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0515번 신재언 씨. 면담입니다. 따라 나오십시오.”
구치소 독방의 문이 열리며 재언을 불렀다. 그전까지 재언은 TV 뉴스를 시청하면서 타락한 추기경에게 받은 정보들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독방에서의 생활은 제법 아늑했다. 아침에 일찍 기상해서 이불을 개고 청소와 세안을 마친 뒤 아침밥을 받아먹는다.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거나 독서를 즐기기도 했다.
다인실은 알게 모르게 서열이 존재해 누군가는 불합리한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고 하던데 재언은 그럴 일이 없어 조금이라도 편한 듯했다. 누구의 입김이 닿았는지는 몰라도 독방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다만, 몸이 찌뿌둥하고 심심했다. TV에서는 뉴스나 종교 방송들만 반복적으로 틀어 주었고 읽을 만한 책도 철학이나 에세이가 전부였다. 시집이나 성경책도 있긴 하지만, 이쪽으로는 아무리 해도 관심을 주기가 힘들었다.
따로 주어지는 운동 시간 외에 구치소 내에서의 운동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가볍게 팔 굽혀 펴기를 하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그저 하루 종일 앉아서 독서하는 척하며 찾아오는 자식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요즘 일이 바쁘다며 자식들에게 신경 쓰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번 기회로 대화를 여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 사고뭉치들이 얼마나 많은 사고를 쳤는지 굉장히 자세히 알게 되었다.
타락한 추기경은 중동의 작은 마을을 비롯해 한 국가의 수도 근처까지 사이비 종교를 퍼트렸다며 기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체어맨은 친손녀를 성폭행하고 임신시킨 덴마크의 수도승을 죽였다고 했다.
게다가 그 일을 계기로 국제적 분쟁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 사고를 쳤을지 재언은 조금 두려워졌다.
그래도 구치소 생활의 가장 큰 수확은 버드맨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는 점이다.
“…아버지, 제가…….”
요즘 밖으로 잘 나가지 않던 버드맨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아직 어린 소년에게 재언이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매일 괜찮냐고 안부를 묻는 것밖엔 없었기에 그가 먼저 찾아온 게 무척 반가웠다.
“아버지… 요즘 꿈을… 꾸는데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한마디 하더니 한참을 이어 가지 못하기에 재언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안 그래도 요즘 부쩍 말수가 적어진 소년의 모습에 걱정스러웠던 참이다.
마약왕을 통해 외국의 고등학교로 편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일련의 사건 때문에 그의 유학 생활이 물 건너가 버린 게 마음에 가장 걸렸다. 게다가 마약왕의 아들 지오반니와 굉장히 친해 보였는데 억지로 떨어트려 놓은 것도 못내 신경 쓰였다.
“그래, 버드맨. 천천히 말해도 돼.”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버드맨의 입이 작게 열렸다.
“아버지.”
“그래.”
벌써 열다섯 번째 부름이었지만 재언은 귀찮은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다정하게 그를 다독였다.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계속해서 입술만 달싹이던 버드맨의 말문이 드디어 트이려는 듯 그가 머뭇거리면서도 작게 목소리를 냈다.
“누군가가 계속 저를 구해 주는… 그런…….”
그런데 그때,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독방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교도관이 신재언을 호명하자 버드맨은 겨우 열었던 입술을 닫아 버리고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방해받은 시간에 재언은 올라오는 짜증을 가까스로 갈무리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서늘하게 변한 눈빛은 미처 누르지 못한 탓에 마치 야수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로 노려지는 작은 짐승처럼 교도관은 온몸이 굳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신재언이 눈을 꼭 감아 버리자 얼어붙었던 몸이 풀어진 교도관이 겨우 숨을 내쉬었다.
“…0515번 신재언 씨. 면담 요청이 있습니다.”
신재언이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 나올 때까지 교도관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변호사 및 면회자 면담 시간은 점심시간 전에 끝났을 텐데 교도관이 일부러 찾아와 데리러 올 정도면 예삿일은 아니란 뜻이었다.
‘올 게 왔구나.’
독방에서 버드맨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미 사라진 그의 입이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느긋하게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재언은 앞서가는 교도관의 뒤를 따랐다.
교도관이 멈춰 서서 안내한 방 안은 재언이 변호사를 만났었던 공식 면회실이 아니라 CCTV도 없이 책상과 의자만 있는 어두침침한 곳이었다. 재언은 요즘 세상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뒤에서 쾅 하고 문이 열리더니 남성 두 명이 나타났다. 그중의 한 명은 나이가 40대 후반에 굉장히 얍삽하게 생긴 남성이었다.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이는 그는 들어오자마자 신재언을 힐끔 보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면서 자리에 앉았다.
“애미, 애비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별 땅 같지도 않은 데서 농사는 무슨. 아들 쥐꼬리만 한 월급이나 쥐어짜면서 살고 있겠지. 애미 쪽은 별것도 아닌 하피고… 이런 거 하나 보내는 건 일도 아니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책상 위에 신재언의 인적 사항이 쓰인 종이를 무성의하게 집어던졌다. 독방으로 배정되었을 땐 무슨 연줄이라도 있는 사람인 줄 알고 걱정했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신재언이란 남자는 그냥 그런 회사원에 쥐뿔도 없는 부모를 가진 일반인일 뿐이었다. 그러니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을 터였다.
남자는 이미 이 덩치 크고 잘생기기만 한 건방진 놈의 기를 죽이기 위한 열 가지 방법을 생각해 둔 참이었다. 이 열 가지 순서에서 딱 다섯 가지만 가도 어지간한 놈들은 입을 열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히어로와 검사에게 재판 없이도 능력을 사용한 빌런이나 범죄자를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경찰 쪽에서는 자신들에게도 권한을 주지 않느냐며 소란이 있었고, 인권위원회에서는 피의자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해 아직까지 논란이 많은 법안이었다.
어쨌든 빌런들의 폭력성과 테러에서 공권력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주어진 권한이었다. 레드-헬-파이어가 빌런을 태워 죽여도 그를 벌하지 않을 수 있게끔 만들어진 주먹구구식 법이니만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비각성자 또한 위험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어도 어느 정도 선에서 ‘즉결 처분’이 가능했다.
검사인 남자는 이 법을 아주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신재언을 흉악한 아이템을 가진 범죄자로 몰아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강조할 예정이었다.
재언은 검사의 표정과 태도를 보며 그가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절대로 그가 의도한 대로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전에 자식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언제까지 들어줄지 의문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재언의 신변에 이상이 없을 때 가능한 이야기였지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재언은 법의 울타리를 지켜야 할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어긋나는 걸 볼 때마다 부조리의 시작을 보는 것 같아서 답답해졌다. 분노의 불꽃이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평행 세계에서 재언의 어머니는 괴한에게 덮쳐져 칼에 찔려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법과 공권력은 가해자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범인의 형벌과 어머니의 죽음을 보잘것없이 만들었다.
분노한 아버지가 제발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형벌을 주어야 한다고 눈물로 읍소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에서 하피인 어머니의 이름과 사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공공연하게 성희롱과 비웃음을 당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얼굴은커녕 이름이나 나이도 전부 비공개였다.
피해자의 유족들만이 피눈물을 쏟아 낼 뿐이었다. 평행 세계 신재언이 ‘상위급 존재들’의 장난감이 될 정도로 마음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도 이런 부조리함 때문이었다.
평범하게, 좋게 넘어가자고 맘 편히 생각해왔던 재언의 마음에 점차 증오가 생겨나기 시작한 순간, 사실상 고문실이나 다름없었던 ‘면담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야비하게 생긴 검사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방해꾼을 노려봤다.
“뭐야?”
“…그게, 안 검사님. 이리 좀 와 보세요. 총장님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제법 젊어 보이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와 야비하게 생긴 검사를 조심스럽게 불러냈다. 검사는 핼쑥해진 얼굴의 후배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따라 나갔다.
잠시 후, 이야기를 마쳤는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 검사의 표정이 방금 보았던 후배의 표정과 비슷하게 핼쑥해져 있었다. 방금까지 기세등등했던 모습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재언의 인적 사항이 쓰인 종이를 들어 올렸다.
한참 동안 재언과 종이를 힐끔거리던 그는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 바들거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최대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아, 아이고… 제가, 제가 농담이 심했습니다……. 그게, 이게 형식상 해야 하는 조사라서요. 신재언 님… 많이 놀라셨죠?”
“…네?”
검사가 비굴하게 웃으며 쓸데없이 인적 사항 몇 가지를 질문했다. 그러면서도 재언을 안심시키듯 몇 번이나 형식적으로 하는 행위라고 덧붙였다.
“범인이 아닌 것 알고 있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조사해서 이런 곳에서 나갈 수 있게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방금 무례하게 굴었던 건 정말 죄송합니다.”
억지로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잔뜩 겁먹은 표정이 섞여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방금까지만 해도 야비하게 반짝이던 눈동자를 했던 남자가 왜 이렇게 겁에 질렸는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 방금 찾아왔던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결국, 남자는 혈색이 전혀 돌아오지 않은 얼굴로 재언만 남겨 두고 면담실을 나가 버렸다.
‘…레헬이… 손을 써 줬나? 하지만… 저 남자의 반응은 히어로의 압박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어리둥절해 있는 것도 잠시, 재언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남자에 어떻게 해야 하나 짧게 고민했다. 이런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서 꼼짝없이 누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밖으로 나가 봐야 하나 갈팡질팡했다.
그러다가 바깥 상황이 어떤지만 아주 잠깐 보자는 생각으로 재언은 문을 살짝 열어 얼굴만 빼꼼 내밀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 순간, 재언은 이곳에서 봐선 안 될 한 남자를 발견했다. 죄수복을 입지 않은 남자는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신재언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공손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마약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