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위로 올라가기 위해 레헬이 힘을 줘 위쪽 패드를 뚫으려 했다. 그때 창가 쪽에 있던 엔레이드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바깥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저 남자는…….”
“엔레이드맨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 귀신들의 성녀와 코루루 역시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없었던 어두운 골목길 안으로 후줄근한 검은색 점퍼에 청바지를 입은 중년 남성이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는 바로 이 건물에서 죽은 채 발견된 이하나의 아버지, 이두철이었다. 지난밤 신재언을 때려죽이러 찾아온 그 남자였다.
비록 실제로 신재언을 때려죽이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식들에게 저 남자는 자신들의 위대한 아버지를 때려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에 코루루가 이두철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오라버니, 정말로 저 남자를 살려 두실 건가요?”
엔레이드맨은 화를 내며 펄펄 뛰는 코루루를 진정시키고 이쪽을 보고 있는 레헬에게 고갯짓했다.
아무리 애인인 신재언의 무죄를 위해 빌런들과 손을 잡았다고 해도 그는 엄연히 히어로였다. 그리고 이두철은 그의 사무실에 직접 의뢰를 넣은 고객이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면 자신들이 아닌 레드-헬-파이어임에는 분명했다.
홀로 딸을 키우며 목숨보다 아끼는 보석 같은 딸내미라는 수식어를 입에 달고 살던 이두철은 현재 하던 일도 멈추고 눈에 불을 켠 채 사방팔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무엇을 알아내고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일까.
골목길 안으로 들어와 걸음을 멈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4층 화장실 창문을 노려봤다.
엔레이드맨의 결계 안에 있는 이들을 볼 수 없을 텐데도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짐승 같은 예리한 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때마침 레헬이 사다리에서 내려와 빌런들이 보고 있는 창밖을 내려다보자 4층 화장실을 노려보던 이두철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를 따라 골목길 안으로 다른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스장의 트레이너이자 관장이며 신재언과 레헬이 진범으로 추측하는 남자, 박찬수였다.
“아버님. 일은 어떻게 되셨어요?”
둘은 면식이 있던 사이인지 박찬수가 반갑다는 표정으로 살갑게 이두철을 반겼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인적이 없는 외진 곳에서 몰래 만나는 모양새가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이두철은 박찬수의 질문에 고개를 숙이며 묵직한 한숨을 쉬었다. 그가 고개를 흔들며 참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못 죽였네.”
“이런…….”
“하나의 복수를 하고 싶었는데 녀석이 설마 그런 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두철의 대답에 박찬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보아하니 신재언을 때려죽이려고 했었던 계획을 이미 알고 있던 듯했다. 게다가 실패했다는 말에 이두철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박찬수의 눈빛이 굉장히 서늘해졌다.
“찔리니까 그런 걸 가지고 있던 겁니다. 하나를 그렇게 무참히 죽였는데 그런 대비를 안 하고 있었겠습니까? 일반인이었다면 그런 물건은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아버님께서 욕보셨네요. 아쉬우시겠어요.”
박찬수가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이두철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제 서른 중반인 박찬수가 나이 오십이 넘은 중년인 이두철에게 하는 행동치고는 수상했다. 하지만 이두철은 생각에 잠겨 있느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남자… 그리 악독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어. 때리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한 게…….”
“아버님. 하나랑 제가 사귀고 있을 때도 쫓아다녔던 놈입니다. 하나가 애인이 있다면서 싫다고 거절했지만 끈질기게 헬스장에 얼굴을 비추면서 스토킹하던 놈이라니까요. 자기가 조금 잘생겼다고 포기하지도 않고요.”
박찬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굳은 눈매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게다가 그 새끼는 간도 크게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하나의 손목을 가지고 다녔던 놈이라고요. 토막 난 하나의 손목을 가지고 있는 걸 목격한 증인까지 있는데 놈이 범인이 아니면 누가 범인입니까.”
박찬수는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기가 찰 정도로 거짓말을 잘했다.
이하나의 나이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고 박찬수는 무려 서른여섯 살이다. 사실 열네 살의 나이 차이를 차치하고서라도 이하나는 관장인 박찬수가 치근덕거릴 때마다 어색하게 웃으며 불편하다는 태도로 자리를 피해 왔다.
그녀는 마감 시간 이후에 박찬수가 같이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해도 식단 조절을 하는 중이라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가장 중요한 건 이하나의 이상형은 잘생긴 사람이라는 점이다. 잘생긴 데다가 키도 크고 몸까지 좋으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하던 그녀였다. 그런 의미에서 박찬수는 키가 크고 몸이 좋긴 하지만, 절대로 이하나가 만족할 만한 잘생긴 외모가 아니었다.
박찬수는 본인이 주변 남자들보다 평균 이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어릴 때뿐이었다. 평소에도 자신이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헬스장을 운영하는 사장으로서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여성과 교제를 꿈꾸곤 했다.
“하나는… 애인이 없다고 했었는데.”
“나이 차이가 좀 나니까 아버님께 숨겼다고 했습니다. 제가 연말에 찾아가서 인사드리기도 했고요. 하나가 관련도 없는 사람을 소개했겠습니까. 저도 지금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그런 놈에게 죽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아요. 할 수 있다면 제가 가서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박찬수는 이하나가 연말에 본가에 가기 위해 헬스장의 직원 노트북으로 기차표를 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몰래 인터넷 기록을 뒤져가며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인한 뒤 같은 표를 사서 이하나를 뒤쫓아 갔다.
연말 선물을 바리바리 사 들고 온 사장님을 쫓아낼 수 없었던 이하나가 울며 겨자 먹기로 아버지에게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박찬수는 본인에게 유리한 기억을 조립해 자식을 잃은 아버지를 제 입맛에 맞도록 조종했다.
그리고 회원 카드를 통해 알게 된 신재언의 집 주소와 거짓 증언을 전해 주면 이두철이 자신 대신 처리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복병이 있었던 모양이다.
‘씨발 새끼가… 그거 하나 발견했다고 생지랄을 떠는 바람에.’
박찬수는 딸을 죽인 진범 앞에서 쩔쩔매는 이두철을 내려다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사실 이하나는 박찬수가 죽인 게 맞았다.
몰래카메라 사건 이후 이하나는 어떻게 알았는지 헬스장 남성 트레이너들과 회원들이 가입한 오픈 채팅방을 알아내 그 안에서 몰래 찍은 사진들이 공유되고 있다는 것까지 눈치챘다.
박찬수가 처음부터 그 채팅방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제일 먼저 카메라를 발견했었고 전부 회수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헬스장 단골이었던 남자 회원 두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헤실헤실 웃으며 좋은 건 공유하고 외국 사이트를 통해 사진을 판 수익을 조금 나눠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박찬수는 마음이 흔들렸었다.
그들이 공짜로 준 사진에는 이하나가 탈의하는 모습, 볼일 보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하나가 인터넷에 게시글을 올려 공론화는 물론 방송사와 기자들에게도 알리겠다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화가 나 목을 졸라 죽여 버렸다.
우발적인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머릿속은 팽팽 돌아갔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인생을 감방 생활을 하면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던 중, 때마침 좋은 먹잇감이 발견된 것이다. 토막 난 손목을 왜 가지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고 생각하던 신재언이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라간 것이다.
게다가 ‘신 주임님이 이 헬스장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됐다고 알려 주셨을 때 그냥 오지 말걸…….’이라고 증언한 서은경의 말을 경찰과 검찰이 나서서 악의적으로 바꿔 놓기까지 했다.
그에 박찬수는 재언의 혐의에 쐐기를 박듯이 상황을 허위로 꾸며냈다. 깡촌에서 올라와 뒷배 하나 없는 일개 회사원인 신재언이 빠져나올 길을 어떻게 찾겠는가.
이게 다 그 자식이 몰래카메라를 발견한 탓이다. 여성들 사진보단 값이 덜 나가지만, 나름대로 몸 좋고 잘생긴 남자의 사진도 팔리는 편이었다. 그런데다가 앞으로도 공간 제공을 협력해 준단 이유로 수수료를 쏠쏠하게 받아 챙길 수 있었는데 그 자식 때문에 일을 망쳤다.
여성 회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도 모자라 박찬수가 관심 있어 하는 이하나까지 놈이 운동할 때마다 넋을 놓고 쳐다보는 게 배알이 뒤틀렸었다. 세상에 달관한 척, 착한 척 온갖 짓을 다 하더니 몰래카메라를 발견했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자신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다.
자신이 이하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건 신재언이라는 놈 때문이 맞았다. 그러니 죄를 뒤집어써서 잡혀간 것도 자업자득이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이하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했으니 진짜 살인마는 그놈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박찬수는 골목길을 나가려는 이두철의 뒤에서 주머니에 숨겨 놓았던 낚싯줄을 꺼냈다.
딸의 복수를 하겠다고 스스로 실종을 자처한 노인네다. 자식이 죽은 걸 비관해 자살했다고 유서를 써 두면 될 일이다.
이쪽 부근의 건물 CCTV는 모두 꺼 두었으니 박찬수의 허술한 진술도 그가 죽으면 없어지게 된다.
이하나를 죽였을 때도 감쪽같이 시체를 처리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 며칠 숨겨 두는 동안 어떻게 자살처럼 위장할지 고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