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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16화 (216/324)

216화

김 대리 본인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가 능력을 각성한 건 확실했다. 그는 엔레이드맨의 둠(doom) 속에서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겼고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인생에서 다시없을 커다란 충격에 김 대리는 제발 이 악몽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강한 욕망이 되어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각성한 그의 능력은 ‘무효화’, 전 세계에서 능력자 수가 가장 적은 희귀한 능력이었다. 상대방의 능력이 무엇이든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무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자신보다 강한 능력자에겐 무용지물인 능력이었다.

대한민국에 있는 ‘무효화’ 능력을 가진 능력자는 C급, A급, S급 총 세 명이었다. 그중에서도 S급인 김윤경 대위 덕분에 다른 나라들과 달리 대한민국 정부는 히어로 협회에 먹히지 않고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군인 신분인 김윤경 대위가 히어로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S 등급을 받은 건 아니고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가졌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군인이 되기 전, 여자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활동했지만, 그리 성공하진 못했다. 이후 긴 무명시절 때 추었던 무대 동영상이 조명을 받게 되어 재생 횟수가 1억을 돌파할 만큼 인기가 많아졌다.

하지만 발랄했던 그때와 달리 현재 그녀는 매우 냉담하고 잔혹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아이돌이었던 그녀가 자원입대하여 군인이 된 이유는 죽은 남자친구의 영향이었다. 군인이었던 그녀의 남자친구가 빌런들의 습격에서 그녀를 살리려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무효화 계열인 그녀의 능력은 10m 이내의 능력자들이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절대 필드(Absolute invalidity), 일명 AI 필드를 펼칠 수 있었다.

A급 이하의 능력자들은 그 안에선 능력 사용이 불가능해지며 S급조차도 단숨에 C급 정도의 능력밖에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어찌 보면 엔레이드맨이 사용하는 결계와 결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으로도 엔레이드맨의 둠(doom)을 파훼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엔레이드맨의 능력은 일반적인 S급 능력자들보다도 뛰어난 편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엔레이드맨의 둠(doom)을 방금 전 김 대리가 손쉽게 드나들었다. 그것만 보면 대한민국 최강의 무효화 능력자 김윤경 대위를 뛰어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김 대리의 능력은 발동 조건이 조금 황당했다.

“그러니까… 엔레이드맨… 네 능력만 무효화를 시킨단 거지?”

- 네.

그렇다. 극한의 공포를 맛본 김 대리가 얻은 능력은 오로지 엔레이드맨의 둠(doom) 능력만 무효화시킬 수 있단 것이었다. 하필 얻어도 그런 골치 아프고 쓸모없는 능력을 가졌는지.

재언은 고작 김 대리 같은 놈 때문에 엔레이드맨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리가 띵하게 아파 오는 걸 느꼈다.

- 제 능력에서 어지간히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김 대리 주제에 무슨 한 우물만 판답시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필 엔레이드맨 능력에만 발동하는 건가 싶었다.

다른 자식들을 시켜 김 대리를 없애 엔레이드맨이 위험에 빠지는 걸 막아야 할지, 아니면 본인이 무슨 능력을 각성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던데 저대로 조용히 묻어 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 죄송합니다, 아버지…….

골치 아파 보이는 재언의 모습에 엔레이드맨이 잔뜩 풀이 죽어 거듭 사과했다. 그에 손을 들어 그의 사과를 막은 재언이 이마를 문질렀다.

이건 엔레이드맨이 사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김 대리를 죽이지만 말고 호되게 혼내 주라고 명령한 건 자신이었다. 이건 누구라도 예상하기 힘든 각성이었다.

일단 엔레이드맨과 조각난 장난감을 체어맨의 문을 통해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보낸 재언은 회의실을 나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 대리가 이미 한바탕 소란을 떨었는지 사람들이 1층 로비에 모여 있었다. 군중 속에 파묻혀 있던 임 대리가 다가오는 재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달려왔다.

“신 주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제가 묻고 싶은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김 대리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튀어 나갔어요. 재언 씨가 살인범이고 토막 난 시체를 들고 있는 걸 똑똑히 봤다고…….”

“…….”

임 대리가 뒷말을 흐리며 미심쩍은 시선으로 신재언을 위에서 아래로 꼼꼼히 훑었다. 재언은 가방도 없는 가벼운 차림에 핸드폰과 지갑만 정장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상태였다.

어딜 봐도 토막 난 시체를 들고 다닐 사이코패스 살인범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김 대리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 봐요. 아무리 그래도 회사에서 저리 소란스럽게 고래고래 떠들다니……. 지금 보안요원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잖아요.”

임 대리가 팔짱을 끼고 신랄하게 김 대리 욕을 하던 중, 김 대리가 경찰 몇 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경찰들은 김 대리와 신재언을 번갈아 보고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일단 신고가 들어와서 조사는 하는데…….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경찰들의 쩔쩔매는 표정을 보며 재언은 기분이 아찔해졌다. 온갖 소란을 다 떨어 댄 건 김 대리인데, 주목은 자신이 받게 되다니. 서서 꿈을 꾸는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 사건의 결론부터 밝히자면, 재언은 혐의를 바로 벗지 못했다.

회사 건물의 CCTV를 돌려본 결과 화면 속 신재언은 토막 난 시체를 들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시체가 들어갈 만한 주머니조차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온갖 능력자들이 판치는 이 세계에서 그것은 완벽하게 증명할 수 없었다.

다른 공간에 시체를 숨길 수 있는 결계 능력이나 이 능력자들도 있고 시체를 조종하는 네크로맨서 능력자들도 존재했다. 그런 빌런들의 힘을 빌리거나 돈을 주고 고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경찰들은 판단했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일어난 헬스장에 재언이 회원으로 다닌 적 있으며 몰래카메라를 발견해 신고했을 당시 증인으로 조사에 응했던 게 걸림돌이 되었다. 사건 당시 재언은 혼자 마트에 갔고, 하필 재언의 동선에 있던 거리나 마트 CCTV가 고장 났거나 지워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재언을 환장하게 만들었지만, 최초 목격자였던 서 주임의 이상한 증언이 재언이 용의자로 확정되는 데 한몫했다. 서 주임은 토막 난 시신을 본 충격에 정신이 오락가락한지 재언이 이해하지 못할 증언을 마구 쏟아 냈다.

“신 주임님이 이곳 헬스장에 대해 악평을 하셨어요. 아마 무슨 트러블이 있었던 모양인지 제게 험담을 마구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신 주임님과 함께 있다가 헬스장에 온 건데 그런 일이 터진 걸 보면…….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정말 그럴 분이 아니었는데.”

헬스장에 악감정을 가진 게 아니라 그녀를 생각해서 몰래카메라에 조심하라고 충고를 준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쏙 빠지고 이유 없이 헬스장 험담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재언은 다섯 명의 용의자 중에서 살인 동기가 분명하고 알리바이가 없는 등,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가장 유력한 범인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조사를 위해 경찰서에 들른 재언은 상황이 점점 더 악화하는 추세로 나아가는 걸 느끼며 출근길에 나섰다.

당연하게도 출근한 재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김 대리가 이상한 소문을 뿌리고 다니는 데다가 경찰 조사 때문에 여러 번 조퇴하고 나니 살인사건으로 조사받는단 게 소문이 퍼져 뒤에서 수군거리기 일쑤였다.

그나마 같은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팀원들, 특히 임 대리가 자신들은 믿지 않는다며 응원해 주었으나 퍼지는 소문까지는 막지 못했다. 이러다 회사에서 해고되진 않을까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서 주임에게 연락해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증인 보호법인지 뭔지에 의해 재언은 서 주임과 연락할 수도, 따로 만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대체 왜 그런 정신 나간 증언을 했는지 모르겠다.

자식들을 풀어서 범인을 그냥 잡아 버릴까 고민되기도 했지만, 살인범 누명을 벗자마자 다크 카오스라는 지명수배자로 의심받을지도 모를 게 분명했다.

쉽게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 결국 경찰청장에게 도움을 요청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재언은 바람이라도 쐴 겸 집 밖으로 나갔다.

‘민재 씨한테 도와 달라고 해 봤자 살인범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도와줄 방법은 제한적이겠지.’

재언이 담배를 입에 물고 건물 밖으로 나가자 빌라 주차장 입구에 못 보던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게 보였다. 검은색의 국산차는 재언이 이전부터 눈여겨봤던 비싼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주차장 입구를 이렇게 막아 놓으면 어떻게 하려고.’

전화해서 차를 빼 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기웃거리고 있자 차 안에 있었는지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다부진 어깨에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었다.

눈매가 사납고 무서운 인상을 가진 남성은 키가 작고 덩치가 좋았다. 분위기만으로는 조폭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

남자는 멀뚱히 서 있는 재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뭉툭한 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갈랐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방어할 틈도 없이 당했다. 재언이 입 안에 고인 침을 퉤 뱉으니 피와 함께 맞은 쪽 어금니가 바닥에 굴렀다.

한참 동안 신재언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때리던 남자는 상대가 숨을 쉬지 않자 헐떡이며 주먹을 멈췄다.

남자가 신재언의 멱살을 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밤, 갑작스러운 폭력에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축 늘어진 그를 내려다보던 중년 남성은 자신의 뒤쪽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으음…….”

분명히 얼굴에 피떡이 되어 콧대고 눈두덩이고 빨갛게 칠해져 있던 신재언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어디 맞은 곳 없이 아주 멀쩡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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