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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28화 (228/324)

228화

엄숙한 분위기의 방 안에서 뒷짐을 지고 창밖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의 발아래로 흥건하게 흐르는 피로 깨끗했던 구두가 더럽혀졌다.

알례리는 찜찜한 표정으로 구치소 안쪽을 연신 힐끔거리는 창밖의 신재언을 쳐다보며 괴로운 심정을 억눌렀다.

알례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허탈감과 아쉬움에 진저리 쳤다. 위대하신 아버지를 지척에 두고도 그냥 떠나야 했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피로 낭자한 구치소 내 사무실 안에서 그는 뒷짐을 지고 고깃덩이가 된 ‘어떤 것’을 발로 툭툭 치면서 중얼거렸다.

“나의 아버지께 무례를 저지른 걸 봐 버려서, 내가 흥분해 버렸군. 편하게 죽여 버렸어…….”

짧게 신음을 흘린 그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낡고 허름한 구치소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런 쓰레기통 같은 곳에 아버지께서 며칠이나 계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건 불충이자 불효였다. 이 사실을 아버지의 곁에서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냥 지켜보고 있었을 형제들 또한 못마땅했다. 역시 아버지의 곁에는 자신이 있어야 했다.

어리석은 아버지께서는 잔정이 많아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일례로 그깟 쓰레기들 몇 데리고 실험한 일로 크게 화를 내며 자신을 내치셨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위대하신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 마음은 다른 형제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다른 형제들은 그들이 선택받은 신의 자식들이고 자신과 동등한 위치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자신이 없어진 것만으로 아버지께서 고충을 겪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알례리. 너는 다툼이 싫어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을 텐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신재언은 알례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알례리는 아버지의 그런 점이 미숙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마피아인 아버지가 두려워서, 혹은 깨끗한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문을 뛰쳐나간 게 아니었다. 야망은 있었으나 능력이 없었고 지배하고 싶었으나 힘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알례리와 무척 닮은 친형, 레비아노 또한 야망과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사내였다. 알례리는 그런 형이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다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라 여겨 도망친 것이다.

그는 레비아노에게 조용히 쥐 죽은 듯 살 테니 제발 죽이지만 말아 달라고 비굴하게 빌었다. 그렇게 나가면 레비아노가 살려 줄 것이라고 믿은, 무능한 남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 그에게 악의 신이 찾아와 힘을 넘겨주었고, 응당 그가 가져야 했을 권력까지 모두 손에 안겨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알례리가 착하고 다툼을 싫어해 마피아가 되기를 거부했다고 기억하는 재언의 생각은 그를 각성시켜 준 행동에 대한 도피나 마찬가지였다.

약삭빠른 알례리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맹목적인 충성심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가졌듯 신재언 역시 자식들을 향해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 다신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명령만 내린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그는 대한민국의 구치소에서 검사와 경찰을 죽인 것도 모자라 아주 여유롭게 뒷짐 진 채 서 있었다.

얼굴을 숨길 생각도 없이 창가에 서 있는 알례리의 뒤쪽에서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검사도, 경찰도 다른 관계자도 아닌 죄수복을 입은 남자였다.

짙은 분홍색 머리, 눈 밑에 별 모양의 문신을 새긴 특이한 행색을 한 남자는 방 안에 있는 알례리를 보고도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고깃덩어리들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알례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가 신재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창가에서 떨어졌다.

“아버지와 만난 소감이 어땠나?”

알례리의 물음에 남자가 짙게 미소 지으며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후훗.”

신재언과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짙은 검은색 아이라인에 눈꺼풀에 붉은색 섀도까지 진하게 화장을 한 얼굴이었다. 남자가 분홍색 립스틱을 꺼내 바르며 우아하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기 말이 맞았어. 그의 위로 별들이 빠르게 움직이더군. 굳이 표현하자면 퍼-펙-트했다고. 만약 자기가 원한다면 약간의 자극만 줘도 다시 구현해 낼 수 있을 거야. 아-옌서의 멸망서대로.”

남자의 말을 들으며 턱을 매만지던 알례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아버지께서 완벽해지시길 원하지.”

그가 말을 이어 갈 때마다 목소리에 담긴 격정이 점점 커져서 마지막에는 비명을 토해 내듯 고함으로 변했다.

“잔정이 많은 아버지께서는 아직 불안정하시지! 아아, 형제 중에 나만큼 아버지를 위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교주를 통해 봤던 ‘완벽한 아버지’를 위해, 우리도 힘을 모아야 하거늘. 소꿉장난에 취해서 그릇된 행동들이나 하고 있어. 완벽한 아버지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해!”

방금까지도 우아하고 차분했던 알례리의 분위기가 광기로 물들어 갔다. 그의 눈빛은 기이하게 번뜩였고 결국 그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숨을 격하게 몰아쉬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차분하게 변해선 숨을 고르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알례리는 평소에 감정표현이 적고 이성적인 보-스였지만 아버지에 관한 일에서만 늘 이성을 잃고 흥분했다.

분홍색 머리의 남자는 그런 알례리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말없이 구경하기만 할 뿐이었다.

별을 읽는 예언가는 능력자로 구분되진 못하지만, 그는 지금 세계에 몇 없는 희귀 이종족인 은요불족이었다.

하피나 머메이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힘을 가진 은요불족은 별의 조각이 눈에 들어갔다는 선조에게서 이어져 온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하늘과 땅의 기운, 그리고 별들의 움직임을 읽어 예언을 하는 능력이었다.

별들을 움직이는 ‘상위급 존재’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희귀한 능력이었기에 예전엔 인간들에게 노예나 전리품 취급을 받기도 했다.

다만,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종족으로서의 특징이 없는 데다 숲속에 숨어 살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내기란 매우 희박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죽는 순간 몸이 불타올라 없어지면서 별빛이 박힌 듯 아름다운 보석 같은 눈알을 남긴다고 하여 ‘광안[光眼]’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니 별을 읽는 예언가… 어서 교차점을 찾아내. 아버지의 완벽한 각성을 위해 너희들에게 힘을 준 것이니까.”

알례리가 비틀거리며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기다란 복도 바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교도관들을 지나며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나의 아버지……. 그런 당신도, 저는 사랑합니다.”

그의 중얼거림은 밖으로 나가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 마약왕이 반드시… 완벽한 당신을 찾아드릴 테니까요. 네… 당신은 더욱더 완벽해질 수 있어요……. 나의 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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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이 잡힌 뒤 며칠 동안의 휴식 기간을 가지고 업무로 복귀한 재언을 반기는 건 김 대리의 해고 소식이었다. 그 사달을 냈으니 원래 평판도 안 좋았던 김 대리에게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내린 것이다.

수고했다며 마흔네 번째로 두부를 건네는 임 대리에 이어 서은경 주임과도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저는 그냥… 신 주임님이 헬스장에서 몰래카메라를 발견했으니 가지 말라고 말했던 걸 진술했을 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곡해되어서 신 주임님이 누명을 썼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김 대리님도 갑자기 토막 난 시체를 봤다느니 어쨌다느니……. 황당하기 그지없었어요.”

재언은 서 주임이 건네주는 마흔다섯 번째 두부를 쇼핑백에 주섬주섬 챙겨 넣으며 김 대리의 해고 소식을 아직 실감하지 못했다.

‘진짜로 잘렸다고? 이대로 인연이 끝나는 건가? 진짜? 내 인생 중 가장 큰 악연이었던 인간이… 영원히 회사에 빌붙어 있어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 반짝이는 머리를 볼 줄 알았는데 진짜 의외네…….’

다른 직원들도 재언의 자리까지 찾아와서 혐의가 풀릴 줄 알았다며 다독이는 분위기였다.

재언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김 대리와의 악연이 이대로 정말 끝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다 ‘엔레이드맨의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위험하고 쓸데없는 능력을 가진 그를 눈앞에서 감시하는 게 더 나았던 건 아닌지 고민했다.

김 대리의 능력은 엔레이드맨에게 정말 위험했다. ‘둠(doom)’이라는 결계가 없으면 엔레이드맨은 열여섯 살의 어린 소년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에서 김 대리에게 해고를 통보했지만, 이직을 고려해 유예기간을 석 달 정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 대리는 해고 통보받은 다음 날부터 무단결근 중이었다.

혹시 모를 일이라 재언은 조각난 장난감에 김 대리를 몰래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조각난 장난감이 의외의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김 대리는 집에 없었다. 그의 집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했다.

레드-헬-파이어를 제외하고 엔레이드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김 대리가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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