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09화 (209/324)

209화

“잘됐어요. 저 남자를 죽여 버려요. 사고로 위장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말씀을 못 들은 거냐. 아버지께선 저자를 죽이지 말고 손만 봐주라고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없는 소리를 내뱉는 코루루를 타박하면서도 엔레이드맨의 눈빛 또한 썩 좋진 않았다.

눈앞의 대머리는 신재언이 회사에 첫 출근을 하는 날부터 감히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놈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던 건 비단 코루루뿐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가 똑같았다.

회사 사람은 건들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착하게 기다려 온 엔레이드맨은 이번 기회에 김 대리를 최대한 악독하게 굴릴 예정이었다.

눈을 빛내는 엔레이드맨의 모습에 코루루는 슬그머니 도망치려다가 자신의 눈에 걸린 무언가에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시선은 엔레이드맨의 목에 걸린 헤드셋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버지께 선물 받은 물건이라고 얼핏 듣긴 했지만 낡은 헤드셋이 마음에 걸린 코루루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엔레이드 오빠, 저 코루루가 값비싸고 좋은 헤드셋을 선물해 드릴까요? 그건 고장 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잖아요.”

엔레이드맨은 체어맨만큼 형제들에게 애틋하진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손과 발로서 선택받은 이들에게 나름대로의 형제애는 가지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버지를 위해서 목숨을 불사를 수 있는 이들과 공유하는 전우애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가 다른 형제들보다 각성한 지 오래되었고 능력이 강하다곤 하나 그 이유가 신재언이 능력을 사용한 첫 번째 각성자여서는 아니었다.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가축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지옥같이 길고 긴 16년 동안 축적해 온 증오의 크기 때문이었다.

하루도 인간처럼 살아 보지도, 편하게 쉬었던 날이 없었다.

5분만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일을 했지만, 그나마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일했다. 제대로 먹은 것도 없어서 내내 영양실조에 시달려 무릎이 비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능력을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자식들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은 필수 관문이나 마찬가지인데, 엔레이드맨은 더 심각했었다.

그는 매일같이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며 괴질에 걸린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둠(doom) 안에 자신을 가두고 일부러 고막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엔레이드맨의 욕망은 격리.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에게서 벗어나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있고 싶다는 욕망이 능력으로 각성했다. 때문에 그의 견고한 둠(doom) 안은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둠(doom) 안에서 평온해질 수 있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는 섬의 주민들을 모두 죽였음에도 지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 아아아악! 아아악! 그만둬! 나, 날 부르지 마. 날 주혀니라고 부르지 마! 싫어, 엄마, 아빠!”

세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아들 사랑이 지극한 부모 아래에서 누구보다도 풍족하게 살아야 했을 어린아이는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되어 섬 노예가 되었다.

엄마가 어딨냐고 물어보면 뺨을 맞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어느 날엔 마을의 노인들이 그의 사지를 붙잡고 끌고 가 몹쓸 짓을 하기도 했다.

“젊은 게 허릿짓 좀 잘 해 봐!”

“주혀나. 사탕 먹고 싶지 않나?”

그가 반항하기라도 하면 섬 주민들은 손가락 크기만 한 송곳을 들어 위협했다. 그들은 그걸 항상 엔레이드맨의 옆구리 부근에 손잡이만 남을 정도로 깊이 찔렀다.

그러고도 말을 듣지 않으면 반대편 옆구리를 찔렀다. 때문에 엔레이드맨의 옆구리에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계속, 계속 저기 있어요. 제발, 다리가, 무릎이 너무 아파요. 저 사람들이 아직도 저기서, 저, 저를 부르고 있어요!”

엔레이드맨은 증세가 심해지는 날이면 눈앞의 재언도 알아보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능력자가 되어 사회에 나온 엔레이드맨을 가장 좌절하게 만든 건, 자신이 그동안 당했던 일들이 얼마나 반인륜적이고 잔인했는지를 깨달았다는 사실이었다. 환청을 들으며 부모님을 찾는 그를 보다 못한 재언이 헤드셋을 사 가지고 왔다.

“엔레이드맨!”

“…하아… 하아…….”

“환청이 들릴 때마다 노래를 듣는 거야. 괜찮아……. 이곳에서는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 여긴 너만의 세계야, 엔레이드맨. 넌 그 섬을 나왔어.”

“하아… 아빠?”

괴로움에 바닥을 뒹구는 엔레이드맨의 흐릿한 시선에 신재언이 들어왔다. 아빠라는 단어에 흠칫할만한데도 재언은 그의 귀를 덮은 손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발작이 잦아든 그에게서 재언이 한걸음 떨어졌고, 손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헤드셋이 씌워져 있었다.

그 이후로 점차 엔레이드맨은 자신을 잔혹하게 짓밟았던 날이 환청으로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오랜만에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 재언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

엔레이드맨은 그렇게 신재언을 우러러보고, 섬기고, 감히 거역할 마음도 들지 않게 만드는 괴상한 감각을 받아들였다. 그를 부모처럼 공경하고 따르겠다는 엔레이드맨의 의지였다.

그 단어를 들은 재언은 짧게 흠칫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엔레이드맨의 작은 손을 마주 잡았다.

다른 형제들도 엔레이드맨과 마찬가지로 신재언에게 향하는 감정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받아들였고, 그것이 다크 카오스와 여덟 명의 빌런이 가족처럼 지내게 된 계기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눈엣가시 같은 버러지 김 대리의 행동이 자식들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신재언은 평범한 일상을 중요하게 여겼고 회사 사람들에게는 손대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아버지가 원한다면 세상을 혼돈에 빠트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재언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번 죽어도 모자랄 김 대리 따위를 손가락이나 빨면서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건 아버지께서 주신 소중한 물건이니 버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네 선물을 못 받을 이유가 없지. 지금은 저 남자를 어떻게 요리할지부터 궁리해 보자.”

“좋아요. 아아, 어쩜 저렇게 추한 남자가 다 있담.”

퇴근하는 김 대리의 뒤를 쫓으며 엔레이드맨이 눈을 번뜩였다.

“저 남자에게 영원히 깨지 않을 악몽을 선사하자.”

위대하신 아버지를 위해.

@

김 대리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 땐 그는 이미 엔레이드맨의 둠(doom) 안이었다.

다른 동료들보다 일찍 퇴근한 그는 핸드폰 화면에 신경이 쏠려 있느라 주변이 심상치 않은 기운으로 가득한데도 전혀 알지 못했다. 회사에 있어 봤자 별 도움도 안 된다며 집으로 돌려보낸 팀장의 속내는 알지도 못한 채 김 대리는 룰루랄라 신나게 퇴근 중이었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비싸고 작은 오피스텔에서 월세살이를 하는 김 대리의 집 안은 물건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싱크대엔 말라비틀어진 설거지들로 가득했다. 오늘따라 집 안이 으스스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김 대리는 욕실에서 대충 씻자마자 물기도 제대로 안 말리고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가 심상치 않았다. 전원 버튼을 몇 번이고 누르는데도 컴퓨터가 전혀 켜지지 않았다.

“뭐야? 왜 이래? 고장난 건가?”

결국, 아무리 눌러도 변함없는 컴퓨터에 김 대리는 혀를 차고 배를 긁으며 일어났다. 그가 냉장고 쪽으로 다가가면서 컴퓨터 수리 센터를 핸드폰으로 검색하는 동안 6층인 김 대리의 오피스텔 베란다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냉장고에서 꺼낸 물병을 입에 대고 마시던 김 대리가 베란다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물병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다리가 길고 눈동자가 유독 커다랗게 생긴 흉측한 외모의 남자가 칼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댁 누구, 누, 누누누, 누구야!”

김 대리가 눈앞에 나타난 침입자에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 뛰었다. 그러자 무표정으로 서 있던 침입자가 김 대리의 움직임에 맞춰 뒤를 바짝 쫓았다. 왠지 모르게 침입자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흐어어억!”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던 김 대리는 결국 다리가 꼬여 꼴사납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어가듯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가 버튼을 눌러 봤지만,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인 22층에 멈춘 채로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쿵! 쿵! 쿵!

그러는 동안 식칼을 들고 김 대리의 뒤를 쫓던 괴인은 더욱 가까워졌고, 결국 비상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첫 계단부터 그만 발을 헛디뎌 김 대리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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