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아, 집에 휴지가 떨어졌던데……. 요즘 민재 씨 집에서 살다시피 하느라 채워 넣을 필요성을 못 느꼈지. 집에서 좀 거리가 있지만 대형 마트에 들렀다 가야겠다.’
재언이 버스에서 내려 마트에 가려고 오른쪽으로 돌아 길을 건너려고 하는데, 상가 건물을 에워싸고 통행이 불편할 정도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주변을 기웃거리며 상황을 살피는 재언의 눈에 상가 입구에 걸린 폴리스 라인이 들어왔다. 무슨 사건이 터진 게 분명했다.
가까이 다가가다 보니 사람들이 서로 속삭이는 소리가 저절로 들렸는데, 값싼 호기심에 비하면 상당히 심각한 사건이었다.
토막 살인 사건.
재언은 고개를 들어 빌딩의 꼭대기 층을 올려다봤다. 창문에 떡하니 ‘R-헬스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몰카 사건이 일어나 재언이 발길을 끊은, 그 헬스장이었다.
들리는 소리로 파악한 피해자의 이름은 이하나. 헬스장에서 일하는 트레이너 직원이었다.
아무리 쉬쉬해도 동네에서 일어난 일에 동네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수군거리는 소리로 대충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로는 이하나의 시신은 열여덟 조각으로 토막 났으며 가장 처음 발견한 사람은 놀랍게도 재언이 아는 사람이었다.
“저짝 빌라에 사는 새댁이 최초 목격자래.”
“곧 결혼하고 이사간다던 그?”
“맞어. 그 머시기 브랜드 회사 다닌다던 새댁.”
“좋은 일 앞두고 어쩌다 그런 일을 겪었대.”
서 주임에게 전화해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오늘 회사에 결근한 것이 증인으로 조사받느라 그런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나중에 그녀가 출근했을 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재언은 사건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수군거리는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 집중했다.
어제저녁, 김 대리의 병문안을 끝내고 헬스장에 들른 서 주임은 운동복을 입고 들어왔기에 탈의실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단백질 셰이크를 마시던 관장과 실수로 부딪쳐 버렸다. 옷과 머리카락에 단백질 셰이크가 잔뜩 묻어서 어쩔 수 없이 탈의실을 이용했단다.
관장인 박찬수가 몇 번이고 거듭 사과했으니 거기다 대고 화낼 기운도 없어진 서 주임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재언의 주의 때문에 맨몸을 노출하지 않으려 옷 안에서 팔을 꾸물거려 겨우 옷을 갈아입고 그대로 샤워실에 가서 머리만 대충 물로 헹구고 나왔다. 그리고 수건을 바구니에 넣기 위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응? 이게 뭐지?”
사용한 수건을 모아 놓은 바구니 가운데가 무슨 공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볼록했다. 뭐가 잘못 들어간 것인가 싶어서 수건을 들어 올린 서 주임은 곧이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수건 밑에 이하나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아래쪽 수건들은 이미 피로 흥건했고 토막 난 머리를 덮은 수건을 치우자마자 탈의실 안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현실감 없는 끔찍한 광경에 평범한 사람인 서 주임은 그대로 기절했다고 한다.
듣고 싶은 정보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간 재언은 마트에서 사 온 휴지를 정리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민재의 집에 도착하자 그는 일하던 중이었는지 이레일과 진지하게 화상통화 중이었다.
“재언 씨.”
- 안녕하십니까, 신 선생님!
“일 방해해서 미안해요. 얼른 방으로 들어갈 테니까 계속하세요.”
재언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화면 속 이레일이 어색하게 웃었다.
- 아닙니다! 제가 눈치 없었죠. 같이 사신 지 얼마 안 되셨을 텐데…….
“아직 동거 중인 거 아닙니다.”
이레일의 엉뚱한 상상을 정정해 준 재언은 대충 회의가 끝난 듯한 분위기에 인사나 더 주고받을 생각으로 차민재의 옆에 앉았다. 이제 보니 소파 아래에 있는 공간에 배추가 들어가 곤히 자고 있었다.
- 아… 저는 회의할 때마다 신 선생님이 계셔서 동거하시는 줄 알았어요.
“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두 분이 계속할 일 하세요.”
재언은 신경 쓰지 말라는 걸 보여주듯이 마트에서 사 온 고양이 간식을 소파 아래에 늘어놓았다. 그에 이레일이 민간인인 재언을 의식하면서도 의뢰 내용을 간략하게 늘어놓았다.
- 피해자 이하나 씨의 아버님이 저희 쪽으로 의뢰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전 동부경찰서의 형사 출신으로 지금은 은퇴해 치킨집을 차렸다고 하시더군요. 전 재산을 내놓을 테니 의뢰를 받아 달라고요.
재언은 이레일이 하는 말을 들으며 그들이 맡은 의뢰가 자신이 아까 동네에서 들은 토막살인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조금 더 신경을 집중했다.
이하나는 어렸을 적 부모가 이혼하고 아버지를 따라간 편부가정에서 자랐으며 나이는 이제 막 스물세 살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경찰이 되기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해 왔고 경찰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스스로 돈을 벌겠다고 헬스장 트레이너로 일해 왔다.
‘…형사 출신 아버지에 토막 살인이라니……. 너무 익숙한데. 이번 사건은 조각난 장난감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조각난 장난감은 당시에 로스쿨에 갓 입학한 스물네 살 학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고 형사인 아버지를 닮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덕분에 초등학생 때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을 모두 때려눕히기도 하고 고등학생 땐 지하철에 떨어진 남성을 도와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반년에 한 번씩 봉사활동도 꾸준히 나가고 곤란에 빠진 친구들을 상담해 주는 무리의 중심이었다.
그녀는 훌륭한 아버지를 동경했지만, 사실 둘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이혼하고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아버지와 대립하기 시작한 건 그녀가 자신의 장래 희망을 밝히고 부터였다. 그녀는 검사가 되어 멋있게 살아가고 싶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고지식한 아버지는 그 길로 가는 것을 싫어했다.
“제 나이도 이제 스물네 살이에요! 내 인생은 내가 살고 싶다고요!”
“계집애가 무슨 검사야, 검사는! 넌 범죄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있어. 얌전히, 평범하게 살다가 시집이나 잘 가면 될 것을 왜 위험한 일을 자초하는 게냐. 난 절대 허락 못 한다!”
“계집애, 계집애 거리지 마세요!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남녀 구분해서 직장을 가진다고 그러세요! 경찰 중엔 여자 경찰 없어요? 아버지 동료 중엔 여자 형사 없냐고요!”
“이게 얻다 대고 대들어! 안 되겠다. 너 다니는 학교도 전부 입학 취소해라. 지원도 안 해 줄 거고 등록금도 주지 않을 거다. 평범한 다른 학과도 전공을 바꾸면 그때 다시 지원해 주마.”
조각난 장난감, 현정의 아버지인 한철호 경찰청장은 많은 범죄자를 잡아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한 훌륭한 대한민국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결코 딸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앞뒤가 꽉 막힌 답답한 양반이었다. 특히나 딸이 법조계에서 일하면서 범죄자들과 연루되는 걸 매우 두려워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딸에게 항상 조신하고 여자답게 행동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현정은 여자답거나 남자다운 건 사회가 구현해 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얌전한 것이 여성의 표본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에게 기대 지원받는 입장이었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니 싸우고 싶어도 아버지가 저런 식으로 나오면 항상 지곤 했다.
그날도 그녀는 아버지와 싸우고 답답하고 분한 마음에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한철호는 젊은 시절 자신이 넣었던 연쇄살인마가 탈옥했다는 보고를 아직 받지 못한 데다 그놈이 복수를 위해 자기 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늦은 저녁 독서실에 도착한 한현정은 공부하다가 옆에 있던 남자가 떨어트린 볼펜을 쳐다봤다.
남자는 아직 본인이 볼펜을 떨어트렸단 사실을 모르는 듯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가림막 사이로 얼핏 보이는 남자는 체구가 제법 크고 젊어 보였다.
“…저기요.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아… 감사합니다.”
이제 보니 목소리도 좋았다. 남자가 덧니를 드러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옅은 갈색 머리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였다. 웃는 얼굴이 호감형이고 다정해 보이는 외모였다.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한현정은 다시 공부에 전념했다. 옆에 앉은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한현정을 살피다가 본인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까지 공부하고 독서실을 나온 한현정은 야외 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차로 걸어갔다. 어두워서 그런지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가 운전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턱-.
“꺄아악!”
누군가의 손이 차 안으로 덥석 들어와 문이 닫히는 걸 방해했다. 한현정이 찢어지게 비명을 질렀지만, 갑자기 끼어든 괴한은 그녀의 얼굴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이 몽롱해지고 의식이 까마득하게 변했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굴복하는 게 창피한 일이 아니야. 정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창피한 거지.”
“같은 말 아냐?”
“하하하, 전혀 달라. 너도 언젠간 알게 될 거다.”
그렇게 말해 놓고 자신의 꿈을 반대하려 했다.
“현정아… 너무 위험한 길을 가려 하지 마라. 그냥 평범하게 살면 안 되겠냐. 이 일을 해오면서 너무 많은 범죄자를 봐 왔어. 그 새끼들은 사람이 아니야.”
“전 괜찮아요. 걱정 좀 그만하세요. 제 앞길은 제가 알아서 갈 수 있어요.”
아버지의 씁쓸한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현정아… 위험하면 어쩌려고…….”
“헉!”
그녀가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사방에 비닐이 깔린 풀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