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어휴, 저래서야 복귀하실 수 있을지…….”
“…빌런에게 당한 것일지도 몰라요.”
“김 대리님… 평소에 마음을 못되게 먹으니까 벌을 받은 거예요.”
그래도 나름 걱정되는지 서 주임이 쓰게 웃었다. 면회는커녕 김 대리가 계속 이불을 뒤집어쓰는 등 숨으려 하고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니 간호사가 환자의 안전을 위해 이만 나가는 게 좋겠다고 간곡히 부탁했을 정도였다.
병실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떨어진 축객령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오래 있을 생각도 없었던 두 사람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여겼다.
“병문안 보고서는 제가 저녁에 써서 신 주임님께 보내 놓을게요.”
부서 사람들을 대표해 업무시간에 온 데다 박 부장이 병문안을 갔다가 보고만 하고 바로 퇴근해도 된다고 했었다. 그러니 예상보다 병문안이 훨씬 빨리 끝난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게다가 회사에 돌아갈 정도의 일벌레가 아닌 두 사람은 그리 친분은 없어도 마음은 통했다.
“좋아요. 그러면서 주임님 것에 제 것까지 해서 박 부장님께 메일을 보내 놓겠습니다.”
“이제 저는 집에 들렀다가 헬스장에 가서 운동이나 해야겠어요.”
문제의 동네 헬스장에 갈 생각인 듯했다. 재언은 괜한 노파심에 같이 운동을 하러 갈까 싶었다.
하지만 회사 동료와 단둘이 같은 헬스장에 운동하러 갔다는 걸 누가 알면 또 이상한 소문이 나기 딱 좋은 일이었다. 특히 결혼을 앞둔 상대이니 더욱 조심하는 게 좋았다.
게다가 몰카 사건 이후로 재언은 그 헬스장 쪽으로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부디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며 주의를 주는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세요.”
“운동복 입고 갈 거예요.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봬요.”
서 주임이 밝게 웃으며 고개 숙인 뒤 멀어졌다. 그녀와 이렇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신재언은 그녀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삭막한 회사 안에서 괜찮은 사람 한 명 더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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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재언은 볼이 따끈따끈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동자만 굴려 살펴보니 밤톨처럼 생긴 검은색의 솜뭉치가 얼굴에 딱 달라붙어 자고 있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니 얼굴에 기대어 있던 솜뭉치가 뒹굴 굴렀다.
뭔가 했더니 새끼 고양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새끼 고양이는 자신도 고양이라는 걸 티 내려는 듯 요즘 점프 실력이 좋아져 침대 정도는 우습게 올라왔다.
그런 고양이 옆에는 차민재가 그림에 나오는 천사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재언과 민재 사이에 새끼 고양이가 파고들어 왔던 셈이다.
고양이는 재언이 몸을 일으키자 파란색 눈동자를 게슴츠레 떴다가 기지개를 켜듯 빵빵한 배를 위로 보이고 몸을 쭉 펴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 귀여워…….’
재언은 손바닥보다 조금 커진 검은색 새끼 고양이가 엄청난 미인의 옆에 달라붙어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을 턱을 괸 채 번갈아 쳐다봤다.
‘…엄청 평화롭네.’
재언은 자연스럽게 고양이의 배를 간질이다가 차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오전 다섯 시 반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이었지만 재언은 하품하며 옷장을 열어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
그런데 트레이닝복 바지 길이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길었다. 차민재의 운동복은 재언의 몸에 딱 맞았는데, 길이가 문제였다.
분명히 자신도 다리가 긴 편에 속하는데, 차민재는 그보다 더 길다는 말이었다. 애인의 완벽한 몸매와 비율에 감탄하며 재언은 허리를 숙여 바지를 돌돌 말아 접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아파트 단지 내에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새벽인데도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달리거나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탄 사람, 개를 끌고 산책을 나온 사람 등 여러 유형이 있었다. 재언은 30분 정도 간단하게 조깅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곤히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차민재가 언제 깨어나 있었는지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깼어요?”
“네. 조깅 다녀온 거예요?”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났거든요.”
재언이 머쓱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주방에서 고소한 향기가 풍겼다. 차민재가 아침으로 토스트를 굽고 있었다.
“앗, 그럼 저 씻고 나올게요.”
“네.”
식사가 완성되기 전에 서둘러 씻고 나와 식탁에 앉은 재언의 눈에 고양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새끼 고양이가 들어왔다.
“야옹.”
고양이는 주방 입구까지 짧은 다리로 어슬렁 걸어와 차민재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울었다. 그에 재언도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배고프다고 하는 거예요.”
차민재가 익숙한 손길로 습식 사료를 따뜻하게 데우고 온수를 살짝 섞어 먹기 좋게 으깨 준 뒤 고양이 전용 밥그릇 테이블에 올려 주었다.
이윽고 고양이가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먹는 모습을 재언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미 빵빵한 고양이의 배가 터질 것 같이 불러오는 모습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배가… 너무 빵빵한데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원래 그렇대요.”
내용물이 반 정도 남은 고양이 사료 캔의 실리콘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넣으며 차민재가 대답했다. 아직 한 캔을 다 먹지 못하는 작은 고양이를 위해 그는 실리콘 캔 뚜껑을 구입해 야무지게 냉장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꺼내 줄 땐 미지근하게 데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웃어요?”
“그냥이요. 민재 씨는 의외로 동물을 잘 돌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에게 나비를 맡겼으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끝낸 재언을 민재가 직접 차로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신재언의 집에선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차민재의 집에서는 한 번 환승을 해야 했다. 게다가 그 환승이 생각보다 번거롭고 귀찮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민재는 재언이 집에서 자고 갈 때마다 환승하는 버스정류장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 없다며 거절하는 재언에게 차민재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출근하기 힘들다고 안 오면 나만 손해니까요.”
아무튼 귀엽고 마음이 간질거리는 이유였다.
오늘도 무사히 출근을 마친 재언은 자리에 앉아 하품하며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탕비실로 들어가 블랙 커피믹스를 컵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붓는 걸로 하루의 업무를 시작했다.
월급 받기 직전이라 그런지 금전적으로 조금 쪼들린 탓에 고민이 많았다. 차민재의 집에서 숙식을 자주 해결한 덕분에 식비를 아끼는데도 왜 돈은 항상 부족한지 모르겠다.
탕비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꼼꼼하게 듣던 재언은 화면 속 익숙한 얼굴에 손가락질하며 작게 속삭였다.
“오, 저것 봐, 조각난 장난감. 네 아버지가 나오고 있다.”
그러자 신재언의 바지 주머니에서 눈알 하나가 튀어나왔다. 경찰 총장이 TV에 나오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정정한 모습은 예전의 반쯤 폐인이 됐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조각난 장난감은 빌런의 폭주에 경찰 몇 명이 휘말리는 사건 때문에 뉴스에 나와 기자회견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TV 화면에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재언은 기자회견이 끝나고 다음 소식으로 넘어간 뉴스에 흥미를 잃고 손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조각난 장난감을 다시 반지 케이스에 넣었다. 커피도 준비되었고 뉴스도 시청했으니 오늘도 지긋지긋한 업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요즘 업무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항 중이었다. 김 대리가 자리를 비우면서 프로젝트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각자 맡은 업무만 열심히만 해도 충분했다. 게다가 옆에서 훈수를 두거나 진상 부리는 사람이 없어지자 집중도가 올라가 실수도 확연하게 줄었다.
그리고 논점을 비껴간 헛소리나 해 대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김 대리를 위해 두세 번 이야기했던 이전 회의와는 다르게 회의 시간이 짧아지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업무 진행이 효율적으로 변했다.
“…….”
변한 분위기에 새삼 김 대리가 왜 잘리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재언은 오랜만에 여유롭게 업무를 끝냈다. 시계를 확인하니 정확히 여섯 시, 정시퇴근이 가능했다.
“오… 반년 만에 정시퇴근이네.”
임 대리도 시간을 확인하더니 손뼉을 쳤다. 그녀는 외국계 회사라 복지가 좋으니 자유로우니 하는 건 겉으로만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이라고 신랄하게 중얼거린 뒤 누가 잡을 세라 재빠르게 사무실을 나갔다.
재언 또한 아침 회의니 브리핑이니 하는 이유로 고지된 출근 시간보다 빨리 오는 것에 대한 시간은 챙겨 주지도 않으면서 야근 수당 주는 건 아까워하는 거지 같은 회사라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말에 백 번, 천 번 공감했다.
재언도 뒷정리를 끝내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문득 서 주임의 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외근도 없으니 그럴 린 없고, 연차라도 썼나?’
그러기에는 어제 헤어질 때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오늘 회사에서 보자고 인사했었다.
아무래도 오늘 출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은경’이라는 이름표가 자리에 붙어 있는 서 주임의 책상은 주인이 이것저것 두는 걸 좋아하는 모양인지 짐이 매우 많았다.
‘뭐, 못 나오는 사정이 있거나 아픈 걸지도 모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재언은 그녀의 자리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하는 정시퇴근이니 집에 가서 쌓인 먼지도 털어 내고 밥을 챙겨 먹은 뒤에 차민재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