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20화 (220/324)

220화

아무리 인생이 뿌리 없는 평초라고 한다지만…….

하루아침에 토막살인범으로 몰려 구치소에 수감되는 날이 오는 인생이라니, 꿈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재언은 자신이 완전무결하게 깨끗하고 도덕적이지 않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말엔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귀하지 않은 목숨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한낱 이익이나 재미만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살해당한 사람의 인생과 자신의 인권을 맞바꾼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그러니 그런 이들의 목숨은 일말의 가치도 없었다.

자신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편협한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그가 각성시켜 준 자식들이 사회의 규율을 밥 먹듯이 어기고 다니질 않는가.

대한민국의 범죄 조직 집단을 아래에 두고 조종하는 엔레이드맨. 외국의 작은 마을을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들로 만들어 전쟁에 참전하게 한 타락한 추기경.

사람을 납치해 잔인하게 고문해서 죽이는 체어맨. 자신의 무대를 더욱더 극적이고 아름답도록 보여 주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코루루.

전 세계의 마약 카르텔을 좌지우지하며 마약을 유통하고 심지어는 사람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하는 등 잔인하기 짝이 없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 마약왕.

마을 하나를 귀신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귀신들의 성녀. 제 또래의 청소년들을 위협하고 다니는 버드맨까지.

그나마 조각난 장난감은 재언의 눈과 귀가 되어줄 정보를 조사해 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악행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자식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재언은 전부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모른 척 눈감아 주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마지막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평범한 인생을 살다가 편안하게 죽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다. 재언이 평범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언젠간 다크 카오스라는 정체가 까발려지는 날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려 히어로들의 주적으로서 생활하게 될 나날을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었다. 그러나 하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서 구치소에 수감될 미래는 미처 준비해 놓지 못했다.

그날, 재언은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방해꾼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밤 하도 심란한 마음에 잠을 설쳤더니 몸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일곱 시였다. 주말에 일찍 일어나는 것만큼 억울한 게 없다고 생각하며 재언은 느릿하게 문밖의 불청객에게 대답했다.

“잠시만요… 누구세요?”

상의를 벗은 채였기 때문인지 쌀쌀한 아침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새삼 옆에서 맨몸을 드러낸 채 자고 있는 민재의 체온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실감했다.

차민재 또한 품 안에 있던 온기가 사라지자 눈가를 씰룩이긴 했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움찔거림에 맞춰 팔랑이는 진한 속눈썹을 감상하던 재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비척비척 현관까지 걸어가 문을 열자 보이는 건 경찰 제복을 입고 있는 경찰 두 명이었다.

“신재언 씨? 서로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저요?”

경찰 중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온 신재언의 얼굴을 빤히 보며 확인하더니 손에 든 종이를 조심스럽게 보여 주었다. 구속영장으로 보이는 종이에 자신의 인적 사항을 본 재언은 무표정한 얼굴의 경찰들과 종이를 멍하니 번갈아 쳐다봤다.

‘지금, 그러니까 나를 잡아가겠다는 소리인 거지?’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한 재언이 잠옷 차림 그대로 끌려가려던 찰나, 안에서 자는 척하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낮게 튀어나왔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언제 일어나서 다가온 건지 차민재가 까치집인 머리를 그대로 내보이며 구속영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공권력을 향해 거침없는 소리는 내뱉는 그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러다가 경찰 두 명을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 듯한 민재의 기세에 재언은 얼른 그를 끌어당겨 최대한 뒤로 숨겼다.

“자, 잠깐만요…….”

갑자기 맨 살갗을 내보이며 나타난 레드 헬 파이어의 모습에 얼이 빠진 경찰들에게 눈짓한 재언이 현관문을 닫고 뒤를 돌았다.

자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듯 차민재의 눈동자가 잔뜩 풀려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무서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경찰을 이유 없이 죽이면 뒷감당이 매우 힘드니 여기선 그가 조용히 있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거였다.

“민재 씨, 여기서 날뛰어 봤자 상황만 더 악화할 뿐이에요.”

“저놈들이 재언 씨를 잡아가는 걸 그냥 두고 보라고요?”

재언이 쓴웃음을 지으며 사나워진 차민재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그의 눈동자는 색소가 옅은 자신과는 달리 홍채가 동공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짙었다.

평소에는 순진한 척하고 있긴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맹수였다. 분노의 대상이 자신이 아님에도 살짝 심장이 덜덜 떨렸다.

“그렇다고 이 세계도 멸망시킬 순 없잖아요.”

“…….”

재언이 덧붙인 말에 방금까지도 경찰들을 죽일 듯이 쳐다보던 민재의 흉악한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자신의 한마디에 기세가 잠잠해지는 게 눈으로 확연히 보여 신기한 기분이 든 재언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차민재도 진정되었고 밖에선 경찰들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레드 헬 파이어?’, ‘히어로, 레헬?’ 등의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제가 잡혀가면 애인인 민재 씨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변호사를 데려와 주는 일이고, 두 번째는 진범을 잡아 주는 일이죠.”

“…네.”

“뭐, 재판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거고, 설마 하루아침에 형이 확정될까요. 저도 저 나름대로 자기방어를 열심히 할 테니 억울한 일만 생기지 않게 부탁 좀 드립니다.”

“만약… 그대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채 끝나면 어쩌려고요?”

“…이러나저러나 무기징역 이상은 받을 텐데, 그땐 애들 풀어서 도망이나 다니죠, 뭐.”

차민재의 눈이 잠깐 반짝인 것 같은데,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그 뒤로도 재언은 차민재에게 몇 가지를 더 당부했다.

엔레이드맨과 코루루, 귀신들의 성녀를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조력자로서 빌려주겠고 했다. 물론 엔레이드맨과 코루루는 경찰이고 뭐고 다 뒤집어엎으면 안 되냐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재언으로선 그 방법은 가장 마지막에 사용할 카드로 남겨 두고 싶었다.

결국,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엔레이드맨을 포함한 세 명의 자식은 같이 있기만 해도 불편한 레드 헬 파이어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른다더니 설마 저 레드 헬 파이어와 뜻이 맞을 날이 오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코루루는 훤칠하니 잘생긴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귀신들의 성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얘, 성녀야… 저 남자가 그렇게 세다는데 소문이 사실일까?”

재언에 의해 능력을 각성한 자식들은 으레 그렇듯이 우울증을 겪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뒤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형제들 간의 서열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쪽과 그렇지 못한 쪽이었다.

받아들인 쪽은 조각난 장난감과 체어맨, 귀신들의 성녀, 버드맨이 있었고 나머지는 납득하지 못한 호전적인 성격의 자식들이 있었다. 코루루는 그중에서 납득하지 못하는 측에 속했다.

타락한 추기경이 첫째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곁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엔레이드맨을 인정하지 않아 반항했다가 재언에게 ‘형제들 간 싸움 금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에 코루루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싸움을 걸지 못했기에 엇나가는 사춘기 자식처럼 삐딱하게 사고치고 다녔고, 마약왕 또한 불만을 잔뜩 내색하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후에 서열이 한 번에 정리되었다. 저러다가 사고 칠 것만 같다는 판단으로 엔레이드맨이 아버지 몰래 무력을 사용해 둘을 제압해 버린 것이다.

당시에 힘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어지간한 S급 능력자들과 맞먹을 수 있을 만큼 힘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던 그녀는 엔레이드맨에겐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패배했다.

엔레이드맨이 나름대로 동생들을 봐주며 상대한 결과 코루루는 한 달 동안 거동이 불가능했고 마약왕은 두 달 넘게 왼쪽 손이 마비되어 쓰지 못했다.

호전적인 성격의 동생들은 힘으로 찍어 누르고 그렇지 않은 동생들을 부드럽게 감싸 주는 그는 천성이 장남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자신을 무참하게 쓰러트린 엔레이드맨이 옷자락도 스치지 못한 레드 헬 파이어의 무력에 코루루는 피어오르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언니…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사고 치지 말고 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코루루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레드 헬 파이어와 그의 곁에 있는 엔레이드맨을 쳐다봤다. 그녀가 지금껏 보아 온 레드 헬 파이어는 소문만큼 무섭지도 않았고 오히려 재언의 옆에선 온순하고 매너 있는 사람이었다.

단신으로 테러 조직을 제압했고, 핵무기가 와도 그의 힘 앞에선 맥을 못 출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은 믿지 않았다. 전 세계 히어로들이 힘을 합쳐도 레헬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허세 가득한 소문들 말이다.

아버지조차도 그 소문들 때문에 레헬이 무서워 지난 1년간 사건이 터져도 자식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몇 번이고 당부할 정도였다.

“이번에 코루루가 이 두 눈으로 저 남자의 힘을 똑똑히 봐 주겠어.”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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