럽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 차민재를 보고 살 떨리게 무서워했던 자신이 낯설었다.

그 당시엔 그와 가까이하고 싶지도, 연관되는 것도 꺼렸다. 만약 차민재가 신재언에게 알아갈 기회를 달라며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레드-헬-파이어가 ‘평행 세계’ 다크 카오스의 부하였다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도 이상하게 그가 거북했었는데 왜 그런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무의식에서 차민재와 멀어지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차민재는 정말 다정했고 재언이 원하는 건 다 들어주려 노력했다. 불타 죽는 것 아니냐면서 겁먹었던 과거가 무색할 정도로 다크 카오스인 신재언을 받아 주었다.

어쨌든 자신이 너무 조심스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

동네 헬스장에서 몰래카메라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정말 조용히 묻혔다. 범인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설치되었던 몰래카메라는 모두 회수했다고 들었다.

경찰에 신고한 뒤 재정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주일 정도 헬스장 문을 닫았는데, 그동안 몰래카메라를 찾아낸 게 아닐까 싶었다.

그동안 재언이 알게 된 건 헬스장이 있는 층뿐만 아니라 건물 여자 화장실에서도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러모로 아주 난리였다.

재언은 그곳 헬스장 회원권 날짜가 1개월이 넘게 남아 있었지만, 결국 가지 않고 원래 다니던 곳으로 헬스장을 옮겼다. 자신을 바라보는 관장인 박찬수 트레이너의 시선이 너무나도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피해 본 것도 없으면서 괜한 일 가지고 난리를 피웠다고 말하는 듯 재언을 쳐다봤다. 불쾌한 일을 당하게 해서 죄송하다며 고개 숙여 놓고 뒤에선 유난스럽단 듯 반응하니 진상 손님이 된 듯한 느낌에 갈 때마다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

이제 그쪽으로는 발길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재언의 머릿속에서 그 일이 잊혀 갈 때였다.

“그래서 지금 운동하고 있어요.”

회사 동료인 서 주임과 함께 김 대리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서 주임은 나이로는 재언과 동갑이지만 입사는 그녀가 2년 정도 빨랐다. 같은 부서이긴 해도 맡은 프로젝트가 달라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 대화를 나누면서 이것저것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재언의 옆 동네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내 동기였던 남성과 3년 연애 끝에 곧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다.

“요즘 5kg이나 쪘거든요. 예쁜 웨딩드레스와 제 건강을 위해 헬스장 회원권을 끊었어요.”

서 주임이 씩 웃으며 제 배를 통통 두드렸다. 재언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가 말하는 헬스장이라고 하면 재언이 아는 한 몰래카메라가 나온 그곳밖에 없었다.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보니 역시나 그곳이었다. 몰래카메라가 발견된 건 둘째치고 그쪽 직원들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영 꺼림칙했다.

“…언제까지 다니시는데요?”

“한 달 정도만 끊었어요. 결혼하면 신혼부부 대출로 논현동에 아파트를 얻어서 이사 갈 예정이거든요. 청약을 넣으면 못 해도 내년에 이사 가지 않을까 싶어요. 그동안엔 예비 신랑 집이 투룸이니까 그쪽에서 생활하려고요.”

한 달이라……. 몰래카메라도 모두 회수해 경찰이 조사하고 있다고 하고 몰카범이 간 크게 다시 카메라를 설치하러 올 확률이 적을 테니 한 달 정도는 괜찮을까 싶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재언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거기… 제가 최근에 다녔던 곳이기도 한데,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었던 적이 있어요. 바로 경찰을 불러 카메라들을 회수했다고는 한데……. 반응이 미적지근한 게 영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아요.”

재언의 말에 서 주임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아니, 요즘 공중시설 이용하는 것도 무서워 죽겠네요! 제가 다니던 학원 화장실에서도 몰카가 발견됐다던데 진짜 생리현상 해소하는 게 왜 이리도 힘든지!”

그녀는 분개하며 화를 내다가 지친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래도 이미 돈까지 다 지불했고… 거기가 집에서 가장 가까워요……. 그냥 한 달만 다니고 그만둬야겠어요. 어차피 운동복 대여할 생각도 없었고 운동 끝나고도 집에서 씻으려고 했거든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김 대리가 입원한 병실 앞까지 도착했다. 서 주임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법 친해져서 그녀의 결혼식에 가기로 약속까지 했다.

기분 좋게 웃으며 김 대리의 병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선 순간, 재언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만! 용서해 줘! 으아아악! 괴물… 괴물이 있어! 저 창문 너머에, 그, 그, 그, 그게 날 쳐다보고 있다니까!”

“진정 좀 하세요, 환자분!”

김 대리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고래고래 악을 지르고 있고 간호사가 그런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소리치고 있는 광경이었다.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헛것을 보는지 김 대리가 잔뜩 비명을 지르다가 겨우 진정했다.

두툼했던 그의 뱃살과 얼굴이 반쪽이 된 걸 보니 어지간히 고생했던 모양이다.

- 아버지, 그 어리석은 남자를 혹독히 혼내 주고 왔습니다.

검은 고양이 일로 신경 쓸 게 많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보고하는 엔레이드맨에게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람을 굴렸으면 저 꼴이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과연 저런 몰골이 된 김 대리가 과연 퇴원해서 출근이나 할 수 있을까.

죽을 만큼 짜증 나긴 한데, 저렇게까지 초췌해져서 발발 떠는 모습에 저 인간의 인생에 약간 동정심이 일었다.

김 대리는 지쳤는지 병실에 들어온 신재언과 서 주임을 보고도 힐끔 눈길만 주고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앞에 두고 얌전한 김 대리라니, 너무나도 낯설었다.

“얼른 쾌차하세요, 김 대리님. 여기 부서 사람들이 모아서 산 음료랑 과일 여기 놓고 갈게요.”

서 주임이 김 대리의 침실 옆에 있는 작은 탁자에 음료수 박스와 과일바구니를 올려 두며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3개월이라는 오랜 입원 기간에 누군가가 문병을 다녀간 흔적은 전혀 없었다.

서 주임의 말에도 김 대리의 고개는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초췌해진 탓일까 김 대리의 머리가 더욱 반짝였다.

불편하기만 한 문병이 끝나고 병원을 나온 재언은 서 주임과 헤어지자마자 엔레이드맨을 불러냈다.

“엔레이드맨.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엔레이드맨의 대답에는 머뭇거림이 전혀 없었다. 그의 설명은 3개월 전, 김 대리가 인터넷 웹사이트에 신재언에 대한 저열한 욕설을 올린 뒤 신난 얼굴로 퇴근 중이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