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19화 (219/324)

219화

- 다크 카오스는 모순적인 빌런입니다.

머리가 하얗게 샌 50세의 나이 든 남성은 대한민국에서 제법 유명한 프로파일러였다.

범죄자가 내뱉은 단 세 마디만으로 그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범죄 유형을 분석해 가며 모순점을 지적해 결국 심리적으로 패배한 범인에게 자백을 받아 내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대학교에서 범죄 심리학 교수로 미래의 후배들을 육성하는 중이었는데, 이번에 방영하는 다큐멘터리에 등장해 더욱더 얼굴을 알렸다.

그날의 다큐멘터리 주제는 거대 빌런들에 대한 것이었고 빌런들의 왕으로서 위명을 떨치는 다크 카오스의 이야기도 당연히 빠지지 않았다.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세계 최악의 범죄자. 무수히 많은 빌런을 거느린 다크 카오스는 무슨 까닭인지 근래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상태였다. 히어로 협회는 그가 힘을 비축해 세상을 혼돈에 빠트릴 것이라며 시민들에게 겁을 주었다.

하지만 프로파일러의 주장은 히어로 협회와 의견이 달랐다.

- 저는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다크 카오스가 나온 짧은 영상을 몇십 번이고 돌려봤습니다. CCTV에 나온 그의 행동이나 히어로들에게 한 말들을요. 그는 대한민국에서만 두 번이나 나타나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를 녹화한 영상에서 음성만 따로 추출해 몇백 번 들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 어떤 부분이죠?

함께 출연한 패널이 흥미로운 얼굴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빌런들이나 범죄자들은 하나의, 아니면 다수의 목적을 가지고 범죄 행위를 합니다. 금전일 수도 있고 유흥이나 재미를 위해서,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 등이 있습니다. 가장 흔한 목적은 원한에 의한 것이죠. 하지만 다크 카오스는 도통 모르겠어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답을 구하려는 듯 다른 패널들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걸 다른 이들이 알 리 없었다.

- 다크 카오스는 과시하려는 것도, 재미를 느끼지도, 그도 아니면 돈이 목적인 것도 아닙니다. 빌런으로서의 명예를 위해서라기엔 오히려 그는 주목받는 걸 싫어하는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있던 재언이 그의 말을 경청하다가 감탄 섞인 신음을 흘렸다.

- 마치 평범한 사람처럼요.

- 다크 카오스가 평범한 사람이라니…….

패널들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리자 프로파일러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 조용히 살고 싶다면서 빌런들을 거두고 다니는 건 정말 모순적인 일이죠. 아니면 제가 일을 은퇴했더니 감이 떨어지나 봅니다. 혹시 압니까. 세상을 뒤집어엎으려고 했다가 히어로들에게 막혀 뜻대로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프로파일러의 말에 한 패널이 자랑스러운 듯 소리쳤다.

- 맞아요. 우리에겐 그 무시무시한 레드 헬 파이어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잖아요!

재언이 리모컨을 들어 앞쪽 내용은 정확했지만, 뒤쪽 내용은 완전히 틀린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는 TV 화면을 꺼 버렸다. 왜냐면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레드 헬 파이어가 상의를 탈의하고 침대에 누워 다크 카오스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렇게나 주목하고 있는 다크 카오스, 신재언은 다큐멘터리고 뭐고 자신의 눈앞에 닥친 현실에 끙끙 앓는 중이었다.

“평범하게 살기 참 힘드네요. 요즘에도 작정하고 누명을 씌울 수 있구나… 놀랍기도 하고.”

“재언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기 전에 검찰은 이미 재언 씨의 인적사항을 모두 조사한 뒤였을 겁니다.”

신재언이 아무리 무시무시한 거대 빌런들을 자식으로 둔 다크 카오스에 애인이 세계 최강 히어로라 하더라도 세간에 알려진 그의 인적사항은 평범한 회사원인 하피 혼혈일 뿐이었다.

가구 수도 별로 없는 산골에 사는 부모를 두어 별다른 인맥도 없었다. 하피 종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는 차별이 만연했다.

그런 하피 종족의 피가 절반이나 흐르는 신재언은 그들에게 누명을 씌우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30년 전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을 누명 씌워서 살인범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까. 저는 대한민국 검찰이 그렇게까지 썩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애초에 법조계는 머리가 좋아야 들어갈 수 있는 곳 아닙니까? 판사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재언 씨. 없는 말도 있는 것처럼 지어내고 증거를 없애거나 만들어 내는 건 그들에게 일도 아니에요.”

“…….”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이들은 본인들의 의지로 자수했을까요?”

얼마 전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가 교도소에서 사망한 남자의 사연이 뉴스로 공개되었다. 남자는 연쇄살인마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종신형을 받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마흔한 살에 옥살이를 시작해 20년이 지난 2008년에 폐렴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10년이 더 지난 몇 해 전, 유족들이 30년간 고생한 끝에 남자의 누명을 벗겨 내는 데 성공했다.

남자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곳의 옆 골목길을 지나갔다는 이유로 연쇄살인마로 몰렸다. 그때 당시 남자의 진술은 모두 담당이었던 강력계 형사와 검사가 짜고 친 것으로 자수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과 고문이 이어진 뒤 받아 낸 거짓말이었다.

- 나는 내 남편의 혐의를 모두 벗겨 냈습니다! 내 자식들은 이제 더 이상 연쇄살인마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허무하게 죽은 내 남편의 넋은 누가 위로하고 아빠 없이 자란 아이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누가 보상해 줍니까. 가정을 이루고 회사에 첫 출근날 변을 당한 내 남편의 원한은 누가 갚아 준단 말입니까!

어느 한 인터뷰 방송에서 30년 동안 온몸을 갈아가며 남편의 무죄를 입증하려 노력해 왔던 노인이 한을 토해 내는 것처럼 소리쳤다. 겨우 남편의 무죄 선고를 받아 내는 데 성공한 그녀는 그날 이후 정확히 반년 뒤 남편을 따라가듯 돌연 사망했다.

재언도 방송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쯧쯧 찼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3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지금과는 다르다고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도… 지금이 80년대도 아니고……. 요즘은 과학수사도 잘 되어 있고 인권단체도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하던데……. 설마 절 고문이라도 할까요.”

재언이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하자 차민재가 그러느니 다 뒤집어엎는 게 어떠냐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2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 거 잊었어요?”

“…….”

물론 그것도 재언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2년 전에 할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한 손자가 잡혀 들어간 사건이었다.

새벽에 자고 있는 할머니를 칼로 여섯 번이나 찔러 죽인 패륜아라며 자극적인 뉴스가 며칠 동안 줄줄이 이어졌다. 부모가 버리고 간 손주를 지극정성으로 돌봐 온 할머니가 손자에게 그런 짓을 당하자 사람들은 공분을 느꼈다.

하지만 나이가 고등학교 2학년인 점, 본인도 크게 반성하고 있다는 걸 참작해 15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소년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성인이 되면 일반 교도소로 옮겨갈 테니 20대를 모조리 감옥에서 보내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그 사건이 재조명되었다. 그때 당시 문이 열려 있던 집에 무단 침입해 반항하는 할머니를 칼로 찔러 도주한 불량 청소년 집단이 자수해 온 것이다.

할머니를 죽인 범인으로 몰렸던 손자는 집 밖에 있는 화장실로 간 덕분에 화를 면했지만, 할머니를 죽인 패륜아라는 누명을 얻었다. 이 사건도 물론 조사관들이 소년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폭력을 가해 거짓 자백을 받아 냈다는 사실이 알려져 크게 비난받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어요.”

쐐기를 박듯 단호하기 짝이 없는 차민재의 말에 재언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배추는 어디 있어요? 설마 집에 혼자 두고 온 건 아니겠죠?”

“이레일이 집에 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녀석이어서 그런지 저보다 훨씬 잘 놀아 주더군요.”

아무도 모르게 사건을 조사해 진범을 알아내기만 하고 나머지는 레헬에게 맡기면 되겠다고 여겼던 최초의 계획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자신이 범인으로 몰리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일단… 내일 헬스장 근처를 살펴볼 생각입니다. 유력한 용의자인 것 때문에 헬스장 근처에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지긴 했지만…….”

증거인멸에 대한 우려로 행동반경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입 안에 있는 밥알이 마치 모래알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서 주임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쩐지… 그 사람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정도로 악독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거든요. 이번 사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닌지 걱정되네요.”

몇 번 밥을 씹다가 꿀꺽 삼키며 재언이 우울한 낯으로 말했다. 예전엔 잦은 야근 때문에 피로가 쌓여 얼굴이 해쓱했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위태로운 회사생활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우울해졌다.

정말로 해고라도 되면 야근하는 빌런은 고사하고 취업준비생 빌런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넘어가지 않는 저녁 식사를 겨우 마친 재언은 차민재가 소개해 준 변호사와 통화를 마치고 꺼림칙한 기분으로 하루를 끝냈다.

그런데 다음 날, 경찰이 구속영장을 들고 직접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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