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자신의 발치에 널브러진 신재언과 뒤에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재언을 번갈아 본 남자의 눈이 표범처럼 매서워졌다.
‘어우… 저게 환영인 걸 알지만, 내 얼굴이 다 아픈 느낌이네.’
재언은 자신의 얼굴이 진짜로 멀쩡한지 확인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더듬거렸다. 다행히 치아도 부러진 곳 없이 단단했고 얼굴이 붓거나 하진 않았다.
아무리 환영이라 해도 자신이 흠씬 두들겨 맞는 광경에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사람을 때려죽인다는 게 저런 거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은 채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남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일반인이었다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며 당황하거나 누구냐고 물어봤을 텐데 남자는 이런 돌발상황에 익숙한 것처럼 냉정했다.
그런 남자에게 재언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때려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아직 제가 범인이라고 확정된 것도 아니고……. 나중에 가서 범인이 아니었다고 하면, 아, 죄송하다고 끝낼 생각이신지…….”
말을 하는 재언의 귓가에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 둥둥 떠다녔다. 사실 남성은 조각난 장난감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한철호의 부하이자 이번 토막사건 피해자인 이하나의 부친이었으니까 말이다.
레드 헬 파이어 사무실까지 찾아와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 달라고 거액의 의뢰비까지 선뜻 지불한 걸 보면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고한 사람을 때려죽인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남자는 자신이 죽인 신재언의 환영을 등지고 매무새를 정리하며 이쪽으로 달려올 낌새를 보였다. 그에 재언도 저절로 몸을 잔뜩 긴장했다.
일반적으로 형사들은 비각성자가 많지만 요즘 히어로 협회에서 ‘비능력자가 능력자를 잡을 수 있는 아이템’들을 몇 가지 발명한 덕분에 강력계 형사들이 빌런이 연관된 범죄 조직도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이하나의 아버지인 이두철 또한 강력계 형사였고 은퇴한 지금까지도 그런 아이템들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혈질에 화끈한 성격으로 유명한 그는 형사 시절 맡았던 구역의 범죄 조직들 사이에선 아주 무서운 호랑이 형사로 이름 날렸다고 들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네 녀석… 능력자였군.”
“그건 아니고요. 절 너무 사랑하는 애인이 연약한 저를 걱정해서 이것저것 많이 준 덕분이거든요.”
재언이 아이템 몇 가지를 남자의 눈에 잘 보이게 손바닥에 펼쳤다.
재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는 구슬과 반지를 본 이두철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험악한 인상이 형사보다는 범죄자에 더 가까워졌다.
재언이 가지고 있던 신념대로라면 불합리한 일을 당한 피해자가 복수하는 건 온전히 그의 뜻이며 누군가가 나서서 가해자를 변론하고 대신 죄를 사해 주는 짓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대해선 사람마다 의견이 갈린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생각이 확고했다.
하지만 이두철이 자신에게 저지른 일은 피해자로서의 복수 행위가 아니라 엄연히 화풀이고 살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이 살인마라는 확실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는데 용의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때려죽일 생각을 한다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차민재가 준 호신용 아이템 중 하나가 무참히 깨지긴 했지만, 공짜로 받은 거니 그리 아까운 건 아니었다. 아이템 가격이 외제 차 한 대는 손쉽게 살 수 있는 값비싼 물건이지만 지금 같은 때에 자식들을 불러내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으니 유용하게 사용한 셈이다.
그저, 저 경찰 같지도 않은 남자가 괘씸했다. 힘이 없는 소시민은 그대로 얼굴이 뭉개져 맞아 죽었어야 했나.
자신보다 더 엄격한 정의로 행동해야 할 사람이 자기감정에 앞서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일반인을 찾아가 죽을 정도로 때리는 게 옳은 일일까.
이하나가 이전에 재언에게 관심을 표했을 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한 적이 있었다. 정의롭고 멋진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다 거짓말이었다.
“용의자로 추정된 사람이 저 말고 4명이나 더 있는데 그들도 다 때려죽이실 겁니까? 만약 그들을 다 죽였는데 진범이 따로 있다면? 그땐 살인죄로 진범과 감방 동기가 될 텐데. 그땐 범인하고 어깨동무라도 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추억 회상이나 하시게요?”
재언의 말에 이두철이 피식 웃었다.
“이 새끼 봐라. 말장난 한 번 잘하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남자의 당당하고 걸걸한 말투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재언이었다.
사실 재언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남자를 앞에 두고 주절주절 떠들려니 무섭기도 해서 속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기도 했다. 게다가 남자의 태도가 너무나도 당당하고 일말의 죄의식도 없어 보여서 더욱 기가 막혔다.
재언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다가왔다.
가지고 있던 아이템 중 하나를 사용한 탓에 자동으로 위험 신호가 경찰과 히어로 협회에 감지되어 출동한 듯했다.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재언은 자식들이 나서는 걸 막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두철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재언을 노려본 뒤 경찰차가 오기 전에 빌라 주차장 입구를 막은 차를 타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여기서 경찰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억울하게 죽은 딸의 복수가 무용지물이 될 테니 성급하게 도망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탄 차가 멀어지는 걸 재언이 그저 보고만 있자 엔레이드맨의 분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를 때려죽이려고 했던 우매한 놈을 보면서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시비 걸었던 놈들을 떠올렸다.
- 아버지. 저 남자를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십니까?
“음… 일단 그냥 둬 봐.”
- 조각난 장난감을 시켜 뒤를 쫓도록 만들겠습니다.
“됐어. 저 남자가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나오는 이유부터 알아볼 생각이야.”
재언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젓자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던 엔레이드맨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저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어떤 명령도 듣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런 식으로 아버지께서 모욕당하시고도 모욕한 자를 내버려 두라고 하실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재언의 시선이 어느덧 모습을 드러낸 엔레이드맨에게 향했다. 재언의 눈에 엔레이드맨은 영원히 처음 만났던 그날, 열여섯 살의 모습을 하고 부루퉁한 표정을 한 소년이었다.
재언은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엔레이드맨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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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두철이가 결국…….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한철호가 대답을 잠시 머뭇거렸다. 경찰 내부 기밀 사항을 말한단 사실에 머뭇거린다기보단 다크 카오스의 심기를 어지럽게 할까 봐 걱정하는 느낌이 강했다.
- 이번 토막 사건의 증인이 한 명 더 나왔습니다. 그는 정확히 다크 카오스님께서 범인이라고 지목했고요. 곧 경찰 조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아마 그 사실을 먼저 안 이두철이 다크 카오스님께 그런 실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신재언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제, 제, 제가 범인이라고요!? 증인이라니, 대체 누구입니까?!”
여태껏 많은 범죄를 봐 왔고 범인들을 벌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쓸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증인이 새로 나왔는데 갑자기 범인으로 몰리다니. 이렇게 얼렁뚱땅 범인을 지목하는 수사력에 재언은 한번 놀라고 자신을 범인이라고 증언한 놈이 트레이너이자 관장인 박찬수라는 데 두 번 놀랐다.
이하나의 사망 추정 시간에 같은 트레이너와 함께 직원실에 있었던 그는 처음부터 용의 선상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
결국, 재언은 경찰에 송치되기 전,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차민재에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작정하고 사방에서 몰아치는 상황에서 빌런들을 내세워 일을 처리할 수도 없었고 히어로의 도움이 절실했다.
재언의 연락을 받자마자 집으로 찾아온 차민재는 이번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는 동안 재언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을 줄은 몰랐단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그의 뺨에 고양이 발톱 자국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예쁜 얼굴에 웬 흉터예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아니, 민재 씨는 얼굴 빼곤 볼 게 없는데.”
그에 민재가 재언을 흰 눈으로 흘기며 자리에 앉았다.
“고양이 목욕시키다가 긁혔습니다.”
곧바로 어이없다는 표정이 된 차민재가 덧붙여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잠시 눈을 뗐다고 사건에 휘말려서 누명을 쓴 겁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부에 등록된 신재언의 능력 사항에는 아직 ‘럭키 가이’가 떡하니 기록되어 있으며, 연금도 꼬박꼬박 나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