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10분째 차가 움직이지 못했다.
‘지각 확정이구나.’
재언이 쓰라린 속을 달래며 창문을 열어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앞뒤로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이 도통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차민재가 히어로로 생활하면서 법을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하며 지키고 살아간다지만 교통체증에 앞에 있는 차를 들이박거나 억지로 밀고 가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교통 준법정신만은 투철해서 속도는 물론 신호도 잘 지키는 편이었다.
“…여기가 원래 좀 막히는 곳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출근 시간의 서울 시내 교통상황이 최악이긴 하지만 10분째 타이어가 조금도 굴러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출근 시간에서 15분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는 차가 많은가 봅니다. 아니면 앞에서 사고가 났거나… 이왕 지각인 거 팀장님께 연락드려 놨으니 천천히 갑시다.”
재언이 쓴웃음을 지으며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리는 민재를 다독였다. 그 이후로 정확히 15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결국 참지 못한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바빠 죽겠는데! 무슨 움직일 생각도 안 하고 있어!”
재언의 뒤에 있던 검은색 세단의 운전자가 밖으로 나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내뱉었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빽빽하게 멈춰 있는 차량의 행렬을 보며 담배를 뻑뻑 피웠다.
오도 가도 못하게 막힌 상황에 답답한지 주변의 다른 운전자들도 밖으로 나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막히네요.”
재언 또한 답답함에 그저 한숨만 쉬었다.
“앞차들 싹 밀어 버리고 싶어질 정도로요.”
혼자 중얼거리던 재언이 불길함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말의 내용을 그대로 이행해도 이상하지 않을 미친놈 한 명과 자식 일곱 명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간과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진짜 밀어 버리지 마시고요.”
재언이 빠르게 덧붙인 말에 차민재가 핸들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물론이죠.”
그가 짧게 대답하고서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앞차들이 슬슬 움직이고 있습니다. 길이 뚫렸나 봐요.”
그의 말대로 저 멀리 앞에서부터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였다. 뒤쪽에서 욕을 중얼거리며 담배를 피워 대던 남성도 허겁지겁 운전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타이어 바퀴가 굴러가는 느낌에 꽉 막힌 듯한 기분도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아침부터 겪은 심각한 교통체증에 기분이 저하될 뻔했다. 하지만 어제 본 좀비 영화가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동거 제안이 거절당한 차민재의 토라진 귀여운 얼굴을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출근은 팀장에게 미리 연락해 놓았고 어쩔 수 없으니 조심히 오라는 답장도 받아 두었다. 평소에 지각한 적이 거의 없을 만큼 근태가 좋아서 유하게 넘어가는 것인가 싶었다.
“…어? 진짜 무슨 사고라도 난 모양입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차가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는 도로 근처까지 왔을 때였다. 저 멀리서 교통경찰이 빨간색 야광봉을 흔들며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고속도로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창문에 검은색 테이프를 잔뜩 감아 놓은 회색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운전하던 민재가 무언가를 느낀 듯 날카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피 냄새.”
“네?”
“피 냄새가 진동하네요.”
그의 시선이 정차해 있는 회색 승용차를 향했다. 그 말에 재언은 교통경찰의 수신호를 받아 차가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동안 회색 승용차를 조금 더 유심히 관찰했다.
붉은색 물이 차 아래에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차민재의 말대로 약품 냄새 사이로 희미하게 피 냄새가 느껴졌다.
“…살인사건이라도 일어난 걸까요? 아니면 빌런들이 테러라도 저질렀나…….”
어쩐지 차가 막히는 게 심상치 않았다 했다. 재언은 찝찝한 마음으로 회색 승용차를 한 번 더 돌아봤다. 덩그러니 서 있는 차에서 어딘가 음산한 기운이 풍기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도착한 회사 건물 앞, 출근 시간에서 30분 이상 넘겨 버린 탓에 재언은 차가 멈추자마자 급하게 문을 열고 튀어 나갔다. 재언을 배웅하기 위해 운전석에서 내린 차민재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말을 걸었다.
“저는 볼일이 있어서 사무실에 있다가 데리러 올게요. 끝나면 연락해요.”
그의 눈앞에 불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평생 라이터를 쓸 일이 없겠다는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재언이 문득 아까 봤던 승용차를 떠올렸다.
“방금 그 사건을 조사해 보게요?”
“네. 궁금해서요.”
“아… 그래요. 그럼 끝나면 연락할게요. 그래도 볼일이 빨리 끝나면 먼저 가도 됩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차민재가 기다릴 것이라는 걸 아는 재언은 오늘도 그의 집에서 잘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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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상으로는 지각이 맞았지만, 지각으로 처리되지 않을 것 같았다.
“도로가 꽉 막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이번에 도로 통제 때문에 지각한 사원들을 취합해서 회사에 제출할 생각이니 이것 좀 써 주시면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나 참…….”
이번에 재언이 맡게 된 프로젝트의 팀장도 막혔던 그 도로를 이용했는지 재언과 비슷한 시간에 회사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어휴, 대한민국 서울이 무서워서 살겠어? 무슨 맨날 사건 사고가 일어나…….”
팀장이 돌아가자 남무혁이 너스레를 떨며 재언의 자리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이번에도 승진이 무산된 그는 자신보다 먼저 주임이 된 재언에게 질투심이 일어날 만할 텐데도 별로 개의치 않은 얼굴로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좋아하는 아이돌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고 사라지곤 했다.
오늘도 color’s의 옐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재언을 찾아왔을 확률이 높았다.
“신 주임님, 혹시 보셨습니까?”
“뭘요?”
“옐린이가 조연으로 나오는 영화요!”
“아, 봤습니다.”
“어때요? 우리 옐린이 연기 참 잘하죠? 안 본 사람들이 더 욕한다고…….”
“네. 나쁘지 않던데요?”
남무혁이 그것을 시작으로 이번에 옐린이 연기 학원에 등록했고 이 영화를 찍기 위해 클라이밍을 연습했었다는 것까지 쉬지 않고 속사포로 떠들어 댔다.
“와, 대단하네요.”
재언은 남무혁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컴퓨터를 켜고 업무 준비를 했다.
“어쩐지 많이 늘었더라고요.”
이런저런 호응을 해 주며 아이돌 이야기로 신이 난 남무혁이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남무혁은 한참 동안 넘쳐흐르는 마음을 충분히 쏟아 낸 뒤 그를 부르는 팀원의 목소리에 자리로 돌아갔다. 부서도 다른데 참 넉살 좋게 찾아오는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점심시간까지 별다른 사고 없이 순조롭게 업무를 처리했다. 임 대리가 책임자였던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완전히 끝났기에 해체되고 임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재언은 새롭게 만들어진 프로젝트에 몸담게 되었다.
그리고 새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신기하게도 지방에서 서울로 발령받아 온 김 대리였다. 김 대리 보존 법칙도 아니고 김 대리가 없어지니까 다른 김 대리가 나타난 셈이었다.
물론 지금의 김 대리는 저번에 있었던 무능하고 쓸모없는 김 대리와는 다르게 매우 유능하고 건실한 사람이었다. 운동을 좋아한다며 재언을 처음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 하던 그는 매장의 매니저였다가 본사로 스카우트되어 들어온 케이스였다.
30분이나 늦었지만, 지각 처리도 안 되었고 새로 들어온 김 대리는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프로젝트 준비까지 순조로웠다.
세 번 말해도 이해할까 말까 했던 예전 김 대리와는 달리 이번 김 대리는 한번 말하면 오히려 세 가지를 제안하는 만능 일꾼이었다. 게다가 팀원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신입이 실수할 때도 다독이며 진정시킬 줄 아는 아량을 베풀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자리에 앉은 재언에게 커피를 홀짝이던 박 과장이 심심한지 말을 걸었다.
“저기 고속도로 빠지는 사거리 쪽에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난리였다면서요. 발견 당시에도 하필 출근 시간이라서 막히는 게 장난 아니었다던데. 내 와이프가 주민센터에서 일하는데, 지금 민원이 장난 아니랍니다.”
“아, 네. 저도 그것 때문에 차가 막혀서 늦었습니다.”
“멀쩡한 대낮에 그것도 히어로 협회 본사가 떡하니 있는 곳에 살인사건이라니……. 요즘 빌런들이 왜 그렇게 과격한지 원.”
박 과장이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이건 내 처제 이야기인데요. 아, 와이프는 공무원이고 처제는 경찰이거든요. 아무튼 처제가 하는 말론 그 시체가 너무 끔찍해서 발견 당시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했단 겁니다. 차 안이 시뻘건 피로 가득했다고요.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창문이 다 피로 범벅되어서 가리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고 합니다.”
“어우, 대체 무슨 일이래요.”
옆에서 듣고 있던 손 주임이 끔찍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제 막 마흔 중반대의 나이인 그녀는 사내 평가는 좋지만, 수다스러운 게 가장 큰 흠인 사람이었다.
담력이 작은 것으로도 유명해 조금만 무서운 이야기가 나와도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아마 그녀에게는 이런 얘기도 아마 거북할 것이다.
“더 끔찍한 건 시신 상태라고 하던데, 꼭 사람이 잡아먹은 것처럼 이빨 자국이 뭉툭하게 남은 채 차 안에서 발견됐다는 겁니다.”
“으, 너무 무섭잖아요. 나 이번에 좀비 영화 봐서 무섭단 말이야…….”
“그러게요. 좀비라도 나타난 걸까요.”
재언이 두 사람의 호들갑에 쓰게 웃으며 대충 맞장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