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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33화 (233/324)

233화

현재 사람의 말을 할 수 없는 신재언 고양이는 뭉툭하고 동그란 앞발로 노트북 키보드를 우다다다 누르며 아까 있었던 일을 최대한 상세하게 써 내려갔다.

오타가 자주 나 다시 쓰는 일이 반복되는 바람에 글을 완성했을 땐 진이 다 빠져 버렸지만 말이다.

예전에 인터넷에서만 보았던 고양이가 노트북을 두드리는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박문석은 눈물을 삼키며 재언의 키보드질에 연신 손뼉을 쳤다.

서른이 넘은 성인으로서 자신이 뭘 할 때마다 귀엽다고 환호하는 꼴이 재언은 썩 유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마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노트북 화면을 진지하게 노려보며 타자를 치고 있다면 자신도 진귀한 구경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박문석은 재언 고양이가 노트북을 사용하는 걸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이윽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는 노트북 화면 속 내용을 보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둥이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며 기운이 없어 보였던 것도 억지로 데려와서가 아니란 걸 드디어 알았다. 심지어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여태까지 바깥 생활이 그리워서 기운이 없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편해서 그런 거였다니…….”

박문석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창가에 늘어지게 누워 있던 막둥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폴짝 뛰어내려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와 몸을 박문석의 종아리에 비비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야옹.(왜 울어?)”

막둥이가 당신을 걱정하고 있으며 위로 중이라고 써 주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런 막둥이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은 박문석을 보자니 그런 말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감동은 감동이고 울음이 멎었음에도 막둥이를 끌어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박문석을 보며 재언이 불만 어린 목소리를 냈다.

“먉!”

그런데 차민재가 그런 재언을 내려다보고 눈이 마주쳤음에도 어깨를 으쓱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묘하게 느긋하고 너그러운 듯한 그의 행동에 신재언은 뾰족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애옹-”

그러던 중 박문석의 품에 얌전히 있던 막둥이가 짧게 울며 버둥거렸다. 눈물을 그친 박문석이 슬픈 기분을 고양이를 끌어안은 걸로 전부 물리쳤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챈 탓이었다.

막둥이가 창가로 돌아가 눕는 걸 더 이상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지 않게 된 박문석은 이동장으로 들어가는 신재언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신재언 씨가 이렇게 도와주시는 걸 보니, 다른 팀원들의 걱정도 싸악 내려갈 것 같군요.”

“야옹? (다른 팀원들?)”

“이번 약 개발에 큰 도움을 준 두 명입니다. 그들도 저와 비슷한 걱정거리를 가진 분들이시거든요. 신재언 씨가 약을 홀라당 훔쳐 먹었다고 했을 땐 경찰에 신고한다느니, 고소한다느니, 돈을 청구하겠다느니 하며 난리를 치긴 했지만……. 이렇게 도와주시는 걸로 이번 일은 없던 셈 쳐 주기로 해 주셨습니다.”

차민재와 박문석의 대화로 약값이 5억 원이나 한다는 걸 알긴 했는데……. 구치소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잡혀갈 순 없었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을 면해 줄 애인이 있다지만, 거기에 기대면 자신의 꼴이 우스워질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말을 전해 주기만 하는 일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으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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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재언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서른 중후반대의 여성이었다. 단발머리에 통통한 체형의 그녀는 신재언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대뜸 소리쳤다.

“귀여워!”

“…애옭.”

“엄청 귀엽네요. 코리안 숏컷은 아닌 것 같은데, 털이 엄청 길진 않네요. 어머, 어머.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나요?”

“15kg이었습니다.”

“세상에나!”

일반적인 고양이의 평균 몸무게는 5kg이고 커 봤자 8~9kg이라고 했으니 재언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들보다 월등하게 큰 편이긴 했다. 10kg인 강아지가 중형견에 속한다는데 그를 훌쩍 뛰어넘는 고양이는 흔하지 않았다.

“석 달 밤낮을 야근해 가면서 겨우 만든 약을 훔쳐 먹었다고 들었을 땐 정말 찾아가서 경찰서에 처박아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귀여운 걸 보니 봐주고 싶어지잖아요!”

그녀도 박문석이 재언 고양이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약이라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 모습을 보니 저희가 약을 제대로 만들긴 했나 봐요?”

“이분의 성함은 안유진 씨입니다. 지금 열두 살 정도의 강아지를 키우고 있어요.”

“애오옹?(그러면 그 강아지와 무슨 대화를 해야 하는 건가요?)”

박문석의 소개에 안유진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뒤 자신의 앞에 놓인 아이스티를 만지작거리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박문석이 말을 이었다.

“동물을 정말 사랑하셔서 유기견 보호센터에 꾸준히 기부도 하고 봉사 나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요즘 신경 쓰이는 강아지가 있다고 하셔서요. 벌써 석 달째 길거리를 떠돌고 다니는 강아지인데, 목줄을 한 게 주인이 잃어버렸거나 유기당한 것 같거든요.”

과연, 그녀도 그런 약 발명을 도와줄 만큼 동물을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말 못 하는 짐승을 학대하거나 아무 거리낌 없이 죽이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동물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안유진 씨가 신경 써서 밥을 챙겨 주긴 하지만, 바깥 생활이 마냥 평탄하진 않잖아요. 점점 수척해지고 아파 보이기 시작해서 구조한 뒤 임시 보호를 하거나 입양하고 싶어 하십니다.”

안유진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를 이어 말했다.

“제가 올 때마다 꼬리를 흔들고 반가워하긴 하는데 가까이 오진 않고, 주변만 맴돌다가 사라져요. 포획 틀로 포획하려고 해도 머리가 좋은지 조금만 수상하면 가까이 오지 않고요. 두 달째 허탕만 치는데 그 강아지가 대체 왜 그렇게 피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것이 지금 신재언 고양이가 혼자 담벼락에 앉아 있게 된 이유였다. 떠돌이 강아지에게 항상 밥을 준다는 곳에 미리 와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 멀리서 차민재와 안유진이 탄 차가 보이고 딱히 해코지당할 일은 없겠지만, 낯선 영역에 혼자 있으려니 몸이 저절로 긴장했다. 박문석은 나름 바쁜 사람이었기에 안유진에게 차민재와 재언을 데려다주고 협회로 돌아갔다.

“독구야~ 독구야~ 밥 먹자~”

안유진이 자연스럽게 차에서 내리며 사료가 담긴 통을 흔들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콧노래를 부르며 가볍게 뛰어왔다.

“밥이다~ 밥 먹자~ 배고파~ 밥 먹자~ 헤헤, 헤헤헤.”

회색빛의 꼬질꼬질 때가 잔뜩 탄 강아지였다. 신재언 고양이보다 작고 갈비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삐쩍 말라 있었다.

거기다 뒷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서 걸음걸이가 매우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목에 걸어 놓은 목줄이 작아져서 진물이 흘렀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에 안유진이 왜 계속 포획하려 하고 동물로 변하는 약을 원했는지 깨달았다. 독구의 모습에 재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펄쩍 뛰었다.

밥을 챙겨 주는 안유진을 좋아하지만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한다는 건 사실이었는지 밥그릇이 바닥에 놓여도 독구는 가만히 앉아 그녀가 떠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안유진이 차로 돌아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독구가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신나게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저기. 저 말이야.”

“웅?!”

독구가 자신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와 멀찍이 옆에 앉은 고양이를 보고 사료를 씹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경계하는 대상은 인간뿐인지 신재언을 보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가까이 다가와 코를 킁킁거리며 격렬하게 반겼다.

“와! 고양이다! 나랑 친구 하려고?”

“저기… 좀 떨어져 줄래……. 나도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지금은 저절로 몸이 경계하고 있어서 힘들거든.”

가까이서 본 독구의 몸 상태가 더욱 심각해 보여서 걱정스럽기도 했다. 뒤틀려 있는 뒷다리에 어떤 사고를 당한 게 분명했다.

앞발로 독구의 코를 꾹 눌러 떨어트린 재언이 본론을 꺼냈다.

“네 밥, 챙겨 주는 사람 알지?”

“알아. 친절해서 좋아.”

“널 구해 주고 싶어 하던데. 왜 계속 도망치는 거야?”

재언의 말에 독구는 안유진이 탄 차를 힐끔 보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날 무리에 끼워 주려 하는 건 알고 있어! 계속 밥을 챙겨 주잖아.”

“그럼 믿을 만한 거 아니야? 너에게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야.”

독구가 고개를 푸르르 흔들었다. 그런데 목에 걸린 목줄이 아팠는지 깨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상처를 핥으려 해도 혀가 닿지 않으니 한참 동안 낑낑거렸다. 그는 겨우 아픔을 딛고 진정시킨 뒤 훌쩍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는걸.”

“…….”

“잡기 놀이를 했는데 내가 바보 같아서 주인님을 놓치고 말았어. 내가 무리에서 사라진 걸 알면 분명히 날 찾으러 올 거야. 그러니까 여길 벗어날 순 없어. 왜냐면 주인님이 날 찾는데 내가 여기 없으면 슬퍼할 거잖아. 날 무리에 끼워 주려는 건 정말 고맙지만… 그래도 난 계속 기다리고 싶어.”

아무것도 없는 도로 위에서 무슨 잡기 놀이를 한다고.

알고 보니 독구의 주인은 독구를 버려둔 채 차를 타고 도망쳤다. 도망가는 차를 독구가 필사적으로 쫓아갔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그 뒤로 몇 달째 독구는 여기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독구는 자기가 바보같이 놀이를 제대로 못 해서 주인을 놓쳤다며 자책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버린 주인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는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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