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으아아악!”
번쩍, 하고 눈을 뜬 김 대리는 지금 어두운 자신의 방 안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서 있었다. 이것이 엔레이드맨의 끝나지 않는 지옥, 영원한 악몽이었다.
“뭐, 뭐야… 개꿈이야?”
물론 김 대리는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기에 이곳이 능력자의 결계 안이라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둘러봐도 평소와 똑같은 자신의 집이었다.
“후…….”
김 대리가 책상 위에 있던 티슈를 하나 뽑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하긴 했지만, 계단에서 구른 것치곤 어디 다친 곳도 없고 멀쩡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서서 꿈이라도 꾼 듯했다.
“기가 허해져서 그런가. 별 헛꿈을 다 꾸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대충 치운 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달 음식으로 대충 저녁을 때운 뒤 잠이나 빨리 자야 할 것 같았다. 이게 다 회사에 있는 망할 자식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을 욕하면서 김 대리가 이를 갈았다. 자신이 회사 내에서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평가가 나빴던 건 아닌데 이게 다 그 망할 자식이 나타나고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신재언 그놈은 자신을 처음 봤을 때 피식, 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름대로 친절하게 굴려고 했는데, 망할 자식은 사수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대놓고 비웃기까지 했다.
물론 신재언은 피식하고 비웃은 적은 전혀 없으며 잘 부탁드린다고 웃으면서 말했을 뿐이었다. 김 대리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열등감과 망상증이 만들어 낸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그 새끼를 신경 쓰느라고 제대로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되는 일이 없었다. 그놈이 잘난 얼굴과 큰 키만 믿고 나대는 것이나 다른 여자 사원들이 그놈을 볼 때마다 잘생겼다고 꺅꺅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과 썸타는 중인 옆 부서 백 주임도 그 제비 같은 놈에게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물론 쌍방은 아니고 김 대리 혼자 썸타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인터넷에 신재언의 사진이 올라온 게시글을 본 순간, 김 대리는 역시 일어날 일이 드디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놈 정체를 까발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는 회사나 집에서 일상생활을 지내는 중에도 틈틈이 그 게시글의 글쓴이가 또다시 글을 써 주기만을 기다렸다.
게다가 오늘은 그놈의 악행이 회사 커뮤니티를 통해 회사 사람들에게도 낱낱이 까발려진 날이었다. 약간의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기분 좋게 퇴근한 김 대리는 방금 그 꿈만 아니었다면 최고의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배달 음식을 시키기 위해 핸드폰을 들어 올린 김 대리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핸드폰까지 먹통인지 켜지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절반이 넘게 남아 있었던 걸 분명히 확인했고 벌써 방전될 리 없는데 이상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핸드폰 충전기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김 대리는 눈앞에서 베란다 문이 드르륵 열리는 걸 멍하니 쳐다봤다.
“어? 어……?”
얼빠진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베란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꿈에서 봤던 그 살인마였다. 다리가 유난히 길고 비쩍 마른 체형에 눈과 입이 비정상적으로 큰, 이상한 외모의 남자 말이다.
인간이라기보단 돌연변이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데 꿈속보다 남자의 체구와 식칼이 더 커졌다. 게다가 쫓아오는 속도까지 더욱 빨라졌다.
“흐이이이익! 으아아아악! 살려 줘, 살려 줘!”
베란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침입자는 이번엔 도망가는 김 대리를 쫓으며 식칼을 휘둘렀다. 난동을 부리는 돌연변이의 식칼에 뺨이 스쳐 지나갔는데, 아프고 뜨겁다는 감각이 생생했다.
“누가, 누가 히어로 좀 불러, 줘! 제발, 살려 줘!”
오금이 저리는 느낌에 김 대리는 엘리베이터를 지나가 계단을 내려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건물에 사는 그 누구도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건물 전체가 어둠에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인기척은커녕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정적으로 가득했다.
“으아악!”
비상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던 김 대리는 발이 꼬이는 바람에 계단 아래로 고꾸라져 데굴데굴 구르다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는 식은땀 범벅인 얼굴로 자신의 방 안에서 눈을 떴다.
“헉… 헉…, …히이익!”
그는 얼굴에 상처도 없이 멀쩡하게 양복을 입은 채 방 안에 서 있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와중에 그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바지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꿈에서 또 꿈을 꿨는데 이렇게나 생생하다니 다리가 여전히 후들거리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손에 든 핸드폰의 버튼을 눌러 봤지만 꿈의 연장선이라도 되는 듯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그가 이상함을 감지한 순간 또다시 베란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으아악!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김 대리는 온몸의 구멍에서 물을 잔뜩 흘리며 소리쳤다. 방금 전의 꿈보다 더욱 커다랗고 흉측해진 살인마가 더욱 빨라진 속도로 방 안으로 들어와 그의 어깨에 식칼을 꽂았다. 그는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엔레이드맨의 둠(doom)은 상대의 공포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전의 공포를 기억할수록 끔찍하고 거대한 악몽을 만들어 냈다. 김 대리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를 공격하는 괴물은 사실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공포 영화 속 살인마였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공포심을 이끌어 내어 눈앞에 구현해 내는 것 또한 엔레이드맨의 능력이었다. 물론 그의 능력인 둠(doom)은 악몽이 계속될수록 결계 주인에게도 영향을 미쳤지만, 엔레이드맨은 신재언에게 헤드셋을 선물 받은 이후로 악몽에 먹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히어로들이나 빌런에 비해 월등히 강하다고 볼 수 있지만, 엔레이드맨의 영원한 지옥과 끝나지 않는 악몽에도 멀쩡했던 괴물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레드-헬-파이어다. 그는 둠(doom) 속에 갇혔을 때 불타오르는 어느 도시 한복판에 가만히 서서 죽은 누군가를 발치에 두고 엔레이드맨을 여유로운 표정으로 비웃었다.
“내 악몽은 내 바람이라서 말이야.”
이런 이유로 상대가 레드-헬-파이어급의 능력자가 아니라면, 엔레이드맨이 김 대리 같은 일반인을 상대하는 건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었다.
“으아악! 으아아악!”
김 대리가 비명을 지르며 계단을 내려갔고, 또다시 굴렀다. 그리고 방 안에서 눈을 떴다.
“하하…….”
실성한 듯 웃다가 웃는 김 대리의 바지춤이 축축하게 젖었다. 떨리는 고개를 내려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켜지지 않고 까만 화면 위로 살인마의 얼굴이 가득 비췄다. 역시나 이번에도 베란다 문이 열렸다.
“굴러야 해. 그놈이 오기 전에 굴러야 해……. 어서 이 꿈에서 깨어나야 해…….”
김 대리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망설임 없이 계단으로 달려갔다. 이번엔 실수가 아닌 자의로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김 대리의 옆집에 사는 30대 여성이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여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계단 쪽으로 다가갔고, 곧이어 찢어지는 비명이 이어졌다.
“꺄아아악!”
그렇게 김 대리는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채 계단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
“…….”
재언은 기가 질린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자신이 한 일을 늘어놓는 엔레이드맨을 쳐다봤다. 과연, 김 대리가 저렇게 망가진 이유를 잘 알겠다.
내심 그가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면 너무 심하게 굴린 건 아닌가 하는 동정심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래도 재언은 엔레이드맨을 타박하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재언이 병실을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김 대리는 그때의 충격과 공포가 상당했는지 이불속에 숨어서 한 가지 문장만을 반복했었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깨어나라.”
비정상적인 김 대리의 행동에 음료수 박스와 과일바구니를 정리해 놓고 나온 서 주임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을 정도였다.
“김 대리님이 갑자기 왜 저럴까요? 어휴, 저는 무슨 약이라도 하신 줄 알았다니까요.”
재언은 그가 왜 저런 꼴이 됐는지 대충 원인을 알고 있었지만,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진짜 이상한 약이라도 하신 건 아니겠죠?”
“…….”
“제가 저번에 뉴스를 봤는데, 우리나라도 이제 마약 청정구역이 아니라고 했어요. 연예인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돈을 조금만 쓰면 쉽게 만질 수 있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서 주임은 김 대리가 이상한 마약성 물질을 사용했다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곧 퇴원이겠지만 김 대리의 꼴을 보니 회사에 출근할 수 있기까지 시일이 조금 더 걸릴 듯했다.
‘흠… 계속 저러면 해고당할 가능성도 있겠는데?’
이게 다 김 대리가 영원히 회사에 나오지 않기를 물 떠 놓고 제사를 지내는 임 대리 덕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