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술에 취해 자고 일어났더니 옆에 엄한 남자가 누워 있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은 한 적이 있어도 고양이로 변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재언은 앞발을 들어 연한 분홍색 젤리를 확인하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끄르릉.”
분명히 신음처럼 한숨을 쉬었을 터인데 자신의 입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횡격막을 통해 울렸다. 그러자 고양이가 된 신재언을 앞에 두고 치열하게 싸우던 빌런 일곱 명과 히어로 한 명이 고개를 돌렸다.
다들 재언의 앞에서는 얌전하게 굴려는 모양인지 능력을 사용하진 않았다. 하지만 워낙 험악한 분위기에 돌발상황이 벌어질까 봐 재언 혼자 조마조마할 뿐이었다.
“이 귀여운 아버지는 우리가 데려가겠어! 왜 자식들을 놔두고 네놈 집에 데려가야 하는데?”
“아아, 너무 귀여우십니다, 아버지…….”
엔레이드맨과 코루루가 레헬의 앞에서 눈에 불을 켰고, 나머지 자식들은 고양이가 된 재언을 빙 둘러싸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고양이치고 10kg이 넘는 거대 고양이임에도 무척 예쁜 미모에 자식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얼굴이었다.
“애인인 내가 데려가야지 누가 데려가? 네 녀석들과는 달리 최고급 사료에 간식도 준비되어 있으니 꺼져.”
말싸움이 길어지면서 레헬의 눈빛이 ‘이 고양이를 내가 데려가지 못한다면 세계를 멸망시킬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번뜩였다.
이러다 진짜로 세계가 멸망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재언은 자신이 어쩌다가 고양이가 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전에 눈앞의 싸움부터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싸우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나는 그냥 이 방에 혼자 있어도 되니까 밥이랑 물만 준비해 줘. 너희는 내가 고양이가 된 원인을 밝히고 내가 사람으로 돌아갈 방법이나 찾아 줘. 이미 한 번 합을 맞춰 본 적 있으니까 또 나를 돕는다 생각해서…….’
분명히 재언이 하려던 말은 이런 내용의 설교였다.
“야옹- 애오옹-.”
하지만 그들의 귀에 들리는 건 방정맞게 우는 고양이의 목소리였다.
신재언의 고양이 모습에 이미 세계 멸망을 시킨 전적이 있는 한 명과 현재 세계 멸망을 도모하는 일곱 명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신재언이 화를 내려고 해도 고양이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행동으로만 보이는 탓에 그들 사이가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험악해져 갔다.
“야옹- 야옹- 야오옹.”
특히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앞발을 혀로 살짝 핥았던 것뿐인데 그걸 구경하는 놈들이 다른 의미로 뒤집어졌다.
‘진정해! 진정해, 이 자식들아!’
그나마 이성적일 거라고 생각한 엔레이드맨의 옷깃을 손톱으로 잡아당기면서 제발 멈춰 달라고 외쳐 봤지만, 그의 눈빛도 정상은 아니었다.
“아버지도 우리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레드-헬-파이어.”
게다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긴 행동에 아버지가 자신들을 선택했다고 착각한 엔레이드맨이 기세등등해진 표정으로 차민재를 쳐다봤다. 레헬과 싸워서 반죽음까지 몰려 본 적도 있으면서 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재언은 차민재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걸 보고 그대로 뒀다가는 정말로 큰일 날 것만 같아 침대에서 내려왔다.
자식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반, 역시 애인하고 같이 있고 싶은 엉큼한 마음 반이었다.
제 몸보다 높은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착지하자 그것만으로도 자식들이 손뼉을 치며 놀라워했다.
“오오, 아버지. 정말 완벽한 착지였습니다.”
“용맹하게 뛰어서 우아하게 착지하시다니, 역시 전지전능하신 아버지께선 위대하십니다.”
재언이 뒷발을 쳐들고 배를 핥아도 위대한 뜻이 있을 거라며 열광할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애써 무시하며 신재언은 차민재에게 다가가 그의 종아리에 몸을 비비적거린 뒤 그만 좀 싸우라는 의미로 목소리를 냈다. 야옹거리는 소리일 뿐이지만, 충분히 그의 생각은 전달될 터였다.
그에 차민재가 뿌듯하게 미소 지으며 신재언을 번쩍 들어 올려 안았다. 분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존중해 물러나는 자식들의 눈에 미련이 뚝뚝 흘러넘쳤다.
차민재는 그 길로 재언을 안은 채 재빠르게 집 밖으로 튀어 나갔다. 재언이 자식들을 따라가겠다고 할까 봐 도망칠 수 없도록 강하게 끌어안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재언 씨, 기분 좋아요?”
운전석에 앉은 차민재의 품에 안긴 상태에서 목과 뺨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길을 받았다.
“평소에 재언 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좋은지 싫은지도 모르겠는데……. 고양이 모습으로는 조금 알 것 같네요.”
처음 몸을 쓰다듬을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귀와 목덜미를 쓰다듬자 노곤해지는지 신재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고양이의 온몸에서 고롱고롱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오토바이의 모터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재언도 그 나름대로 민망한 기분에 멈추고 싶은데 멈춰지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그에 반해 차민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신재언의 목덜미를 계속 쓰다듬었다. 그러다 고양이의 분홍색 앞발을 들어 올려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귀여워서 좋지만, 키스를 할 수 없어서 불편하네요. 대체 어디서 이런 저주를 받아 온 건지부터 천천히 찾아보자고요.”
차민재가 빙긋 웃으며 재언의 주둥이에 살짝 손가락 끝을 댔다.
그 후로 운전하면서 고양이를 끌어안는 건 운전자와 고양이 둘 다 위험한 노릇이었기에 차민재는 신재언을 조수석에 앉혀 두고 조심스럽게 액셀을 밟았다.
얼마나 조심하던지 어느 도로에서도 30km 이상을 밟지 않았다.
그러다가 중간에 빌런이 튀어나와 도로를 장악하고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감히 자신의 안전 운전에 방해가 되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며 눈에 불을 켠 레헬의 불꽃에 빌런은 1초 만에 타 버렸다.
이런저런 해프닝을 최대한 못 본 척하며 재언은 조수석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바람에 입을 벌려 하품했다.
고양이로 변했어도 오감은 인간의 것 그대로인지 살랑살랑 불어오는 꽃향기나 옆에서 진중한 표정으로 운전하는 차민재의 얼굴이 세세하게 보이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재언은 햇볕에 노곤해지는 머리를 다잡고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워낙 술에 취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점점 무언가가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술자리가 해산되고 나름대로 정신을 차린답시고 중간에 편의점에 들러 숙취해소제와 음료수를 샀었다. 그걸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우고 집에 와 옷만 벗어 던지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 편의점에서 약을 산 게 잘못됐던 건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재언의 꼬리가 좌우로 느릿하게 휙휙 돌아갔다. 자신도 모르게 앞발을 핥는 그의 눈도 세모꼴로 변하고 앙다문 입술 사이로 어금니가 보였다.
‘뭐… 사람이 벌레로도 변하고 보석으로도 만들 수 있는 능력자들이 판을 치는 세계인데……. 그런데 내가 어제 숙취해소제라고 먹은 게 대체 어떻게 저주 아이템으로 바뀌었던 거지. 그리고 돌아가는 방법을 얼른 찾아야 할 텐데…….’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해 차를 세운 뒤 다리를 안으로 말아 넣고 네모난 자세로 앉아 있는 재언 고양이를 감상하던 차민재가 그를 번쩍 들어 올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를 안는 것처럼 뒤집어 안으니 흰색과 베이지색 털 안쪽으로 분홍색 뱃살이 보였다. 차민재는 이 자리에서 고양이의 말랑말랑한 배에 얼굴을 묻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겨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익숙한 거실 바닥에 내려선 재언은 한숨을 돌리며 소파 위로 폴짝 뛰어올라 몸을 둥글게 말아 앉았다.
어제 술을 거하게 먹어서 그런지 목이 마르다고 생각하던 차, 민재가 깨끗한 그릇에 물을 담아 왔다.
차민재는 물을 할짝할짝 마시면서 목을 축이는 재언을 구경하다가 고양이의 엉덩이를 살짝 토닥였다.
“재언 씨, 그럼 쉬고 계세요. 저도 이 근방에서 비슷한 저주를 받은 사람이 있는지 찾아볼 테니까요.”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킨 민재가 무언갈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신재언이 당한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 사무실에 연락할 모양인 듯했다.
그런 애인의 뒷모습을 보던 재언은 다리를 쭉 펴고 편안하게 앉아 왜 하필 고양이가 된 걸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소파 아래에서 무언가가 전광석화처럼 뛰쳐나와 재언의 앞에 위풍당당하게 섰다.
“너 누구야? 왜 내 구역에서 당당하게 쉬고 있는 거야? 내 허락은 받았어!?”
“…어?”
근엄한 표정으로 재언의 앞에 나타난 건 신재언 고양이의 하얀 털 색과 정반대의 색을 가진 검은 고양이, 배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