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35화 (235/324)

235화

마치 게임 퀘스트를 진행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연계된 퀘스트처럼 NPC 한 명이 주는 임무를 완수하면 또 다른 NPC가 나타나 퀘스트를 완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차민재와 재언에게 자신을 소개한 이는 이름이 앨리스 강, 나이가 서른여섯 살인 남성이었다. 외국인이거나 종족이 다르거나, 혹은 혼혈도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콘셉트를 잡은 건지 똑바로 마주 보기 힘든 형광 파란색 하의에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상의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대체 왜 빡빡 민 머리에 프릴이 달린 머리띠를 하고 나왔는지 의문이었다.

어떻게 봐도 납득하기 어려운 패션인데 본인이 패션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애옹…….”

신재언이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충분히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했겠지만, 고양이 신재언은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이상한 인간을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 것이다.

“제~ 엘레강스한 쪼롱이를 소개해드리죠. 너무너무너무 귀여운 앵무새입니다. 안타깝게도 말은 못 하지만요……. 매일 아침 절 깨워 줄 땐 괴상한 소리를 내긴 해도… 언제나 예쁘고 고운 지저귐으로 지친 제 심신을 달래 줍니다.”

전체적으로 노란빛의 깃털에 연지를 찍은 것 같은 얼굴의 붉은색 점이 인상적인 앵무새였다. 남자는 자신의 앵무새가 예쁘고 고운 목소리로 지저귄다고 말하지만, 신재언의 귀에는 ‘궤-에엑-’거리는 정체 모를 울음소리일 뿐이었다.

게다가 앵무새의 가슴 깃을 만지며 앨리스 강이 속삭이자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말에 재언은 황당해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 씹새야, 뭘 봐? 어? 나랑 한판 뜨자고?”

재언은 저 자식 눈깔이 이상하다고, 맛이 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앨리스 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일단 욕부터 내뱉는 앵무새에 살짝 겁을 먹었다.

쪼롱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앨리스 강이 몰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것도 모르고 악마 같은 앵무새를 예쁘다고 귀여워하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처럼 대하는 그를 동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쁘고 곱다고 생각했던 첫인상은 이미 저편으로 날려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도 쪼로롱쪼로롱 울고 있군요……. 우리 쪼롱이. 분명 제게 사랑의 말을 지저귀고 있는 거겠죠……. 아아, 너무 사랑스러워.”

“캬아악 퉤! 쨉도 안 되는 게 덤비고 있어. 뒤질라고.”

“…….”

쪼롱이는 걸쭉하게 욕을 내뱉은 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처럼 앨리스 강의 어깨 위에서 총총거렸다. 그러다 차민재의 품에 안겨 있던 신재언 고양이를 드디어 발견했다.

“넌 또 뭐 하는 놈이야?! 어? 뭘 봐, 씨발놈아! 뭘 봐!”

뭔 대답할 기회도 안 주고 욕부터 박고 있는지……. 앵무새가 원래 저렇게 입이 걸걸한 건가 싶었다.

서울 외곽에 있는 작은 전원주택인 앨리스 강의 집은 거실의 절반이 앵무새를 위한 구조였다. 거실 테라스와 연결된 통창으로 정원이 훤히 보이고 경치가 가장 좋은 곳에 사람 세 명이 들어가도 널찍한 크기의 새장을 설치해 언제든지 바깥을 구경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지리겠네! 똥 마려!”

“…….”

앨리스 강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쪼롱이가 갑자기 푸드덕 날아가더니 열려 있는 새장 안 횃대에 앉았다.

“우리 쪼롱이는 말을 하진 않지만, 머리가 좋아서 화장실을 가리거든요. 볼일은 항상 저 횃대에 앉아서만 봅니다.”

“야옹…….”

그러고 보니 새장이 열려 있음에도 새장 바닥에 깔린 신문지 외의 다른 곳에는 새똥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쪼롱이는 횃대 위에서 엉덩이를 쭉 내밀고 새똥을 찍 갈긴 뒤 다시 앨리스 강의 어깨 위에 날아와 안착했다. 그리고 꽁지깃을 부리로 정리했다.

“제 어깨 위에 앉아 있을 땐 쪼로롱쪼로롱하고 울어서 이름이 쪼롱이입니다.”

그의 말만 들었을 땐 누구라도 참으로 귀여운 생명체에게 귀여운 이름을 지어 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쪼롱이의 부리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런 기대를 파사삭 부서지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헤헹, 이 멍청한 놈! 내가 지 몸에 똥 닦는 것도 모르고 쪼개네.”

저게 그 귀여운 앵무새가 하는 말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앨리스 강은 이번 ‘동물의 말을 알아듣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히어로 협회 개발팀의 마지막 연구원이었다. 그가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유는 앞의 두 사람보다 더 간단했다.

매일매일 예쁜 목소리로 울어 주는 쪼롱이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걸어오는지 궁금했단다. 눈이 마주치면 쪼로롱하고 울면서 어깨에 올라타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눈만 끔뻑이는 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는 뜻이었다.

그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던 쪼롱이와의 첫 만남을 상기했다. 양손을 맞잡은 그가 눈을 꼭 감으며 그날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전… 협회에 귀속된 이후로 정말 매일같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건강관리는 고사하고 등산 한번 가기 힘든, 바쁘고 힘든 나날이었죠.”

갑자기 시작된 과거 회상에 재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그의 눈물겨운 야근 인생에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였다.

“저는 제 몸을 사랑합니다. 운동 한번 못 해 보고 이대론 죽을 것 같다 싶을 때 총괄 소장님께 사표를 던지며 휴가를 주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렇게 얻어 낸 휴가 중 하루에 등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앨리스 강이 감았던 눈을 뜨고 자기 어깨에 올라와 있는 쪼롱이의 눈동자를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산을 열심히 오르고 있는데… 뒤에서 올라오던 청년이 저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청년은 제게 혹시 산에서 도를 닦으시는 분이냐고 묻더군요.”

앨리스 강이 청년의 물음에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경계하고 있는데 청년이 앨리스 강의 어깨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시선을 따라 어깨를 쳐다본 앨리스 강의 눈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생각지도 못한 생명체를 발견했다.

“우왓! 깜짝이야!”

그가 화들짝 놀라서 어깨를 털어 냈지만, 떨어져서 한번 날갯짓을 한 앵무새가 다시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그러더니 쪼로롱거리며 예쁘게 울기 시작했다.

이런 산속에 앵무새가 서식할 리 없으니 분명 누군가가 유기하거나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렇게 앨리스 강은 어깨 위에 올라가 우는 앵무새에게 운명을 느꼈다.

“아아, 그때를 생각하면 총괄 소장님을 협박하고 휴가를 받아 낸 것도, 그 산에 올라간 것도 모두 우리 쪼롱이를 만나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저는 이 앵무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야옹…….”

그것참 눈물겨운 스토리였다. 하지만 날개를 파닥이며 내려와 바닥에 네 발로 서 있는 신재언의 머리 위에 앉은 쪼롱이의 말을 들어 보면 감동은커녕 마음이 싸하게 식을 뿐이었다.

“난 말이야-! 그 전에 나를 데려간 어떤 쪼다 새끼한테 이겨서 기쁜 마음에 자유를 찾아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지. 하하핫!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으셈!!”

쪼롱이는 그때를 상기하며 전투적으로 외쳤다.

“근데 저 새끼가 멀리서도 눈에 띄더라. 나보다 화려한 깃털을 입었잖아! 맞짱 뜨려고 어깨에 앉으니 잔뜩 쫄아 가지고 빌빌거리면서 먹을 걸 가져다 바치는 거야! 그래서 너그럽게 용서해 줬어! 하하하!”

초롱이의 전투적인 무용담은 앨리스 강을 물리친 뒤 편안한 안식을 전리품으로 얻은, 위대하고 위험한 모험이었다.

독구에게 사실대로 전해 줄 수 없었던 조금 전의 상황에서 정확히 반대가 되었다. 앨리스 강에게 쪼롱이의 말을 전부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리 없다.

예쁘게 우는 쪼롱이가 자신에게 어떤 좋은 말을 하고 있을지 잔뜩 기대하는 그에게 사실 절반이 욕설이고 절반이 시비라고 얘기하면, 그가 어떻게 돌변할지 걱정스러웠다.

“이봐, 너도 나한테 엉망으로 당하기 싫으면 찍소리 하지 말고 잘 보여!”

“아야, 아야야야! 털 뽑지 마!”

머리 위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발톱으로 털을 뽑으려고 하자 쪼롱이를 털어 버린 재언 고양이는 소파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쪼롱이가 재언을 따라 부리와 발톱을 이용해 소파로 올라오더니 재언의 머리를 부리로 긁으며 말을 걸었다. 날개가 있으면서 굳이 저렇게 움직이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야, 야야, 새끼야, 삐쳤냐?”

저 악마 같은 앵무새 놈의 말하는 꼬락서니가 어딘가의 시정잡배가 따로 없었다.

“내가 부하들 소개해 줄 테니까 삐친 거 풀어.”

“…휴.”

재언은 이 악마 새에게 5억이 달려 있음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부하들?”

“그래. 내 부하들하고 아주아주 힘든 계획을 짜고 있었거든. 너도 와라.”

무슨 첩보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그래 봤자 인형 따위를 부하로 두고 위대한 계획이니 뭐니 하는 거라고 짐작한 재언은 지금은 일단 장단 맞춰 줄 요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따라다니다가 앨리스 강에 대해 좋은 말을 하면 그것만 받아 적어 줘야겠다.

쪼롱이가 신재언 고양이를 데리고 어딘가로 타닥타닥 걸어갔다. 앵무새와 고양이가 사이좋게 일렬로 움직이자 앨리스 강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앵무새가 재언을 데려간 곳은 위쪽의 다락방이었다. 그것도 지붕으로 이어지는 다락방 천장의 작은 틈이었다.

사람이 들어가기는 매우 좁지만, 재언만큼 큰 고양이 정도는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폴짝 뛰어올라 작은 공간으로 들어간 재언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내 부하 1호, 2호.”

상대는 깜짝 놀라 게거품을 물로 기절했다. 그는 회색빛이 도는 생쥐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잘 챙겨 먹고 다녔는지 털이 반질반질하고 크기가 아기 팔뚝만 했다.

쥐들은 설마 신재언같이 거대한 고양이가 튀어나올 줄 몰랐는지 찍찍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대, 대, 대, 대장… 이, 이, 이, 이건… 고양이잖아!”

그나마 정신을 잃지 않은 생쥐 2호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물론 신재언이 아무리 고양이가 되었어도 쥐를 잡아먹을 생각은 없을뿐더러 오히려 질색하고 피하는 쪽에 가까웠다.

기겁하는 고양이와 쥐들의 반응에 앵무새는 별생각도 없는 듯 발톱으로 부리를 긁적이기만 했다.

“아무튼, 이놈도 우리 계획에 동참할 테니 그렇게 알아라. 사이좋게 지내라고.”

그러자 기절하지 않은 생쥐 2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재언은 고양이의 눈으로 쥐의 머쓱한 표정도 읽을 수 있구나, 신기해하면서 눈동자만 굴렸다.

대체 무슨 계획을 짜기에 앵무새가 생쥐를 부하로 데리고 다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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