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흐응~”
코루루가 헬스장 건물 주변을 살피며 콧노래를 불렀다. 큰길과 이어지는 정문을 기준으로 건물의 양옆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골목길이었고 뒤쪽에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어린아이나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틈밖에 없었다.
평소의 코루루라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주적이나 마찬가지인 레드-헬-파이어 앞에서 맨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가 맨얼굴로 차민재의 앞에 나타나자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었다.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코루루였을 줄은 몰랐단 표정이었다.
그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재언과 뮤지컬 데이트를 즐길 정도로 뮤지컬을 좋아했다. 그러니 레헬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배우 코루루를 몰라볼 리 없었다.
그녀의 무대를 몇 번이나 보기도 했고, 그녀를 직접적으로 보호하는 의뢰를 맡은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녀가 이렇듯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데에는 신재언의 덕이 컸다. 레헬은 신재언이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임을 알고도 모르는 척, 오히려 뒤에서 도와주었다. 그러니 다크 카오스의 자식인 자신이 정체를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레헬이 신재언과 헤어졌을 때를 고려해야 하나 아주 잠시 고민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온다면 어차피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방법밖에 선택지가 없을 테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코루루에게 뮤지컬 배우로서의 세계적인 명성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저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게 좋아서 하는 짓일 뿐이었다.
위대하신 아버지를 따라 세상을 적으로 만들고 혼란에 빠트린 뒤 아버지의 옆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그 나름대로 황홀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코루루가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보여 준 건 그녀 나름대로 계산된 일이다.
코루루는 익숙한 뮤지컬 노래를 콧노래로 부르며 얼음 계단을 만들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원래였다면 진즉에 눈에 띄고도 남았을 테지만 그들이 건물 바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미 엔레이드맨의 둠(doom) 안이었다.
이렇게 결계 안에 있으면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보더라도 텅 빈 골목길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의 결계가 현재 골목길에 한정되어 있었기에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디딘다면 허공에서 갑자기 발이 튀어나오는 모양새가 되어 버릴 것이다.
“코루루.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마라.”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여기 화장실엔 사람이 없는 걸요?”
낚싯줄은 4층의 화장실 창문에서 이어져 있었고 그 위층은 헬스장이었다.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요즘 틈날 때마다 챙겨 보는 탐정 만화를 따라 하려는 듯 코루루가 품 안에서 도수 없는 안경을 꺼내 썼다.
“위대하신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이 코루루가 반드시 진범을 잡아 보이겠어.”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던 대사를 읊으며 코루루가 결국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성용 화장실이라 그런지 지린내가 풍기고 바닥이 조금 더러웠다.
화장실을 둘러보던 코루루는 팔짱을 끼고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 자락에 오물이 묻을까 살짝 발을 들어 올렸다. 그때 귀신들의 성녀가 창문 안쪽으로 상체를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언니. 엔레이드맨 오라버니가 어서 내려오라고 닦달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귀신들의 성녀는 몸을 살짝 물렸다가 창문으로 다리를 쑥 내밀었다. 이윽고 화장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그녀가 검은색 손톱을 보이며 입을 가렸다.
“어머, 오호호호… 여기엔 꽤 짙은 사념들이 많네요. 칸마다 귀신이 있는 건 물론 구석구석 춤을 추는 악귀들로 가득해요. 대체 어떻게?”
귀신들의 성녀가 충혈된 눈을 잔뜩 휘어 섬뜩하게 웃더니 가지 방울을 허공에 대고 힘차게 휘둘렀다. 무서운 건 딱 질색인 코루루가 소름이 돋은 제 팔뚝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자매인 조각난 장난감과 귀신들의 성녀와 특히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여동생의 이런 모습은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여기도 저기도 이렇게나 악귀가 많다니. 오호호… 호호호호… 여기서 대량 학살이라도 일어난 걸까요? 아니면, 다 같이 객사했나? 저는 매년 음기가 가장 강해지는 12월 31일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돌아다녀 보기도 했지만, 이만큼 사념이 강한 곳은 찾기 힘들었어요.”
“그러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신들의 성녀가 부리는 수만 부대의 악령들은 아버지 다크 카오스의 힘이 되었다.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닌지라 다치지도 않고 공포심도 없었다.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어서 귀신들의 성녀가 부리는 악령들은 누구보다도 잔인해질 수 있었다.
사실 신재언이 알게 모르게 자식들은 그를 세상의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각자 세력을 차근차근 키워 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악령들이 더 강해진다면 훗날을 도모했을 때 많은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코루루는 팔뚝을 감싸 안으며 괜히 주변 공기가 으스스해진 것 같은 기분에 귀신들의 성녀를 피해 화장실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다 구석 곳곳에 춤을 추는 악귀가 있다는 말이 떠올라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순간 코루루는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감각까지 느꼈다.
분명히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바람이 오지 않는 화장실 안쪽 구석이고 피부에 전혀 바람이 닿지 않았다. 겁을 먹어서 느낀 게 아니라 실제로 머리카락이 위로 끌어당겨진 것이었다.
코루루는 S급 히어로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능력을 가진 자랑스러운 다크 카오스의 다섯 번째 자식이지만, 호러에는 굉장히 약했다.
“꺄아아악!”
“언니?”
코루루가 비명을 지르며 귀신들의 성녀를 끌어안았다.
“귀, 귀신이 코루루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긴 게 분명해! 그렇지? 아아, 동생아. 얼른 이 못된 장난 치는 놈을 저승으로 보내 줘!”
귀신들의 성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벌 떠는 코루루의 등을 쓰다듬었다.
“언니. 거긴 악령이 없었어요.”
코루루를 진정시키는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침착해졌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악령들은 이제 제 명령을 듣는답니다……. 언니를 놀리는 그런 괘씸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귀신들의 성녀가 아직도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코루루의 머리카락을 잡자 가느다란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투명한 낚싯줄이 분명했다.
보이지도 않는 악귀를 피해 구석으로 도망갔던 코루루의 머리카락이 낚싯줄에 걸려 위로 올라간 것이다. 확실히 사람들이 더럽고 음습한 화장실 구석까지 굳이 들여다볼 것 같진 않았다.
“이 낚싯줄은…….”
귀신들의 성녀가 손에 쥔 낚싯줄을 당겨 보려던 그때, 화장실 창문을 통해 엔레이드맨과 레헬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사이 두 사람은 얼마나 좋은 시간을 보냈는지 엔레이드맨이 부루퉁한 얼굴로 눈을 잔뜩 찌푸린 상태였다.
“코루루, 귀신들의 성녀. 뭣 하고 있나. 그렇게 소란스러워서 누가 오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한 엔레이드맨이 둠(doom)을 건물 안쪽으로 옮기기 위해 손가락을 튕기려던 때, 귀신들의 성녀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그리고 그녀는 코루루의 푸른색 머리카락 끝에 걸린 낚싯줄을 잡아 엔레이드맨과 레헬의 앞에 내보였다. 자칫 잘못해서 이걸 놓쳐 버린다면 육안으로는 찾아내기 어려울 만큼 투명해 다시 찾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잠시만요, 오라버니… 코루루 언니의 머리카락이 낚싯줄에 걸렸어요.”
워낙 투명하고 얇아 잘 보이진 않지만, 엔레이드맨은 귀신들의 성녀가 무언가를 손에 감고 당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자 위쪽 천장에서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안에 있는 네 명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안에 뭐가 있군.”
레헬이 휘파람을 불어 불의 고리를 만든 뒤 화장실 창고로 쓰는 칸의 열쇠를 녹여 없앴다. 문을 열자 안쪽엔 대걸레와 짧은 사다리가 보였다.
사다리를 꺼낸 레헬이 낚싯줄이 내려온 천장의 안쪽을 두드리며 살펴보려고 했지만, 굳게 고정되어 있어 쉽지 않았다.
빠각.
레헬이 힘주어 천장에 구멍을 낸 뒤 판 하나를 옆으로 밀고 안쪽을 살폈다. 귀신들의 성녀가 계속 낚싯줄은 흔들어 봤지만, 안쪽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쿵쿵거리는 소리는 더 위쪽에서 났다. 레헬이 더 안쪽으로 손을 들이밀어 또다시 힘으로 위를 부숴 버리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위쪽은 헬스장이지만 토막살인이 일어난 곳이라 여전히 경찰 조사가 끝나지 않고 있어서 일주일째 문을 닫고 있었다. 레헬은 힘으로 부수거나 불꽃으로 태우면서 낚싯줄이 이끄는 대로 위를 향했다.
이 정도로 단단한 걸 보아하니 경찰이 발견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위쪽을 더듬거리며 이음새를 확인하던 레헬이 달칵 소리와 함께 천장의 문을 열자 헬스장에 깔린 두꺼운 깔개가 보였다.
“여기가 위의 헬스장과 연결되는군.”
그의 말에 코루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는 귀신들의 성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어머, 내가 한 건 했나 봐.”
“…그러네요.”
코루루가 비명을 지르는 통에 귀신들의 성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천진하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잔소리할 마음이 싹 가셨다. 오히려 그녀는 웃으며 코루루를 마주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