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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25화 (225/324)

225화

범행 당일, 박찬수는 이하나에게 몰래카메라 사건으로 상담하고 싶다며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골목길로 은밀하게 불러냈다. 그러고는 트레이너 한 명과 직원 휴게실에서 함께 점심을 먹어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점심을 먹은 뒤 양치하고 오겠다며 4층의 남자 화장실로 달려간 박찬수는 창문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하나에게 곧 내려갈 테니 기다려 달라고 소리쳤다.

이어서 마치 실수인 척 고의로 핸드폰을 떨어트려 어쩔 수 없이 이하나가 골목길 안쪽까지 들어오게끔 유도했다. 박찬수가 말하는 곳에 도착한 그녀가 몸을 숙인 순간 3kg의 아령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그대로 기절했고 박찬수의 만행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4층 창문을 비집고 나와 살짝 튀어나온 벽돌을 발판 삼아 옆으로 옮겨간 뒤 파이프를 타고 조심스럽게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미리 가져다 놓았던 커다란 쓰레기통에 이하나를 옮겨 담았다. 또한 버려진 쓰레기 봉지들을 헤집어서 주변을 더욱 지저분하게 만들어 흔적을 지웠다.

이윽고 쓰레기통 옆에 있는 작은 손잡이에 낚싯줄을 몇 번이고 둘러서 단단하게 묶은 뒤 전날에 설치해 놓은 낚싯줄 도르래에 연결해 창문 아래쪽에 세워 놓았다.

마지막으로 두꺼운 보호 장갑을 몇 겹 착용한 손으로 화장실 창문에 고정해 놓은 낚싯줄을 잡고 오로지 완력만을 이용해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무사히 4층으로 올라온 그는 쇠 구슬로 표시해 놓은 낚싯줄을 잡아당겨 이하나의 시신을 4층까지 옮길 수 있었다.

평소에 운동을 꾸준히 해 온 덕분에 완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이하나의 체구가 작고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아서 더욱 쉽게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박찬수는 유유히 빈손으로 올라와 미리 뚫어 놓은 헬스장 바닥, 즉 4층 화장실 천장으로 쓰레기통을 끌어 올렸다. 휴게실에서 이하나의 몸통을 제외한 다른 부분을 잘라 냈다.

그런 뒤 때마침 헬스장에 여성 회원이 없는 틈을 타 토막 난 시신을 몰래 숨겨 놓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온다는 핑계로 골목길 옆 창고에 이하나의 몸통을 숨기고 돌아왔다.

그러면서 간간이 운동하는 회원들의 눈에 띄도록 일부러 지도하는 척 말을 걸면서 돌아다녔다. 몇 없는 여성 회원인 서은경을 발견한 것까지 전부 계획대로였다.

박찬수는 웬일인지 이른 시간에 와서 몸을 풀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일부러 부딪혀 음료를 쏟게 해 여자 탈의실로 향하도록 유인했다.

이윽고 그의 바람대로 서은경은 수건 더미에서 이하나의 머리를 발견해 비명을 질렀고, 그 이후 시작된 수사에서 회원들은 아주 열심히 박찬수의 알리바이를 증언해 주었다.

하지만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알리바이가 있다고 해도 박찬수는 완전히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몇 명의 노련한 형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쪽 골목길까지 조사를 확대해 나갔다.

만약 계속 수사가 진행되었다면 결국엔 숨은 창고의 존재가 발견되었을 것이고 박찬수는 빼도 박도 못하게 범인으로 잡혀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때마침 헬스장 회원이었던 신재언이 잘린 손목을 들고 다녔다는 걸 봤다는 증언이 나와 그쪽에 초점이 몰렸다.

어렵고 귀찮은 수사와 몰아가기 쉽고 편안하게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는 갈림길에서 경찰과 검찰은 후자를 선택했다. 덕분에 박찬수는 이하나의 아버지 이두철을 끌어들여 그가 신재언을 죽이고 자살한다는 멋진 시나리오를 짰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이 건든 사람이 무시무시한 빌런 여덟 명을 자식으로 거느린 다크 카오스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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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재언의 자식들과 레헬은 헬스장 건물 뒤쪽에 골목길과 이어진 작은 창고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창고 입구가 쓰레기들로 가려진 데다 손잡이도 교묘하게 숨어 있어 언뜻 보면 벽이라고 착각할 만큼 찾아내기 힘든 공간이었다.

박찬수는 커다란 통을 창고 안쪽에 숨겨 놓고 잠시 외출한 상태였다. 창고의 한쪽 구석에는 헬스장 내부에 설치한 CCTV를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 3개가 빛을 내고 있었다.

“가여운 조각난 장난감…….”

커다란 통 안에 있을 남자를 보고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 흘리는 그녀의 태도에 엔레이드맨은 한참 동안 고민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 한 명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크기의 푸른색 쓰레기통은 입구가 단단히 막혀 있었고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머리를 잘못 맞아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혀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라면 억울하게 죽은 자식과 마찬가지로 이두철의 마지막도 또한 잔혹하기 그지없을 것이었다.

신재언이 남자를 벌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있었고, 조각난 장난감이 과거를 떠올리며 우는 것을 보자 실제 가족보다도 남다른 가족애를 가지고 있는 그들의 마음이 점점 약해졌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그들은 일단 쓰레기통 뚜껑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덤벨을 옆으로 치웠다.

“살아 있는 걸까요?”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금방 죽겠어요.”

“호호, 호호호호……. 이 남자에게서 음기가 짙게 나옵니다. 이대로 죽는다면 멋진 악령이 될 게 분명해요.”

음산한 목소리를 이어 노래하는 듯한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 남자는 아버지께 해를 끼친 놈인데. 그를 부하로 두겠다는 거니?”

“하지만 언니. 그런 놈이 아버지에게 굴복한 살인귀가 될 텐데, 그게 더 재미있지 않나요.”

“아름다운 무대가 될 것 같네.”

두 여성의 목소리는 분위기가 상반되었지만 비웃음과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똑같았다.

쓰레기통의 뚜껑이 열리고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얼굴을 드러냈지만, 머리를 가격당한 후유증으로 이두철의 흐릿한 시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크게 다친 상태였다.

그의 모습을 유심히 보던 레헬이 이두철의 묶인 손목을 풀어 주며 핸드폰을 들었다. 눈꺼풀을 뒤집어 이두철의 동공을 확인하던 레헬은 그가 조금씩 정신을 차리는 걸 보며 말을 걸었다.

“이두철, 정신이 드나? 사무실에 상주 의료팀을 불러 줄 테니 너는 여기서 그만 빠져…….”

그런데 이두철이 레헬의 말을 끊는 듯이 손목을 턱 붙잡으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때 엔레이드맨이 창고 구석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왔다. 꽤 크고 무거워 보이는 가방이 두둥실 떠올라 레헬의 앞에 털썩 던져졌다.

“여기서 이런 걸 찾았어.”

레헬이 몸을 숙여 가방을 열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자 검은색 비닐봉지로 겹겹이 싸여 있는 커다란 무언가가 나타났다.

비닐봉지를 찢어 내니 나타난 것은 부패하기 시작하는 여성의 몸통이었다. 그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하나의 시신 일부라는 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두철이 정신 차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엔레이드맨은 일어나 서서 딸의 시신을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레헬이 히어로랍시고 그를 구조하는 걸 모른 척하긴 했는데, 그런 충격을 받고도 멀쩡히 일어나 있는 게 정신력이 굉장한 사람인 듯했다.

“헉… 헉…….”

이두철이 레헬의 손목을 잡은 상태로 그를 밀어냈다. 마치 지금 자기 행동을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는 그의 마지막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순간, 타이밍도 좋게 박찬수가 얇은 실톱을 가지고 창고 문을 열었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얌전히 기절해 있어야 할 이두철이 우뚝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에 박찬수가 창고 안을 들어오다가 멈칫했다.

거기다가 다른 쪽 구석에서는 네 개의 그림자도 함께였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마치 무대를 즐기는 관객처럼 각자 편하게 앉아 이두철과 박찬수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잠시 놀랐지만 일단 눈앞의 방해물인 이두철부터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한 듯 박찬수가 실톱을 강하게 쥐고 휘둘렀다.

하지만 온전한 몸 상태가 아님에도 이두철은 박찬수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뒤 그의 턱에 주먹을 갈겼다.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박찬수의 얼굴이 돌아갔다.

아까는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뒤를 잡히고 한눈판 사이 당했다면 지금은 온몸으로 공격과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실전이 아닌 운동만 해 왔던 남자의 공격 따위는 눈감고도 피할 수 있었다.

“저걸 보고도 말리지 않을 건가? 넌 히어로잖아.”

엔레이드맨은 부루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서 이두철이 박찬수를 죽일 듯이 때리는 걸 쳐다봤다. 조각난 장난감 때문에 이두철을 놓아준 것이긴 하지만, 그가 사람을 패는 광경을 보다 보니 아버지께 감히 주먹을 날렸던 그날이 생생하게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엔레이드맨에게 신재언은 부모 이상으로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위대한 존재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입힌다면 설령 형제들이라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환영이어도 아버지를 향해 제멋대로 주먹을 날리고 막말을 내뱉은 이두철은 백번 죽어도 모자랄 놈이었다.

“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줬잖아.”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사무실의 의료팀을 불러 주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그가 히어로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 정도면 신재언에게 변명거리는 될 테니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레헬이 평소에 엔레이드맨을 찐따 새끼라고 부르는 것처럼 엔레이드맨은 레헬을 음습하고 기분 나쁜 새끼라고 불렀다. 서로 죽일 듯이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둘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도 기적이었다.

살려 달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박찬수의 비명과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지더니 이두철이 움직임을 멈췄다.

박찬수의 팔다리는 어느새 괴상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기절한 그는 주저앉지도 못하고 멱살이 잡힌 채 신음을 흘렸다. 기절해 있는데도 어지간히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호호, 호호호호……. 제가 말했지요? 엄청난 악령이 태어날 것 같다고요!”

귀신들의 성녀가 활짝 웃으며 가지 방울을 휘둘렀다. 코루루는 귀안이 없는 탓에 그녀가 왜 펄쩍 뛰며 좋아하는지 의아해하다가 이두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 그는 선 채로 딸의 복수를 마저 끝내지도 못한 채 숨이 멎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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