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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14화 (214/324)

214화

한철호가 울부짖으며 딸의 토막 난 손을 끌어안고 살아 있어서 너무나도 감사하다고 한참 동안 절규를 토해 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눈물은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찡하게 만들 정도로 처절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재언은 탈수가 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울어 젖힌 그와 겨우 몇 마디 주고받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딸을 살려 주시다니…….”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을 동정심에 도와주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제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재언은 말 그대로 그녀가 있어서 떠돌아다니는 많은 정보를 알게 되어 좋다는 이야기였는데, 한철호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는 거대 빌런에 속하는 다크 카오스가 딸을 살려 주고 부하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해석했다. 특히나 흉악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엔레이드맨과 타락한 추기경이 이미 다크 카오스의 부하들이다.

한평생 정의를 위해 싸워 온 남자는 흉악한 연쇄살인범의 희생양이 된 자신의 딸을 구해 준 사람이 히어로나 경찰이 아닌 빌런이라는 사실에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삶에서 아득히 멀어져 버린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였다.

“…비각성자이지만 제 지위와 인맥을 이용하시면 다크 카오스님께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를 부디 부하로 거두어 주신다면 목숨을 걸고 따르겠습니다.”

“엥? 어… 음… 왜… 굳이요?”

“딸아이의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쾅!

큰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한철호의 기합에 신재언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부하 따위 필요 없다고 소리치는 재언의 말이 한철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부하로 받아 주지 않는다면 평생 고개를 박고 있을 것 같은 고집이 정수리에서 느껴졌다. 조각난 장난감은 아버지에게 꼭 붙들려 있는 손이 아닌 나머지 한쪽 손으로 펜을 들었다.

[아버지는 고집이 세서… 받아 주지 않으면 사고 치실지도 몰라요.]

기껏 살려 줬더니 이게 뭐람!

재언은 능력을 각성시키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생긴 부하에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저… 어르신… 알겠으니까 고개 좀 드세요.”

“감사합니다!”

기합이 대단한 사자후를 날리며 한철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중년의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모습에 재언은 또다시 끓어오르는 난감함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

.

조각난 장난감의 사정과 매우 유사해서일까, 이번 살인 사건이 유독 신경 쓰였다. 재언은 몇 번 마주친 적은 없지만, 기억 속에 있는 이하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첫 번째 마주쳤을 땐 열심히 운동하는 트레이너였고, 두 번째에는 나름대로 신재언에게 호감을 표현했던 사람이었다. 신재언이 전혀 관심을 주지 않자 금방 포기하고 돌아섰지만 말이다.

듣기론 싹싹하고 인사성도 좋아 적지 않은 남자 회원들이 고백했지만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하나가 완전 면식이 없는 모르는 사람도 아닌 데다 하필 최초 목격자가 같은 회사 동료인 서 주임이다. 거기에 조각난 장난감까지.

이대로 나 몰라라 두기는 찝찝한데, 본격적으로 나서서 해결하자니 조금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그만큼 귀찮아질 일이었다.

그런데 애인인 레드 헬 파이어가 이번 사건의 의뢰를 받은 것 같으니 어느 정도 손을 써도 모양새가 이상하진 않았다. 재언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와 통화를 시도했다.

“그렇게 됐던데 혹시 사건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아십니까?”

중년 남성의 깍듯한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간은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CCTV로 확인한 그녀의 마지막은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간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온 흔적은 없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토막 낸 시신을 여자 탈의실에 갖다 놓은 건지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일단 유력한 용의자는 총 네 명이고 회원 세 명과 건물의 경비원 한 명입니다.

진작에 물어볼 걸 그랬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철호의 대답엔 막힘이 없었다.

- 최근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던 곳입니다. 그것 때문에 피해자와 관장이 크게 다퉜다더군요. 원한이 있다면 박찬수 관장이 가장 유력하지만……. 그는 알리바이가 확실히 있습니다. 사망 추정 시각에 같은 트레이너 김영호와 휴게실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에게서 용의자들 신상이 담긴 정보를 받아 살펴봤지만, 전부 다 평범한 일반인들이었다.

차민재와 저녁을 먹으며 한철호에게 받은 정보를 대충 설명해 주었더니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언 씨는 경찰에도 연이 있었군요.”

경찰청장이 다크 카오스의 편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기에 재언은 더 추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부지런히 그의 입에 멸치볶음을 넣어 주었다.

“하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요즘 세상은 인맥빨이라고…….”

“아직 히어로 협회에 전달되지 않은 내용이니 경찰일 테고. 이쪽 관할이 아니어도 사건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고위,”

“민재 씨. 이 반찬가게 어디입니까? 장조림도 맛있네요.”

재언이 손수 먹여 주는 반찬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민재가 수줍게 웃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이쪽 사정 아시잖아요. 너무 깊게 파고들지 말고…….”

입에 있던 것을 우물거리며 차민재는 식탁 의자 위에서 흑임자 떡같이 널브러져 있는 배추를 쓰다듬었다.

“범인은 아마 박찬수일 겁니다.”

“으음… 하지만 그 사람은…….”

“뭐, 알리바이니, 뭐니 추리는 제 분야가 아니라서요.”

차민재가 말해 주길, 사건이 일어나기 전 헬스장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원인은 바로 몰래카메라였다.

이번 사건으로 재조사가 시작되면서 설치한 범인도 밝혀졌다. 헬스장에 다니는 한 회원이 범인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이전에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범인은 헬스장 회원들이 들어가 있는 오픈 채팅에서 사진을 모두 공유했으며 그 안엔 관장인 박찬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박찬수는 모든 걸 극구 부인하며 경찰 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헬스장에 한참 얼굴도장을 찍었을 무렵, 자신에게 질 나빠 보이는 무리가 다가와 친근한 척 말을 걸었던 게 떠올랐다.

“와, 형님. 근육 장난 아니네요.”

“여기 헬스장 회원 남자들만 있는 오픈 채팅방이 있는데 가입하지 않으실래요? 그냥 운동이나 식단… 그리고 유용한 정보가 있으면 서로 주고받고 그런 곳인데.”

분명히 말투는 공손한데 위협적이고 껄렁한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왠지 모르게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재언은 갑자기 말을 걸어온 이들에 운동을 멈추고 이온 음료를 마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 오래 다니진 않을 거라서요. 집에서도 멀고 원래 다녔던 헬스장에 사정이 있어서 못 나가는 바람에……. 여기 회원권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헬스장이 달라도 그냥 남자들끼리 좋은 거 공유하자는 거지.”

“괜찮습니다.”

“하…….”

남자들은 신재언의 단단한 풍채뿐만이 아니라 그의 뒤에서 풍기는 아우라에 멈칫하더니 한숨을 쉬며 뒤돌았다. 그 이후로는 재언의 뒤에서 저들끼리 들릴 듯 말 듯 주어 없는 욕을 내뱉었다.

“존나 싸가지 없네, 시팔.”

앞에서 대놓고 한 것도 아니니 나한테 한 말이냐 따져도 아니라고 잡아떼면 끝이었다. 그렇기에 뒤에서 저러는 좀생이 같은 짓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던 재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무선 이어폰을 꼈다. 저런 시비는 이제 익숙했다.

“아마 박찬수는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던 걸 도와줬던 모양입니다. 그걸 피해자가 눈치챘던 거고요. 오픈 채팅방에 제법 많은 남자 회원이 가입했는데 서로 돌려보면서 놀랍게도 한 명도 신고하지 않았다더군요.”

“흠…….”

헬스장 회원들이 재언에게 가입하길 권유했던 것과 차민재가 말한 오픈 채팅방이 동일한 곳임엔 틀림없었다.

“그러니 범인은 박찬수가 확실합니다. 하지만 박찬수는 비능력자로 순간이동도 못 하고, 능력을 사용한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밖으로 나간 피해자를 죽이고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헬스장으로 가지고 들어왔는지 밝혀내는 게 관건이겠죠.”

대화의 물꼬가 트인 것처럼 차민재가 막힘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듣기 좋은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재언은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피해자의 아버지가 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범인을 잡을 때까지 절대 죽지 않을 것이고 잡아넣은 후에 딸의 뒤를 쫓아가겠다며 난리를 치고 있다고…….”

이하나의 아버지도 경찰이라고 했지. 이하나는 경찰 공무원 준비를 위해 헬스장에서 일하며 틈틈이 공부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하고.

‘여러모로 조각난 장난감이랑 비슷한 사건이로군. 아무래도 조금 끼어들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 한 잔 마시려고 컵을 들었던 재언은 그대로 입에 있는 걸 공중에 흩뿌리며 기침을 토해 냈다. 컵 안에 둥둥 떠오른 연갈색의 눈동자, 조각난 장난감 때문이었다.

도자기 재질의 머그잔인지라 안쪽에 있는 그녀의 눈알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신재언이 왜 저런 반응인지 알아챈 차민재가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왔다. 몇백 명의 빌런을 봐 온 그였지만, 조각난 장난감의 능력은 정말 진귀한 것이었다.

지금 조각난 장난감은 이하나의 죽음과 그녀의 아버지가 당하는 슬픔, 고통에 심히 동조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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