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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38화 (238/324)

238화

이전에도 말했지만 신재언은 수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고양이었을 때는 인간이 아니니까 양심은 마음속 한구석에 묻어 두고 귀여운 척하긴 했었다.

아니, 애인이 자신을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을 발사하며 쓰다듬어 주는데 반응해 주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래서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배를 까뒤집고 뒹굴뒹굴하기도 하고 차민재가 배를 만져 주면 조금 과하게 귀여운 척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고양이었으니까 한 행동이었다. 지금처럼 사람으로 돌아왔을 때조차도 그런 짓을 할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재언은 자신처럼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이런 몰골이 어울리지 않는단 것쯤은 객관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박문석 소장이 5일 정도 지나면 사람의 모습으로 지나갈 테지만,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한 이유를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 차민재가 재언이 고양이가 되었어도 왠지 기분 좋게 기다렸던 것도 알아차렸다.

어쩐지 그 성격에 유하게 넘어가더라니, 이런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재언은 한참 동안 자신의 몸에 생긴 고양이 귀와 꼬리를 매만지며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러다가 옆에서 차민재가 꾸물거리며 잠에서 깨어나려 하는 걸 느끼고 잽싸게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느니 이틀 동안 이불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재언 씨, 돌아왔네요?”

“…….”

차민재는 잠에서 깨더라도 꾸물거리며 자는 척하고 뒹굴뒹굴하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벌떡 일어나선 고치가 된 이불을 흔들었다.

“재언 씨, 겨우 사람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보여 주지 않을 거예요?”

“저리 가세요, 야옹.”

말끝마다 고양이가 우는 듯한 높은 울음소리가 자신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재언은 수치심으로 머릿속이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아예 입을 열지 않으려고 꾹 다물어 봤지만, 이불째 들어 자신을 안아 버린 차민재의 만행에 결국 ‘애오옭!’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금은 생각하기도 싫지만, 약 5년 전에 동남아 클럽에서 남성 스트리퍼로 오해받아 상의를 노출한 채 이상한 쫄쫄이바지를 입었을 때나 얼마 전 게임 속 세계로 휘말려 들어가 등이 훤히 보이는 카드 마스터 복장으로 바뀌었을 때만큼 부끄러웠다.

신재언에게 닥친 이 모든 상황은 그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안겼다.

“보지 말라니까요! 징그럽다고요!”

“어울리지 않아서 더 귀여운데요.”

지금 들은 개소리가 차민재의 입에서 나온 게 맞는지, 아니면 이상한 페티쉬를 가진 누군가가 방 안에 있는 건지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발버둥 치던 재언은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온 차민재의 단단한 팔뚝에 허리가 잡혀 벗어나지 못했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아도 연하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힘이 좋은 건지 끌어당기는 민재의 힘에 지친 재언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불을 젖혔다.

하지만 차라리 뻔뻔하게 낯짝이 두꺼운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재언은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단 채 지나친 수치심으로 얼굴이 새빨개졌고 이불 속에서 발버둥 친 것 때문에 이마에 송골송골 땀까지 흘리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완전히 인간으로 돌아온 게 아닌 듯 송곳니가 길고 뾰족했고 눈 안에 있는 동공이 고양이의 것처럼 커졌다가 세로로 길어지길 반복했다.

재언의 모습을 본 차민재가 충격받은 사람처럼 행동을 뚝 멈췄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재언 씨… 저 아픕니다.”

“옭…….”

“여기가 아픕니다.”

차민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다리 사이를 본 재언은 그의 저질개그에 감정을 실은 손바닥으로 등짝을 힘 있게 후려쳤다.

@

“어!? 커졌다!”

“…….”

“뭐야? 뭐야? 뭐 먹어서 이렇게 커진 거야?”

작디작은 검은색 솜뭉치가 침대 아래에서 곤히 자고 있다가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와 진동에 깨어났는지 하품을 하면서 튀어나왔다.

그에 재언은 자신을 덮치고 있는 차민재를 겨우 떼어 내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났다. 안 그래도 지나치게 독특하고 괴상한 취미를 가진 차민재 때문에 그대로 가다간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그 길로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오자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검은 고양이가 우다다 달려왔다. 아직 배추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걸 보면 아직 약 기운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재언은 그런 검은 고양이를 지나쳐 소파에 앉아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를 털다가 손등을 핥고 얼굴에 비비려 한 자신을 깨달았다.

충격과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재언의 다리 사이를 검은 고양이가 비집고 들어갔다.

“아까부터 왜 계속 내 말을 무시해? 어? 뭘 먹어서 그렇게 컸냐니까?”

배추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발라당 드러누웠다. 재언이 씻는 동안 밥을 거하게 먹었는지 배가 아주 빵빵했다.

재언이 저도 모르게 배추의 빵빵한 배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바에 의하면 고양이들은 배를 만지는 걸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것도 고양이들 성격에 따라 다른가 보다.

“밥 많이 먹고 잘 자고 이상한 거 안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건강하게 자라면 클 수 있어.”

“너처럼?”

“나처럼은 무리고.”

그렇게 배추를 쓰다듬으며 잡담을 떨고 있던 재언은 뒤에서 느껴지는 눈길에 고개를 돌렸다. 차민재가 침실을 정리하고 나오면서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던 탓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새끼 고양이를 저 멀리 보내 버리고 2차전에 돌입하려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추와 이야기를 나누며 재언이 저도 모르게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냈기 때문이란다.

수치심에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재언과는 다르게 차민재에게 포상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부작용은 이틀이면 완전히 끝난다고 합니다. 솔직히 좀 아쉽네요.”

아직 완전히 인간으로 돌아온 게 아니니 건강상에 문제가 될지도 모른단 이유로 싱겁게 삶은 닭가슴살을 건네주며 차민재가 말했다.

“전 전혀 아쉽지 않아요.”

그에 재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진짜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고요.”

하지만 재언의 말에도 차민재는 고양이 귀를 홀린 듯 쓰다듬을 뿐이었다.

확실히 지금의 재언에게는 아직 사람의 귀는 나오지 않았다. 이 귀가 점점 내려와서 사람의 귀로 바뀌지 않을까 짐작했다.

내일이면 이 수치심도 모두 끝이었다. 그 와중에 차민재가 카메라를 들고 자꾸 부끄러운 모습을 찍어 대려는 통에 도망가느라 체력을 전부 소진했다.

결국, 사진으로 몇 장 남기고 말았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아 냈다.

어떤 식으로든 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아 몸이 찌뿌둥했다.

고양이로 있을 땐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나른해지고 눕고 싶어져서 많이 움직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만 가만히 있으려니 온몸이 근질거렸다.

그런 재언의 곁에 딱 달라붙어 검은 솜뭉치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귀찮기만 하던 조잘거림이었는데 문득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될 것이 조금 아쉬워졌다.

자신의 다리 위에 늘어져 있는 배추를 쓰다듬으며 재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배추야.”

“웅?”

“이제 곧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알아듣지 못하게 될 거야. 그래도 너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해.”

“무슨 소리야?”

배추가 몸을 일으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재언은 인간을 거대 고양이로 생각하는 배추에게 인간과 고양이라는 종족의 개념을 설명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내가 지금 저 거대 고양이처럼 말을 못 알아듣게 될 거라는 소리야.”

재언이 방 안에서 통화 중인 차민재를 고갯짓하며 가리켰다. 그런데도 배추는 알아듣지 못한 듯 몸을 뒹굴뒹굴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야?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어.”

“…….”

“언제 내 얘기를 못 알아들었다는 거야? 설마 내 영역을 떠나려는 거야?”

제 물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배추가 펄쩍 뛰며 매달렸다. 재언은 자신이 영역을 떠나는 바람난 고양이가 된 기분에 할 말을 잃었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배추는 차민재와 소통이 막혔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재언은 작게 웃으며 걱정스럽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새끼 고양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바닥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영역을 떠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정말로?”

고양이들은 영역 동물이라 같이 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데, 역시 배추는 희한한 고양이였다. 일정한 박자로 고양이의 등을 토닥이면서 재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알겠어.”

배추는 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언의 허벅지에 딱 달라붙어 몸을 둥글게 말고 제 배와 옆구리를 싹싹 핥았다.

“또 내일 봐.”

그 뒤로 배추가 야옹거리는 걸 보던 재언은 자신이 갑자기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단 걸 깨달았다.

야옹, 야옹.

옹알이하듯 배추가 울기는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겠다.

재언은 빠르게 손을 올려 고양이 귀가 있던 자리를 더듬거렸다. 봉긋했던 고양이 귀는 사라지고 사람의 귀가 만져졌다.

꼬리뼈 쪽의 꼬리도 없어지고 뾰족한 송곳니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차민재가 재언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돌아왔네요.”

“네.”

이상한 약을 먹은 것치곤 고양이가 되었단 걸 빼면 부작용도 없었고 앞으로의 일상생활에 지장도 가지 않을 것이다. 재언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곁으로 다가오는 차민재를 반겼다.

그리고 허벅지에 기대 잠을 자는 배추에게도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

“잘 자.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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