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김 대리가 해고당하고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재언의 일상은 놀라울 만큼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축하할 일이 생겨 부서 내 분위기가 매우 좋아졌다. 저번에 진행했던 본사 차원의 마케팅 협업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임 대리가 과장으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에 한국 지사의 임원과 사귀는 사이라는 소문이 다시 나돌았다. 하지만 재언이 알기로 정말 터무니없는 헛소문일 뿐이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문의 주인공인 임원은 결혼한 지 15년이 넘었음에도 아내와의 사이가 좋아 잉꼬부부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까지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저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 별다른 잡음 없이 사이가 항상 좋으니 평가가 좋았다. 더욱이 승진을 두고 경쟁해야 할 연차가 비슷하고 같은 직급의 동료가 없어진 것이 우연한 기회로 찾아온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김 대리의 해고가 이르게 불러온 행운이었다.
“병원에 가서 정신질환이 생겼다고 진단서를 떼어 왔어야지. 그러면 보상금을 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임 과장이 재언을 쳐다보며 아쉽다는 듯 투덜거렸다. 재언이 승진 기념 선물로 평소 가 보지 못했던 카페에서 한 조각에 7,500원이나 하는 조각 케이크를 다섯 조각 사서 포장해 건네준 참이었다.
“그래도 형을 선고받은 게 아니었으니까요. 직장에서 잘린 것도 아니고……. 뭐, 사흘 정도는 꼼짝없이 갇혀 있었지만, 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요. 뭐, 살짝 요상한 일이 있을 뻔하긴 했어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튼, 그 인간 때문에 정말 욕봤다니까. 윤정이도 육아휴직 끝나고 돌아오면 엄청나게 좋아할걸. 진작 잘랐어야 했는데 회사는 대체 그런 인간을 왜 계속 안고 가려 했는지…….”
눈앞에 놓인 음료를 격렬하게 한 모금 들이켠 임 과장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또다시 김 대리의 험담이 시작될 것이라는 신호였다.
그녀는 이전에도 딱히 눈치 보는 편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이미 퇴사한 사람이라며 험담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재언도 퇴사한 사람에 대한 뒷이야기가 사내의 가장 뜨거운 이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백번 동감하는 바였기에 간간이 호응해 주며 김 대리의 험담으로 점심시간을 보냈다.
사흘 동안 죄 없이 구치소에 수감된 것의 보상금은 고작해야 53만 원이었다. 금액을 들은 모두가 정신감정 진단서를 제출하면 더 높은 보상금에 병원비까지 받아 낼 수 있다고 입을 모아 조언했다. 하지만 여러 의미로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바쁘기도 해서 병원에 갈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구치소에서 본 마약왕이 헛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심란해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다음 날 토막살인사건과 관련된 일로 재언이 수감되었던 구치소를 방문한 경찰관과 검사 두 명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는 뉴스 기사가 아주 짤막하게 뜬 것을 보고 확신했다.
저녁 뉴스에서도 고작 1분가량 자막으로 흘러가는 게 끝이었다. 거기다가 범인이라고 잡힌 자는 구치소에 수감된 용의자 중 한 명으로 능력자인 공범과 손을 잡고 탈주하려다 살해한 것이라고 외신기사에만 올라왔다.
자신을 고문하려 했던 쓰레기 검사는 어떻게 되어도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다른 무고한 이들의 목숨까지 앗아 갔을지도 모르기에 마음이 매우 불편해졌다. 한 명의 빌런에 의해 공권력이 이렇게까지 침해될 수 있나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재언은 마약왕이 이런 식으로 엇나간 것을 확인할 때마다 그를 어떻게 저지해야 할지 짐작도 할 수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쫓아낸 자식을 붙잡아 놓고 설교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할 수 없었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그리고 이번 토막살인사건의 진범인 박찬수는 사지가 괴사하는 바람에 형이 집행되기 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급속으로 냉동되었다가 녹기를 여러 번 반복한 탓이었다.
코루루가 레헬에게 덤볐을 때 둘의 능력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박찬수가 진범으로 밝혀지면서 헬스장 내에 몰래카메라와 오픈 채팅방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오픈 채팅방에 있던 이들 또한 몰래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을 공유한 것에 대해 법적 처벌과 공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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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임 과장님의 승진을 축하하고 신 주임이 누명을 벗고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걸 축하하며 건배!”
박 팀장의 외침에 가게에 있던 사원들이 각자 맥주잔, 소주잔, 음료 잔, 물컵 등을 들고 다 같이 건배를 소리쳤다.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웠던 재언은 주는 대로, 건배하는 대로 거절하지 않고 술을 전부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술이 쭉쭉 들어갔다. 평소였다면 실수할 것이 두려워 항상 조절하며 마셨는데, 결국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고 말았다.
회사 동료의 승진 축하 회식 때문에 늦게 끝난다는 말을 들은 차민재가 집에 갈 때 꼭 전화 달라고 했지만, 인사불성이 된 신재언에게 그럴 정신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눈을 뜨니 침대 위였고 어젯밤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머리야…….’
재언은 머리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떴다. 그래도 귀소 본능이라는 게 정말로 있었던 건지 익숙한 천장인 걸 보니 집인 모양이다.
길거리에서 쓰러져도 집으로 데리고 와 줄 자식이 일곱 명이나 있는 믿을 구석들 덕분에 이성을 잃고 술을 마신 것도 있었다.
숙취로 머리가 욱신거리고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누워 있는 상태로 눈을 깜박이던 재언은 입을 크게 벌려 하품한 뒤 기지개를 켰다.
다리를 쭉 펴고 엉덩이를 든 상태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집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음? 뭔가 이상한데?’
재언이 차민재와 함께 자는 날이 많아지면서 침대를 큰 사이즈로 바꾸긴 했어도 오늘따라 이상할 만큼 컸다. 마치 자기 몸이 작아진 기분이었다.
재언이 조심스럽게 상체를 들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의 허락 없이도 이 집에 멋대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집의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는 애인인 차민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차민재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머리를 털면서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지 그의 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재언 씨, 어제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부르지 그랬어요.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질 않아서…….”
침대 위로 시선을 돌린 차민재가 하던 말을 멈추고 멀뚱히 신재언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재언 씨? 재언 씨.”
그가 화장실 문 앞까지 가더니 문을 열고 안쪽을 확인했다. 당연히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침실 바닥엔 신재언이 간밤에 입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핸드폰과 차 열쇠, 지갑도 모두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걸 보면 밖에 나간 건 아니었다.
침대에 앉아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재언을 모른 척하는 듯했던 민재가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옆으로 치웠다. 체어맨이 만들어 낸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민하는 그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가 버릴까 걱정스러워진 재언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야옹-”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자기 입에서 난 소리가 맞는지 귀를 의심했다.
‘왜 멀쩡한 서른한 살 남자가 고양이 흉내 따위를 내는 거지?’
정신적인 타격을 크게 입은 재언이 얼른 앞발을 들어 입을 가렸다. 이상한 느낌에 시선을 내리니 털로 수북한 분홍색 젤리가 보였다.
고개를 완전히 내려 살펴보자 튼튼한 근육으로 뒤덮였던 복근은 어디 가고 물렁물렁한 뱃가죽이 보였다. 아니, 그것도 베이지색이 섞인 흰색 털로 뒤덮인 뱃살이었다.
“…웬 고양이지.”
재언이 얼이 빠진 사이 차민재가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흰색 고양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다른 일반적인 고양이에 비해 몸집은 두 배인데, 딱히 비만으로 보이진 않았다.
전체적으로 흰색 털을 가졌고 얼굴과 배 쪽에 얼룩처럼 베이지색, 그리고 드문드문 짙은 갈색 털이 눈에 띄었다. 선명한 푸른색의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는 뭐에 그리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참을 야옹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야옹, 야옹?”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온 고양이가 차민재를 올려다보며 앞발을 휘둘렀다. 재언이 주워 온 길고양이인가 싶었지만, 털이 워낙 고르고 윤기가 흘러 부드러워 보이는 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게다가 고양이 주제에 잘 생겼다. 긴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깜박이는 고양이는 각진 코에 숫자 3과 비슷하게 봉긋 튀어나온 입까지.
“…….”
그뿐만 아니라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진 고양이었다. 고양이란 동물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편인 차민재의 마음이 움직일 만큼 사랑스러움을 잔뜩 품고 있었다.
차민재가 허리를 숙여 고양이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고양이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민재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차민재가 무게가 제법 나가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서자 고양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거울과 자기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 모습에 차민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재언 씨?”
“…야-옹…….”
고양이가 힘은 없지만, 더없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예쁘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