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재언이 당황해하는 사이 마약왕은 눈에 띄지 말라 했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것처럼 보란 듯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가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사건에 끼어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까 그 검사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친 게 마약왕과 연관이 있다는 것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재언의 밑으로 모인 다른 자식들과 달리 마약왕은 각성 이후에 큰 권력과 재산이 굴러 들어왔다. 친형이 가졌던 재산과 가문을 모두 빼앗음으로써 복수에 성공한 그는 이탈리아 블랙 마켓을 지배하는 마피아 보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부, 권력, 그리고 재언이 각성해 준 S급에 버금가는 능력까지 얻으며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다. 재언도 그가 날개 달린 사자처럼 몸집을 불려 나가고 있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외국의 사법기관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로 세력이 커다래졌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마약왕과의 만남에 재언이 심란해하고 있는 사이 사건은 일사천리로 정리되었다. 무슨 일을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해치우는지 순식간에 무죄 판결이 나와 구치소에서 출소하게 된 것이다.
구치소 밖을 나가는 재언의 양손을 구치소장이 직접 나와 마주 잡았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굉장히 정중한 어투로 머리를 조아렸다.
“어디 불편한 곳 없이 지내셨습니까…….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셔서 정말 어찌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저희가 사후 처리까지 불편함 없이 수습할 테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
제발 저 모습이 마약왕 때문에 벌벌 떠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재언은 그의 사과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억울하게 나락으로 떨어트리려 했던 사람으로서의 일말의 양심이길 바라며 구치소 밖을 나섰다.
그런데 재언이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소장과 교도관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허리를 숙였다. 재언은 진심으로 이곳에서 얼른 도망치고 싶어져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아무리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고 해도 무죄 판결이 나오려면 이번 토막살인사건의 진범이 밝혀져야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언은 압수당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고 서둘러 인터넷 창을 열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뉴스 속보 헤드라인을 빠르게 살폈다.
과연, 레헬과 자식들이 이번 사건을 잘 해결한 듯했다. 예상했던 대로 박찬수가 진범이 맞았다.
그런데 뉴스 기사를 읽던 재언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고 대기업 감성의 영화 한 편을 써낸 거지? 이하나의 아버지면 이두철인데, 그 양반이 죽었다고?’
다른 기사를 눌러서 읽어 봐도 내용은 모두 동일했다.
[아버지의 사랑… 진범을 잡은 전직 형사.]
[딸의 죽음에 분노, 경험 살린 전직 형사가 진범을 잡아냈다.]
[안타까운 아버지의 사랑. 딸의 죽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자극적인 내용의 헤드라인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고 베껴 쓴 것처럼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었다. 딸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아버지가 형사였던 경험을 살려 진범을 잡기 위해 움직였고 범인을 찾아내 사투를 벌이다 사망했다는 감동적인 내용이 중심이었다.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감동적인 실화라며 인터넷이 떠들썩했다. 그러나 그런 기사들 가운데에 누명을 썼던 재언에 대한 정정 기사는 별로 없었다. 있어도 아주 조그맣게 있거나 한 줄로 끝났다.
[한편,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용의자 S씨의 혐의는 완전히 풀렸다.]
구치소에 갇혔던 시간이 일주일이 넘지 않았기에 재언에게는 소정의 위로금만 지급될 뿐이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해자나 마찬가지인데, 범인은 자신이 아니라며 해명하고 다녀야 할 현실에 조금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거기다가 이두철에게 맞아 죽을 뻔했던 사람으로서 그가 진범을 미리 눈치채고 비밀리에 홀로 수사를 했다는 소설 같은 기사에는 어이가 없어졌다.
재언이 핸드폰 화면을 보며 헛웃음을 짓는 동안 그의 앞에 경찰차 한 대가 다가와 섰다.
“신재언 씨, 댁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래도 알아서 집까지 가라고는 안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언은 경찰들의 호의에 고개를 저어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괜찮습니다. 데리러 올 사람이 있어서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색의 세단 한 대가 가까이 다가와 멈춰 섰다. 재언은 경찰들이 정중하게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틈을 타 조수석에 올라탔다.
부드럽게 출발하는 차 안에서 재언은 자신을 데리러 온 차민재에게 가장 먼저 감사 인사를 건넸다. 언론은 이두철이 진범을 잡은 것처럼 떠들어 댔지만, 재언은 레헬과 자식들이 지대한 활약을 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감사했습니다, 민재 씨. 덕분에 이렇게 풀려났네요.”
“뭘요.”
그런데 운전하는 차민재의 옆모습이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샅샅이 훑어보던 재언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재 씨, 바람피웠어요?”
“네?”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차민재가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재언도 할 말이 많은 게 그의 목덜미에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창고의 크기나 위치가 너무나도 수상했다.
민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다시 앞을 보며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이건 마법이 걸린 아이템입니다. 냉기가 더 이상 올라오지 않게 막아 주고 있는 기능이 있어서요. 사흘 정도는 냉기로 귀찮아질 것 같으니 아이템을 쓴 겁니다.”
“냉기요?”
“…….”
말하다 보니 황당한 기분이 더해지는지 민재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재언을 노려봤다.
“…재언 씨도 앙칼진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더군요.”
“…죽인 건 아니죠?”
“흥.”
차민재가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의 반응에 죽인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냉기라고 하면 코루루밖에 없을 테고 앙칼졌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녀와 제대로 한판 싸웠단 의미였다. 대체 사건을 조사하러 간 두 사람이 무슨 일로 싸웠을지 의문이었다.
차민재가 자신의 정체를 다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상황에서 코루루를 잡아가겠다고 먼저 덤비진 않았을 테고 코루루도 항상 자신이 당부해 왔으니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잠시 의문을 뒤로한 재언은 구치소에서 나온 기념으로 차민재와 가까운 감자탕집으로 들어가 뜨끈한 감자탕을 먹고 볶음밥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부른 배를 두드리고 있을 때,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조금 의아스러웠다. 재언이 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자동으로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취업 준비생으로 돌아간 처지에 약간 우울한 참이었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연봉이 줄어들어도 야근이 일주일에 네 번이 넘지 않는 다른 회사로 이직하자고 생각했었다. 모아 둔 돈도 있고, 여차하면 돈 많은 애인 덕을 봐야겠다고 말이다.
“네, 신재언입니다. 박 부장님…….”
- 신 주임. 들었어. 하이고… 말도 말아. 난 신 주임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런 이상한 소리 하지도 말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줬다고. 참, 김 대리도 사람이 이상해. 왜 갑자기 토막 난 손목이니 뭐니 떠들고 다녀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전화를 받자마자 박 부장은 숨도 쉬지 않고 제 할 말만 쏟아내며 재언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 공연히 신 주임만 억울하게 됐잖아. 그 뻔뻔한 인간을 해고하는 게 낫지. 어쨌든 신 주임. 정말 욕봤고 마음 잘 추스르고 월요일부터 다시 출근하면 되네. 몸조리 잘하고 그날 오면 면담을 좀 가지자고.
결국, 마지막까지 자기 말만 하고 끊어 버린 박 부장의 태도에 허망한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재언은 이게 진짜로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고민했다.
김 대리가 그동안 진상을 부려 왔긴 했지만 사실 재언이 조각난 장난감의 손목을 가지고 있었던 건 맞았기에 그가 완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지금 박 부장이 한 이야기를 봐선 김 대리가 신재언을 골탕 먹이려고 선 넘은 거짓말을 했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서 애들하고 얘기를 좀 해 봐야겠어요. 민재 씨도 오늘 피곤했을 텐데 들어가서 푹 쉬세요. 정말 고마워요. 민재 씨가 아니었으면 제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거예요.”
재언은 집 앞까지 자신을 데려다준 민재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뒤를 돌았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 그는 급하게 체어맨의 문을 통해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향했다.
난로 앞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쬐며 멍하니 앉아 있어야 할 엔레이드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겁지겁 엔레이드맨의 방으로 올라갔지만, 이곳에도 그는 없었다.
“엔레이드맨!”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곁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자식들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슬슬 걱정스러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던 재언이 코루루의 방을 지나친 순간, 안에서 소란이 일었다.
‘뭘 잘했다고 우는 거냐, 코루루!’
‘으앙! 흐어엉!’
‘…--…-’
코루루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재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안쪽 상황을 살폈다. 침대에 누워 목과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울고 있는 코루루의 모습이 보였다.
“분해. 분해! 분하단 말이에요!”
“…….”
재언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단숨에 눈치챘다. 호전적인 코루루가 재언의 말을 어기고 레헬에게 덤볐다가 당한 모양이었다.
당분간 거동이 불편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예전 레헬과 싸웠던 엔레이드맨의 상태와 비교하자면 코루루의 부상은 양반이었다. 그가 재언을 생각해서 굉장히 봐주며 상대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애초에 뒤에서 공격할 거였으면 우리에게 미리 말이라도 하지. 그러면 협공해서 그놈을 보내 버렸을 텐데. 독단적으로 나섰으니 당할 수밖에. 네가 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귀신들의 성녀가 깜짝 놀라서 그 일대에 악령들을 폭주시키지 않았느냐! 이런 꼴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뭘 잘했다고 눈물을…….”
재언은 엄하게 호통치는 엔레이드맨의 뒤쪽으로 소리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였다. 엔레이드맨을 포함한 방 안의 나머지 자식들은 재언이 와 있는지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사실 코루루를 혼내고 있는 건 엔레이드 맨뿐이었다. 타락한 추기경은 그녀의 부상이 빨리 회복되도록 축복을 걸어 주고 있었고 나머지는 그녀를 걱정하는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이런 추태를 부려서…….”
“아니, 괜찮아. 코루루, 너는 괜찮아?”
“흑… 아버지. 그놈은 진짜 괴물이에요.”
‘그런 것치곤 레헬도 코루루에게 얻어맞은 뒤통수가 제법 아팠던 것 같은데…….’
그 말을 했다간 코루루가 다시 정신 못 차리고 사고 칠까 봐 속으로 삼키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