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재언은 빳빳하게 서 있는 검은색 꼬리와 저도 모르게 살랑거리는 제 하얀색 꼬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볼품없이 짧고 털이 듬성듬성 나 있는 배추의 검은색 꼬리와 다르게 재언이 가진 꼬리는 베이지색에 갈색 점이 박혀 있는 탐스러운 털이 특징적이었다. 예전에 봤던 털이 긴 고양이만큼 꼬리가 복슬복슬하진 않아도 저 검은색 꼬리보다는 윤기가 자르르 흘러 보드라워 보였다.
재언이 가만히 있자 배추가 민들레 홀씨같이 푸석푸석하고 짧은 검은색 꼬리를 바짝 세워서 채찍을 가르듯 바닥에 착착 내리쳤다.
어지간히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세모꼴이 된 눈을 가득 채우는 확장된 동공, 금방이라도 으르렁거릴 듯 세운 앞니까지, 배추의 심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신재언 고양이의 반도 안 되는 작은 고양이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용맹하게 외쳤다.
“너 누구냐니까? 왜 허락도 없이 내 영역에 있는 거야?!”
조그만데 앙칼지긴 더럽게 앙칼지다.
그런데 그 모습마저 귀여워서 재언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천방지축 검은 고양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낭패를 본 경우가 많았었다. 그런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이건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몰랐다.
검은색 홀씨 같은 털을 바짝 세워 경계하던 배추가 결국 입을 벌리고 하악질을 했다. 심기 불편한 태도를 감추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작은 송곳니마저 귀여워서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뭐, 태어난 지 3개월밖에 안 된, 자신의 앞발보다 조금 클 뿐인 새끼 고양이가 지금의 재언에게 어떤 위협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잔뜩 경계하는 새끼 고양이를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기에 진정시킬 요량으로 재언이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작은 움직임에도 배추가 화들짝 놀란 듯 펄쩍 뛰면서 꼬리를 동그랗게 말더니 소파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재언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아래쪽을 쳐다봤다. 검은색 털 뭉치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게 보였다.
“어이구… 괜찮니?”
걱정하는 말을 건네며 재언이 소파 아래로 뛰어내렸다. 우아하기 짝이 없는 이 완벽한 착지를 다른 자식들이 봤다면 아버지께서는 고양이가 되었어도 기품이 넘치신다며 온갖 주접을 다 떨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아마도 아버지를 레헬 따위에게 빼앗겼다는 분함과 슬픔에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지 배추는 벌떡 일어나 소파 아래로 내려온 재언을 향해 납작하게 몸을 낮추고 갸르릉거렸다.
그런 새끼 고양이의 모습이 오히려 귀여워서 재언 고양이의 꼬리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느릿하게 살랑거렸다. 풍성한 꼬리가 움직이면서 풍기는 체취에 배추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바짝 다가와 재언의 주변을 킁킁거리며 돌아다녔다.
“당신, 내 영역에 가끔 오는 쫄따구의 친구잖아?”
“…쫄따구?”
“응. 나한테 밥 갖다 바치는 거대 고양이.”
‘…그 거대 고양이가 차민재라는 것인가.’
거기다가 밥을 갖다 바치는 쫄따구라니, 새끼 고양이는 차민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왔던 것인가.
세상 무서울 게 없는 히어로를 부하 취급하는 3개월짜리 간 큰 고양이가 바로 여기 있었다. 차민재가 고양이로 변하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인간이었을 때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인지 신재언의 체취를 기억한 배추는 금방 경계를 풀었다. 배추는 낯선 놈이 제 영역을 침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한 듯했다.
이윽고 배추는 다시 소파 아래로 들어갔다.
“거긴 왜 들어가는 거야?”
평소에도 의아하다고 여겼던지라 이번 기회에 물어볼 참이었다. 신재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야옹거렸다.
“여기 숨어 있다가 내 쫄따구를 놀라게 해 줄 생각이거든. 그놈은 놀자고 덤벼도 도통 놀아 주질 않는단 말이야!”
재언의 물음에 배추가 앙! 냥! 거리며 투정 부렸다. 소파 아래는 재언 고양이가 들어가기엔 좁았지만 작은 새끼 고양이가 들어가 숨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안에 들어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새끼 고양이를 기다리며 재언은 앞발을 들어서 쳐다보다가 혀로 핥았다.
살짝 움직였다고 온몸의 털이 엉망으로 변해 있었는데, 그 느낌이 못 견디게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무아지경으로 털을 고르던 재언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감감무소식인 배추를 찾아 소파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배추야… 뭐하니?”
살짝 보이는 짧은 꼬리를 앞발로 턱 잡고 소파 밖으로 질질 끌고 나오자 배추가 볼록 튀어나온 배를 뒤집은 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거대 고양이를 놀라게 하겠다느니, 같이 놀겠다느니 외치던 5분 전의 검은 고양이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재언은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배추의 목덜미를 입에 문 채 소파 위로 단숨에 올라갔다. 그리고 편하게 자리 잡고 앉아 앞발 사이에 배추를 끼고 소파 아래의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엉망이 된 검은색 털을 혀로 삭삭 핥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고양이의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검은 고양이는 자신을 쓰다듬는 혀에 낑낑 울다가 재언 고양이의 품 안으로 꾸물꾸물 파고 들어갔다.
그러던 중 사무실과 통화를 끝낸 차민재가 방에서 나와 소파 쪽으로 다가오다가 재언의 풍성한 털 사이에 삐죽 튀어나온 검은 고양이의 엉덩이와 꼬리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조용히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찰칵거리며 사진을 몇 방 찍더니 소파에 앉아 재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젯밤 재언 씨의 동선을 파악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짐작은 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야아옹?(짐작 간다고요?)”
“내일 만나기로 했으니 재언 씨도 함께 갑시다.”
그렇게 말하면서 차민재는 흰색 털 사이에 몸을 묻은 검은 고양이를 힐끔거렸다. 저도 모르게 앞발을 쭉 내밀고 뒷발을 편안하게 뻗은 자세를 취한 재언 고양이의 하얀 털 사이로 분홍빛 살결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흠… 재언 씨 배에 얼굴을 묻어도 됩니까?”
“애옭…….”
재언이 격렬하게 거부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차민재는 마성을 가진 뱃살에 얼굴을 묻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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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잠에서 깬 새끼 고양이가 재언 고양이의 등 뒤에 올라타더니 목덜미를 앙앙 물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데굴데굴 굴러와 재언의 앞발을 껴안고 뒷발로 팡팡 내려쳤다.
“너 마음에 들어!”
“…….”
마음에 든다면서 왜 뒷발로 내려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배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뒷걸음질 치며 살짝 물러나더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엉덩이를 씰룩이다가 재언을 향해 폴짝 뛰어들었다.
새끼 고양이의 공격은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워낙 방정맞게 촐싹거리는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고양이 모습이어도 속은 사람인데, 에너지가 넘치는 새끼 고양이와 어떻게 놀아 줘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그래서 재언은 덤벼 오는 배추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물고 휙 내팽개쳤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더 신이 난 배추가 한참을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다가 다시 돌아와 재언을 괴롭혔다.
새끼 고양이는 밤새 재언의 품 안에서 푹 잔 덕분인지 체력이 아주 쌩쌩했다.
“아, 거대 고양이다. 잘 잤어?”
재언 고양이를 한참이나 괴롭히며 놀던 배추가 잠에서 깬 차민재를 보자마자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침대 높이가 새끼 고양이에게는 꽤 높은 편인데도 어설프게 폴짝 뛰어 올라간 배추를 보던 재언도 한 번에 침대 위로 올라갔다.
사실 인간 한 명과 고양이 두 마리가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을 청했다. 분명 처음엔 차민재의 허벅지에 붙어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잤었다. 그런데 일어나서 보니 자신과 배추가 침대에 가로로 누워 자고 있었다.
인간이었을 땐 잠투정이 그리 심하진 않은데 의문이었다. 평균보다 크고 긴 재언 고양이 때문에 차민재가 구석까지 밀려나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이야옹-.”
그런 재언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배추가 차민재의 가슴 위로 올라가며 가녀리게 울었다. 턱에 머리를 부딪치며 그릉 대는 고양이의 애교를 익숙하게 받으며 일어난 차민재가 고개를 돌려 신재언을 쳐다보고 미소 지었다.
고양이 모습임에도 머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게 절로 웃음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재언 고양이를 곤란하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필사적으로 외면하려 했지만, 동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배변 활동이 재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껍데기는 고양이라도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있는데 애인의 앞에서 고양이용 모래 화장실에서 배변 활동을 하는 것은 수치스러웠다. 게다가 그걸 차민재가 직접 청소해야 한다는 것도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를 쥐어짜 내 겨우 생각해 낸 방법은 어떻게든 변기에 볼일을 보고 조심조심 물을 내린 뒤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한 번 볼일을 본 것뿐인데 온몸에서 진이 다 빠질 만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렇게 볼일을 해결하고 나니 남은 건 식사였다. 오감이 인간이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기에 재언은 고양이용 사료 냄새가 역하고 식욕이 나지 않아 계속 고개를 흔들며 단식 농성을 벌였다.
차민재는 그래도 소화기관이 고양이처럼 변했을지도 모르는데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었다가 잘못되면 어쩌냐고 걱정하며 고양이용 사료를 권했다.
그래도 재언이 뜻을 굽히지 않자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닭가슴살에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고 삶아다가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재언은 맛이 밍밍하긴 한데, 사료보다는 훨씬 먹을 만했기에 허기라도 면하자는 마음으로 전부 먹어 치웠다.
그렇게 식사와 배변 활동을 힘겹게 끝낸 재언을 이동장에 넣고 차민재가 현관으로 걸어가자 전투적으로 사료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던 배추가 달려왔다.
“어디가? 사냥 가?”
“…….”
“맛있는 거 많이 가져와. 저 거대 고양이는 바보라서 가끔 빈손으로 돌아올 때가 많거든!”
눈을 동그랗게 뜬 배추가 입을 크게 벌리고 야옹야옹 울었다. 차민재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걸 배추는 사냥 나갔다 오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가 보다.
재언이 웃으면서 배추를 향해 앞발을 흔들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차민재가 재언을 데려간 곳은 반려견 동반 입장이 가능한 룸카페였다.
그곳에서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마리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아직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차민재가 인사를 건네고 이동장 문을 열어 주자 안 그래도 답답했던 재언이 잽싸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다 재언은 눈앞에 있는 20대 청년이 자신을 고양이로 만든 장본인이 맞나 잠시 당혹스러워서 고개를 갸웃했다. 흉악한 저주를 퍼부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자가 신재언 고양이를 보더니 다짜고짜 소리쳤다.
“이 고양이입니까?! 제 약을 훔쳐 먹은 사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