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37화 (237/324)

237화

재언은 줄줄이 이어진 퀘스트를 모두 완료하고 보상을 받았다. 5억이라는 빚더미를 떠안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보상이었다.

고양이가 된 것도 억울한데 평생 일만 하고 살아도 갚을 수 있을까 말까 한 빚까지 떠안으면 인생이 너무나도 고달파질 게 분명했다. 그게 비록 주정뱅이의 자업자득이어도 말이다.

재언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앨리스 강에게 ‘츤데레 기질이 있지만, 주인을 매우 좋아하는 앵무새’의 장점을 구구절절 읊으며 노트북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렸다.

앨리스 강의 어깨 위에서 온갖 욕이 담긴 쪼로롱거리는 예쁜 울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이 씨바로마, 귀한 걸 줬으면 보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이런 ㅅㅂ xxxxxx…….”

어쩌다 보니 소설 한 편이 뚝딱 완성되었지만, 앨리스 강이 쪼롱이의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고 욕을 제외하면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재언은 손톱만 한 양심을 지키며 작문을 마무리했다.

이것으로 술 취한 과거의 신재언이 쳐 놓은 사고를 신재언 고양이가 모두 해결했다. 이제 녹초가 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면 끝이었다.

앨리스 강은 신재언의 짧고 뭉툭한 앞발을 잡고 흔들면서 크게 웃었다.

“신재언 씨, 이렇게 손을 빌려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약은 대략 일주일 정도만 유효할 테니 그때까지만 참고 고양이로 있어 주시면 됩니다.”

“이야옹.(알고 있습니다.)”

그는 쪼롱이를 어깨에 얹은 채 현관을 나서는 인간과 고양이를 배웅했다.

“그러면 다음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뵙도록 하죠.”

“야옹.”

짧게 우는 고양이의 대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앨리스 강이 포동포동한 신재언의 분홍색 발바닥을 만지작거리다가 놔주었다. 어깨 위의 쪼롱이가 양 날개를 펄럭이면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가! 또 만나자, 친구!”

아무래도 이번 계획에 지대한 도움을 준 고양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입만 열면 욕이더니 멀쩡한 말과 함께 친구로 승격되었다.

다음에 인간의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면 앵무새의 말을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왠지 저 울음소리가 욕으로 들릴 것 같다.

그렇게 재언은 차민재의 어깨에 기댄 채 앵무새와 인사까지 끝낸 뒤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차로 돌아가 운전석에 앉은 차민재는 조수석에 있는 이동장에 신재언을 넣고 부드럽게 시동을 걸었다.

달리는 차 안, 이동장에서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재언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온종일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여러 동물과 마주친 탓인지 너무나도 피곤했기 때문이다.

잠이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재언은 몸이 붕 뜨는 게 느껴졌다. 이동장이 몇 번 흔들리더니 찰칵하고 현관문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차민재가 이동장을 바닥에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려도 아직 잠에서 덜 깬 신재언이 나오지 않자 무언가가 이동장 안으로 전광석화처럼 튀어 들어왔다.

“왔어!? 사냥은 잘하고 온 거야? 근데 먹을 건? 설마 사냥에 실패한 거야?”

야옹, 야옹.

쉴 새 없이 떠드는 새끼 고양이의 얼굴을 한번 끌어안아 준 재언은 하품을 하면서 이동장 밖으로 나왔다.

집 안에서 잘 먹고 자고 푹 쉰 새끼 고양이는 생기발랄한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붕 날아들어 신재언의 엉덩이 위로 안착했다.

“그를 귀찮게 하면 안 돼.”

그 모습에 차민재가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배추를 재언에게서 떨어트린 뒤 방에 들어가 물고기 인형이 달린 낚싯대 장난감을 꺼내 왔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물고기 인형에 신재언의 목을 끌어안고 귀를 앙앙, 물던 배추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가 튀어 올랐다.

용맹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물고기 인형이 잡히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낚싯대를 조종하는 건 세상에 당해 낼 자가 없는 최강의 히어로였다.

새끼 고양이 배추는 호승심이 불타오르는지 민들레 홀씨 같은 털을 잔뜩 세우고 꼬리를 물결 모양처럼 잔뜩 부풀려 더욱 용감하게 물고기 인형을 상대했다.

저도 모르게 인형을 눈으로 좇던 재언도 낚싯대를 조종하는 차민재의 능력에 감탄했다. 차민재는 새끼 고양이 정도는 눈감고도 이기는 베테랑 히어로의 면모를주었다.

이리저리 튕기는 물고기 인형을 숨김없이 보여 한 번도 제대로 잡지 못한 배추가 결국 헥헥대며 바닥에 풀썩 누웠다.

그런 배추를 봐주듯 민재가 물고기 인형을 가까이 붙여 주었다. 그와 동시에 앞발로 낚아채는 데 성공한 새끼 고양이는 일어설 생각도 못 하고 제 몸 크기의 인형을 뒷발로 팡팡 치며 놀았다.

새끼 고양이의 체력을 빼는 데 성공한 차민재가 물고기 인형을 고양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놓은 뒤 소파 위에 드러누운 재언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언 씨, 오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약값 정도야 제가 물어낼 수 있지만… 사실 이 일이 돈이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저한테도 굉장히 귀찮은 놈들이라 재언 씨가 골치 아파질 수도 있어서요.”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재언의 몸을 쓰다듬던 차민재가 자신의 손에 가득 묻어 나오는 하얀색 털을 내려다봤다.

고양이와 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긴 했지만, 배추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고양이라 그렇게 많이 빠지는 편이 아니어서 지금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고양이 종보다도 털이 복슬복슬한 편인 재언은 조금만 털이 빠져도 한 움큼이었다.

일반인들만큼 평균적인 깔끔함을 추구하는 민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미리 사 두었던 털 빗으로 재언을 빗기기 시작했다.

“애옭!”

“재언 씨, 도망치면 안 됩니다.”

빗질 당하는 느낌이 싫어서 자꾸 도망치려는 몸을 강하게 옭아매는 힘에 재언은 끝까지 옴짝달싹 못 했다.

@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인간으로 돌아가는 날만을 기다리는 신재언 고양이의 일상은 매우 느긋했다.

차민재는 자신이 일 때문에 집에 없을 땐 자식들이 집에 들어와도 된다고 특별히 허락해 주기도 했다. 물론 부재중인 히어로의 집에 거대 빌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 상당히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위화감을 신재언뿐만 아니라 자식들도 느낀 듯 하루에 몇 명씩 인원을 정해 나타났다. 자식들은 집 안에 들어와서도 이것저것 만지거나 뒤지지 않고 오로지 재언만 구경하다가 돌아가곤 했다.

“아버지. 너무 귀여우십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평생 귀여운 아버지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애옭.”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혼돈을 일으키는 빌런들의 왕이 사실은 거대 고양이라면 어떨까.

15kg이 넘는 커다란 고양이가 왕좌에 앉아 기다란 털을 정리하며 한껏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내는 걸 떠올리면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슨 영화에나 나올 법한 코미디였다.

그리고 하루빨리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재언에게 그다지 반가운 말은 아니었다. 재언은 고개를 들고 앞발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켠 뒤 날짜를 셌다.

자신이 고양이로 변한 지 사나흘 정도가 지났으니까 대략 이틀 정도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자식들이나 차민재는 신재언 고양이를 물고 빨고 핥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아주 엉망이 된 털을 정리하는 데 하루의 반을 소진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자식들이 가고 나면 침대나 소파 밑에 숨어 있던 배추가 슬그머니 나타나 재언을 귀찮게 했다. 다른 또래의 새끼 고양이들보다 훨씬 작고 왜소한 배추가 커다란 고양이 옆에 있으니 검은 물혹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 겁먹은 게 아니야. 갑자기 내 영역에 나타난 그놈들의 상황을 살핀 것뿐이지…….”

배추가 우쭐대며 중얼거리고는 신재언의 몸을 기어 올라가 등 위에 누웠다. 재언은 배추가 왜 굳이 이렇게 힘들게 눕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새끼 고양이의 체온이 생각보다 마음의 안정을 주어서 그냥 두었다.

게다가 털 정리하는 법을 어미에게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지 항상 털이 엉망이었는데 스스로 정리하는 것도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혀로 핥는 부분이 오히려 더욱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재언이 앞발로 배추를 붙잡고 보송보송한 털을 혀로 빈틈없이 싹싹 핥아 주었다. 처음엔 고양이 털을 핥는 게 조금 거부감이 들었는데 이틀 정도가 지나자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뭐, 같은 고양이끼리 이러는 게 어떤가 싶어서 머리부터 등까지 단정하게 변하라고 핥아 주자 배추가 꺄르륵 웃으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요놈. 가만히 있어.”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핥아 준 뒤 놓아주자 삐죽빼죽 서 있던 털들이 차분하게 잘 정리가 되었다.

흡족한 재언과는 다르게 배추는 몸을 파르르 떨더니 재언의 목덜미에 매달려 귀를 앙앙 물었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400g짜리 새끼 고양이의 복수였다.

푸른색 눈동자였던 배추는 날이 갈수록 초록빛이 도는 노란색 눈동자로 변해 갔다. 예쁜 초록빛의 노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배추가 물었다.

“당신 말이야, 내 엄마야?”

“…나 수컷이야.”

“그렇지만 나,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이 익숙했어.”

배추의 어미인 나비가 까미라는 이름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부터 챙겨 주고, 눈도 뜨지 못했던 새끼 때부터 차민재의 곁에서 지켜봐 온 걸 몸이 기억하는 것인가 싶었다.

그렇게 배추의 장난을 흘리면서 놀고 있을 때 재언의 귀에 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가 되고 나니 인간이었을 때보다 청각이 예민해졌다.

걸음 소리만으로도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능할 정도였다. 들리는 보폭과 느긋한 걸음은 분명 연인인 차민재가 분명했다.

배추도 같은 걸 느꼈는지 걸음 소리가 들리자마자 쏜살같이 현관문 앞으로 달려갔다. 재언은 이전까지만 해도 새끼 고양이를 차민재가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배추가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차민재는 걱정했던 것 이상으로 고양이에게 좋은 집사가 되어 준 모양이다.

“야옹.”

재언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느지막이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오는 차민재를 반겼다. 차민재는 자신을 놀라게 한답시고 벽에 바짝 붙어 있다가 깡충 뛰어서 종아리에 매달린 배추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린 뒤 재언에게 다가왔다.

배추는 차민재의 손바닥을 껴안고 이제 막 뾰족해지는 이빨로 손가락을 앙앙 깨물었다.

“다녀왔어요, 재언 씨.”

“애오옹.”

소파 위에 앉는 차민재의 허벅지를 앞발로 짚으며 재언이 길게 울었다. 이런 때만큼은 인간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고양이 모습으로 있을 때도 차민재는 지나치게 달콤하고 상냥해서 나쁘진 않았지만, 인간이었을 때의 연인으로서 상냥한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날 밤, 재언은 배추를 물혹처럼 매달고 차민재의 가슴과 팔 사이에 파고들어 잠을 청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박문석 소장이 말했던 부작용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이게 뭐야.”

며칠 만에 입을 통해 들려오는 자신의 인간 목소리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머리 위에 튀어나온 하얀색의 고양이 귀와 꼬리뼈에서 이어지는 풍성한 꼬리가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거대하고 체격이 좋은 성인 남성인 신재언이 머리에는 고양이 귀를, 엉덩이에는 고양이 꼬리를 매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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