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15화 (215/324)

215화

“안 돼.”

재언이 고개를 흔들며 엄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이하나의 기억을 건드는 건 허락하지 않겠어.”

그러자 마치 재언의 말에 불만이라도 표하듯 조각난 장난감이 식탁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재언은 잔소리를 하려다가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민재의 시선을 느끼고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평행 세계의 기억 덕분에 그가 많이 봐주고 있는 상황이라 해도 어쨌든 레드-헬-파이어는 히어로다. 조각난 장난감이 히어로의 앞에 당당히 나타난 것 자체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게 조각난 장난감입니까?”

“네. 평소엔 말도 잘 듣고 나서는 걸 싫어하더니 오늘은 왜 이런지…….”

재언은 일단 그릇 사이를 굴러다니는 눈알을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렸다.

만약 조각난 장난감이 능력을 사용해 기억을 읽는다면 이하나가 죽는 순간의 감각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참혹했던 옛 기억을 굳이 떠오르게 하고 싶지 않았던 재언은 단호했다.

“어허!”

재언의 단호한 반대에 조각난 장난감이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졸지에 신재언의 꼰대 같은 면모를 처음 보게 된 차민재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이렇게 보면 어엿하게 아버지와 자식의 대화 같기도 했다.

조각난 장난감은 풀이 죽긴 했지만, 재언의 말에 순순히 물러서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재언은 이상함을 느끼고 턱을 쓰다듬었다.

차민재에게 말한 대로 조용하고 나서길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조각난 장난감은 재언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고집을 피운 적이 없었다. 자식들이 사고 친 횟수를 순위로 매긴다면 단연코 그녀가 꼴찌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는 행동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재언이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각난 장난감, 혹시 이하나와 아는 사이였어?”

잠시 머뭇거리던 조각난 장난감이 손목을 가져와 펜을 들었다.

[네. 그냥 얼굴만 알던 사이였어요. 아버지 취임식 때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땐 중학생이었거든요. 몇 마디 주고받고 나중에 연락도 하고… 자연스럽게 끊기긴 했지만.]

재언은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헬스장에서 이하나를 만났어도 아무 말 없기에 아는 사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조각난 장난감도 이하나에게 이런 모습으로 아는 척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 못 본 척 넘어가려다가 그녀가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 쓰이고 분해서 이러는 게 분명했다.

모르는 사이라고 했으면 그냥 히어로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만히 있으라고 말할 텐데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을 알게 되어 버렸으니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각난 장난감에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재언은 문득 눈앞에 있는 차민재의 시선에 눈길이 갔다.

그는 조각난 장난감의 손목이 혼자 움직이며 낙서를 끄적이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흥미로운 시선에 약간의 탐구욕이 섞여 있는 것을 느낀 재언은 모골이 송연해져 헛기침을 하며 그의 눈길을 돌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지…….”

빌런 ‘다크 카오스’의 물음에 히어로 ‘레드 헬 파이어’가 대답했다.

“제가 뭘 쳐다봤다고 그러세요.”

“조각난 장난감을 뚫어지게 쳐다봤잖아요.”

차민재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히어로들 중 가장 베일에 싸여 있는 사람이 언럭키 네임리스라면 빌런 중에는 조각난 장난감입니다. 직접 본 사람도 극히 드물고 다크 카오스가 늘 끼고 다니는 조각난 장난감은 히어로들 사이에선 도시 전설 같은 존재거든요. 확실히 흥미롭긴 하네요.”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재언은 왠지 그가 조각난 장난감에 대해 그 꼴로 대체 어떻게 살아서 능력을 각성한 건지 궁금해한다고 느껴졌다.

재빠르게 조각난 장난감을 돌려보낸 재언은 혹시라도 그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할까 봐 끊임없이 입 안으로 반찬을 밀어 넣었다.

@

동네에 토막살인사건이라는 엄청난 일이 터지고 회사에서도 아주 골치 아픈 일이 터졌다.

일단 김 대리의 복귀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할 때는 게으름을 부리며 열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 이상하게 출근에는 근성을 보였다.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사원들은 형식상 걱정하는 말을 김 대리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몸은 괜찮은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다독이는 사람들의 눈길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분명히 업무를 하라고 뽑았을 텐데 왜 없는 게 더 편했던 건지 모르겠다는 의미를 가득 담은 눈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놈이 직원이라고 자신과 같은 돈을 받아 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재언은 김 대리에게 형식상이라도 걱정하는 말을 건넬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 김 대리가 입원한 이유는 자신의 명령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신재언의 사진이 있는 게시글을 퍼다 나르며 악플을 달고 유언비어까지 만들었다. 그 때문에 재언이 피해를 입었으니 자업자득이긴 했다.

엔레이드맨이 혹독하게 혼을 내놓았으니 그 일은 이제 묻어 두는 게 옳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재언은 김 대리에게 다가갔다.

“김 대리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 그래…….”

평소에 눈엣가시처럼 재언을 대하던 김 대리가 넋이 나간 얼굴로 인사를 받아 주더니 터덜터덜 걸어갔다. 멍하니 자리에 앉은 김 대리는 아직도 영혼이 병원에 있는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김 대리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쳐다보는 재언의 옆으로 임 대리가 다가와 혀를 끌끌 찼다.

“아예 퇴원하지 말고 병원에 짱박혀 있지 그랬어……. 3개월 꽉꽉 채웠으면 회사와도 영원히 안녕이었을 텐데. 딱 일주일 남기고 후다닥 돌아온 것 봐.”

“임 대리님.”

재언이 잔뜩 못마땅한 표정의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작게 불렀다. 물론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김 대리의 진상을 3년 받아온 자신도 이렇게나 이가 갈리는데 5년이 넘게 시달려 온 임 대리는 오죽할까 싶었다.

하지만 임 대리는 이번에 승진이 걸려 있기에 당분간 몸을 사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유례없는 고속승진이라 불릴 만큼 능력이 출중하긴 했지만 그만큼 구설수가 많았다.

그중에는 임 대리와 박 부장이 사내 연애 중이라는 헛소문도 있었다. 소문만 들으면 임 대리는 부하직원인 신재언과도 연애하고 상사인 박 부장과도 연애를 하는 아주 바쁜 사람이었다.

아무튼 그런 시기에 괜히 누군가의 험담을 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면 안 되기에 걱정스러웠다.

“휴우… 저 김 대리를 합격시킨 인사팀 놈도 시말서 쓰고 잘라 버려야 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마디 남긴 임 대리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그 후로도 임 대리의 짜증은 날로 높아졌다. 김 대리가 다시 출근한 것도 스트레스인데 본사에서 결재해 줘야 하는 사안을 자꾸 뒤로 미루는 탓이었다. 마감 시간이 늦으면 덤터기를 쓰는 건 결국 자신이었으니까 말이다.

“외국 놈들은 왜 이렇게 느긋한 거야!”

소리 지르며 폭발한 그녀를 신재언과 다른 팀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임 대리님. 점심시간이니까 밥부터 먹으러 가죠.”

“저번에 철판볶음밥 맛있었던 곳으로 갑시다.”

“밥 다 먹고 올 때까지 답장 안 하기만 해 봐. 내가 프랑스로 찾아갈 테니까!”

씩씩거리며 일어난 임 대리의 뒤를 따라가면서 재언은 점심시간을 누구보다도 잘 지키는 김 대리가 아직도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묘하게 불길한 기분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해질 땐 항상 무슨 일이 터졌다.

불길한 기분과는 달리 철판볶음밥은 맛있었고 임 대리는 편의점에서 달달한 과자를 사 온 덕분인지 기분이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먼저 올라가세요. 저 담배 피우고 갈게요.”

1층의 흡연 구역을 가리키며 나머지 팀원들과 임 대리를 먼저 올려 보낸 재언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핸드폰을 꺼내 차민재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데, 핸드폰 액정 위로 무언가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바로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었다.

사실 언제 나타나든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 때문에 깜짝 놀란 적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지도 모르는 곳에서 나타난 적은 없었다.

‘사고 한번 친 적 없던 효녀가 왜 갑자기 사고 치려고 준비 중인지 모르겠네?!’

“읍! 콜록! 콜록!”

깜짝 놀란 재언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한 번에 쭉 빨아들이고 말았다. 목구멍이 탈 것 같은 매운 기운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한참 동안 기침을 해 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만 같아 재언은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잡고 흡연실을 빠져나왔다.

회의실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가니 엔레이드맨이 눈치 빠르게 결계를 만들어 누구도 침입할 수 없게 막았다.

“아, 아직도 목이 따갑네……. 무슨 일이야?”

조각난 장난감을 대신해 엔레이드맨이 대답했다.

“아버지. 조각난 장난감이 어제 사건을 조사하다가 왼쪽 손을 다쳤습니다. 건물 사이에 걸려 있던 낚싯줄에 베인 것 같은데 그 장소가 심상치 않아…….”

“뭐? 다쳤어? 어디 봐봐.”

재언이 깜짝 놀란 얼굴로 조각난 장난감의 왼쪽 손을 소환해 살폈다. 손등에 기다란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혈관이 끊겨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그만큼 상처가 낫는 게 일반인보다 더뎠다.

걱정하는 얼굴로 이마를 쓰다듬는 재언의 귀로 경악에 찬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엔레이드맨은 모습을 감췄지만, 재언이 손에 든 조각난 장난감의 손목은 그대로였다.

“소, 소, 손목……!!! 히익, 히이익!!”

“…김 대리님?”

“살인마다!!! 살인마야, 손목을 들고 다니는 살인마다!!”

뒤를 돌아보니 김 대리가 비명을 지르며 회의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신재언은 황당하고 당황스러워 엔레이드맨에게 물었다.

“엔레이드맨, 결계를 물렀어?”

- …아닙니다… 제 둠(Doom)은 아직 건재합니다.

“그럼 저놈이 어떻게 여기에 멋대로 들어와서, 또 멋대로 나가?”

신재언은 골치 아프단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조각난 장난감의 손목은 딱 봐도 토막 난 시체였고, 그걸 정면으로 본 김 대리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으니, 이거 단단히 골치 아프게 됐다.

눈을 감은 재언에게 엔레이드맨이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 저 남자, 능력을 각성한 것 같습니다.

역시 김 대리를 죽일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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