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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39화 (239/324)

239화

“야옹~”

애교가 잔뜩 섞인 간드러진 목소리로 울며 눈을 동그랗게 뜬 배추가 재언의 배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이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대충 만져 달라는 뜻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재언은 옆구리 쪽으로 미끄러져 파고드는 새끼 고양이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누워 있었다.

“이야옹.”

다시 길게 우는 목소리가 놀아 달라고 앙탈 부리는 것 같다. 분명 방금까지 새로 산 나비 인형 낚싯대로 놀아 줬건만 새끼 고양이의 체력에 인간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새끼 고양이와 놀아 주느라 잔뜩 지친 재언은 민재의 집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저번 달에 떠들썩하게 광고했던 영화가 영화관에서 내려갔는지 TV 콘텐츠 다시 보기 화면의 메인을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한 번의 구매로 영구 소장할 수 있는 금액이 10,500원이었는데, 아무리 애인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결제 버튼을 눌러도 될지 고민이 돼서 아주 잠깐 머뭇거려졌다.

과연 차민재가 TV 이용요금 고지서를 보고 만 원이 더 청구되었다며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 사람일까.

재언이 볼까 말까 고민하는 영화는 개봉 전부터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멀게 사건이 터지고 일이 바빠서 보러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양이가 되었다가 사람으로 돌아와 겨우 출근했을 때도 사람들이 무슨 사건에 이렇게 연달아 휘말리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겨우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땐 영화는 이미 영화관에서 내려온 상태였다.

영화는 비능력자인 주인공이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던 도중, 거대 빌런에 의해 마을 전체가 좀비로 변하는 끔찍한 일을 겪게 되면서 시작한다. 몰려드는 좀비들을 비능력자가 어떻게 격파하는지 궁금했었다.

게다가 주인공의 동료 배역으로 아이돌 가수가 캐스팅되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재언이 잘 아는 아이돌 그룹 color’s의 옐린이었다.

“우리 옐린이는 2년 전부터 연기 연습을 꾸준히 했고 드라마에도 조연으로 출연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진지한 영화에 무슨 아이돌이냐면서 캐스팅 때부터 갖은 비판을 들었던지 남무혁이 영화 예고편이 나오자마자 울부짖었다. 비록 조연으로 출연했다는 드라마가 일일 아침드라마였고 거기서도 미숙한 연기로 이슈가 되었던 건 팬 앞에서 굳이 꺼내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평범한 주인공의 동료들도 대부분 비능력자라는 설정 덕분에 호쾌하고 시원한 액션, 휘몰아치는 재미가 있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다만 빌런 한 명 때문에 세상이 좀비 소굴로 변했다는 억지 설정과 개연성이 조잡하다는 혹평도 만만치 않았다.

“뭐해요, 재언 씨?”

“민재 씨, 영화 결제해도 돼요?”

밖에서 사 온 야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차민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평소에 재언 씨한테 인색하게 굴었나요?”

“그건 아닌데, 집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결제하기 좀 그렇잖아요.”

그러자 차민재가 마침 잘되었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재언의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고 보니 재언 씨.”

소파 끝에 궁둥이만 붙이고 앉은 그의 자세에 편하게 앉으라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재언은 어깨가 붙잡혀 다시 눕혀졌다. 차민재의 아래에 깔린 재언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요즘 계속 여기서 자주 숙식을 해결하시죠?”

“너무 자주 와서 싫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요. 이렇게 된 거 같이 사는 건 어떻습니까. 이미 한번 해 봤잖아요.”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 갑작스럽게 꺼내어지자 재언 또한 저도 모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세워 앉았다.

이미 한번 해 봤다는 그의 말도 ‘평행 세계’에서 ‘다크 카오스’였던 ‘신재언’이 부하인 레헬과 가까이 지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겠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않나. 적어도 이런 식으로 몸을 섞지는 않았다.

지금도 차민재는 재언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바짝 기대고 있었다. 재언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살짝 피했다.

솔직히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긴 했는데, 동거하기 시작한다면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하지만 차민재는 그동안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어마어마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아주 자상하고 이상적인 애인이 되어 주었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얼굴만 볼만했던 쓰레기들을 사귀어 온 재언에게 차민재는 그가 만났던 어떤 애인들보다 매너가 좋았다.

게다가 재언의 정체를 알고 그의 자식들에게도 딱히 해코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전에 코루루가 기습으로 공격했을 때조차도 많이 봐준 편이었다. 그 덕에 그녀의 목과 다리에 자잘한 화상과 갈비뼈가 부러진 것 말고는 목숨에 지장이 없었다.

물론 갈비뼈가 부러져 당분간 거동이 불가능해진 코루루는 출연하기로 했던 뮤지컬 무대를 모두 연기해야 한다며 매우 원통해했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이 전신화상을 입고 죽을 뻔했었던 때를 떠올린 재언은 그녀의 상태에 봐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저절로 나왔다.

“코루루를 많이 봐준 모양이던데요……. 그녀를 죽이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재언 씨가 아끼는 인형을 죽일 생각은 없거든요.”

“…인형이라뇨.”

말본새가 못돼 먹어서 그렇지 어쨌든 그가 신재언의 자식들을 죽이거나 해코지할 생각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 사실에 한시름 놓은 덕분인지 재언은 민재의 동거 제안에 솔깃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미 지금도 일주일에 절반 가까이 그의 집에서 지내고 있지 않은가.

“민재 씨가 설득해야 할 자식들이 지금 일곱이나 있습니다.”

“그놈들을…….”

“설득에는 협박, 폭력, 능력 사용 금지입니다.”

“…….”

“지금처럼 자주 놀러 올게요.”

“사람들이 왜 자식 있는 유부남을 만나지 말라고 하는지 알 것 같네요. 재언 씨에게 극성인 자식들이 득실득실하네요.”

“그 뜻이 아닐 텐데…….”

실망한 듯한 민재의 기운에 재언은 미안한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리모컨 버튼을 눌러 영화를 재생했다.

@

영화는 볼만했다. 재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차민재도 영화 중반부터는 사 왔던 야식을 먹으며 제대로 자리 잡고 앉아 감상할 정도였다.

나중에 가서 세상을 좀비로 만든 흑막 빌런이 사실 주인공의 아버지였으며 주인공이 마지막에 각성했다는 진부한 히어로 설정만 빼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민재 씨라면 좀비 사태가 터졌을 때, 집에 있는 것만으로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워진다면, 주인공처럼 밖으로 나갈 겁니까?”

“재언 씨가 이곳에서 1년은 버틸 수 있을 만큼 집에 비상용 건조식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물론 식수도요. 뭐, 심심하다면 좀비들을 모아 놓고 불구경을 시켜 줄 수도 있어요.”

아주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일 있으면 다 말하라고, 죽여 줄 거라고 했던 전 애인의 허세와는 다르게 현실성이 가득해서 그런가 비교도 할 수 없게 든든했다.

하지만 자신이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니었다. 재언이 쓸데없는 상상과 조건을 더해 다시 질문했다.

“아니요. 예를 들면 민재 씨가 저 영화 주인공처럼 비각성자였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집에는 딱 이틀 치 식량밖에 남지 않았다고 가정합시다.”

“흐음.”

굉장히 허무맹랑하지만, 차민재는 재언의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굶어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저는 나갈 겁니다.”

재언 또한 진지한 표정으로 차민재에게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영화를 시청하고 이런저런 잡담을 떨다가 잠자리에 든 게 새벽 3시 정도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려면 꽤 힘들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은 재언은 빌어먹게도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된 걸 눈치채지 못하고 아슬아슬한 시간에 깨 버리고 말았다.

묘하게 낯선 기분을 느끼며 아침에 눈을 뜬 재언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지금 출발해도 운이 좋아야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양치와 면도, 세수를 빠르게 끝내고 허겁지겁 양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끝내는 데까지 5분 정도 걸렸다.

“재언 씨, 데려다줄게요.”

“피곤하잖아요. 그냥 주무세요.”

“좀 막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버스보단 빠를 겁니다.”

차민재가 까치집이 된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외투를 챙겨 입었다. 사실 평소에는 재언이 다니는 회사 근처에 레헬의 사무실이 있기 때문에 같이 출퇴근을 했었는데, 오늘은 차민재가 휴가였다.

재언이 미안한 마음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려도 이미 민재는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은 뒤였다. 이제 와서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재언은 눈 딱 감고 그의 선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주차장에 있는 차에 올라타 내비게이션에 회사 주소를 찍고 시동을 걸던 민재가 뜬금없이 어제 봤던 영화 이야기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좀비의 눈 색이 왜 탁한지 아십니까? 좀비는 죽은 몸이라 눈을 깜박이지 않는데, 눈동자에 뿌연 먼지가 쌓여서 그렇게 됐다는 게 정설이더군요.”

“오… 제법 현실 고증이 된 설정이었네요.”

그 대화를 시작으로 타락한 추기경이 부리는 망자와 좀비가 다른 점이 무엇일까, 라는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재언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제발 오늘 출근길이 덜 막혀 지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재언은 내비게이션에 찍힌 저 시간대로만 도착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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