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41화 (241/324)

241화

“여기 무전기입니다. 이 빨간 버튼을 누르면 보안실로 위치추적과 비상 알림이 가도록 설정해 놨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누르십시오.”

“네.”

“어머, 이번엔 재언 씨가 당번이구나. 수고해~.”

“네. 대리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지나가는 동료들이 건물 보안팀 직원에게 무전기를 건네받는 재언에게 하나둘씩 인사를 건넸다. 덩치가 제법 크고 무뚝뚝하게 생긴 젊은 보안팀 직원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재언이 묻지 않아도 될 만큼 세심하게 설명해 주고 챙겨 주었다.

설명을 다 듣고 무전기를 든 채 자리로 돌아가니 어제까지만 해도 야근에 찌들었던 동료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퇴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이 회사는 좀비가 몰려오든, 살인마가 출몰하든 전염병이 돌든 일단 출근부터 시키고 야근하게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네요.”

“히어로 협회에서 공문이 내려왔다면서요. 어기면 벌금이라는데 지들이 무슨 수로 버티겠어요.”

아주 오랜만에 기분 좋게 퇴근하는 동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사무실을 나가는 걸 확인한 뒤 재언도 슬슬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시각은 약 오후 7시 40분 정도. 오늘로 히어로 협회에서 비상사태 선언을 한 지 벌써 사흘째였다.

특히 히어로 협회 본부가 있는 강남구의 모든 시설, 사업체들은 오후 여덟 시부터 다음 날 오전 여덟 시까지 영업을 완전히 중단하고 고객, 종업원들을 모두 귀가시키라는 공문을 받았다.

이쪽 지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만 총 일곱 건이었다. 비상사태 선언 이후의 사흘 동안 시체 세 구가 더 나오면서 경찰과 히어로협회는 아예 해가 질 무렵부터 밖에서 시민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게끔 감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재언이 다니는 회사는 비상사태 선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원들을 야근시키려다가 걸려 벌금을 무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퇴근시키고 있었다.

돈 조금 더 벌려다가 700억 원 가까이 되는 어마어마한 벌금을 냈다던데,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었다.

사원들 입장에선 잇따른 살인사건에 불안해했지만, 일찍 퇴근하는 건 매우 환영했다. 물론 사건이 작은 사건이 아닌 만큼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헷갈려 했다.

재언의 회사가 있는 건물 측에선 7시 40분에 모두 퇴근한 뒤, 20분 동안 돌아다니며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각 층에서 한 명씩 전담해 주었으면 한다고 공문을 보냈다.

40층 높이의 건물을 보안팀 인원만으로는 매번 일일이 수색할 수 없다며 협조를 부탁한 것이다. 해당 작업은 부서의 신체 건강한 젊은 남자 사원들 위주로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고 오늘은 재언의 차례였다.

재언은 퇴근과 순찰 준비를 끝내고 사람들이 얼른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면서 무전기를 손에 든 채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고 묘하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결국. 찰칵거리는 소리에 이상한 느낌을 받은 재언이 창문 밖을 향했던 고개를 돌렸다. 사진 찍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사원 몇 명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저들끼리 소곤거리다가 재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그렇게 마치 우리 속의 원숭이가 된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이 더 이상 없을 때까지 기다린 뒤 순찰을 시작했다.

일단 자신이 있었던 사무실의 전등을 끄면서 꽤 넓은 내부를 한 바퀴 돌았다. 다들 회사에 일분일초도 남아 있고 싶지 않았는지 건물엔 적막이 흘렀다.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사람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재언은 조금 더 정확하게 확인해 보기 위해 엔레이드맨의 도움을 받기까지 했다.

“엔레이드맨. 여기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니?”

“아니요, 아버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구역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지만, 복도에 CCTV가 설치되어 있을 테니 노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고 설렁설렁 점검하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대충 돌아다니며 전등을 끄고 다니던 재언은 20분이 지나자마자 1층으로 내려와 무전기를 보안팀에 가져다주고 흡연실로 들어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핸드폰을 확인하려 뒷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손에 든 가방까지 싹 확인했는데도 보이지 않는 핸드폰에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퇴근 준비를 하면서 책상 위에 핸드폰을 두고 그대로 나온 듯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너무 귀찮아서 그냥 갈까 하다가 내일 아침 기상 알람도 그렇고 오늘 차민재가 데리러 갈 테니 연락 달라고 말한 게 떠올랐다.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다.

사무실로 직접 가 볼까도 했지만 그러다 길이 엇갈리기라도 하면 더 귀찮아질 게 뻔했다. 결국, 재언은 크게 한숨을 쉬며 건물로 다시 들어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건물 안은 엄청나게 어두침침했다. 이 시간대에 사람이 없다는 게 감회가 새롭긴 한데, 어둠이 주는 공포감도 상당했다.

머뭇거리는 발을 겨우 움직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전등을 꼼꼼히 끄고 온 바람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재언은 비상구와 엘리베이터 불빛에 의존해 겨우 자리를 찾아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고 익숙한 번호를 찾아 발신을 눌렀는데 핸드폰에서는 통화 수신음도 나오지 않고 곧바로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엥?”

혹시 차민재가 핸드폰 전원을 꺼 놓은 건지 다시 통화를 눌러 봤지만 똑같았다. 핸드폰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황당하게도 ‘통화권 이탈’과 ‘전원을 다시 켜 주세요’라는 문구가 작게 생겨 있었다.

핸드폰이 고장 난 것인가 싶었던 재언은 일단 건물 밖으로 나가서 다시 통화를 시도해 볼 생각으로 핸드폰을 손에 쥐고 걸음을 옮겼다. 유난히 걸음 소리가 복도에 크게 들리는 것 같긴 한데 기분 탓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겨우 찾아온 재언은 엘리베이터 문을 열기 위해 버튼이 위치한 곳을 눌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가락에 매끈한 벽만 만져졌다.

의아해하며 핸드폰을 켜고 플래시를 비춘 재언의 입에서 의문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엥? 이게 뭐야?”

플래시가 비친 벽에 엘리베이터를 열 수 있는 위아래 버튼이 홀랑 사라진 상태였다. 분명 눈앞에 여섯 대의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어느 것도 열 수 없게 되었다.

해괴한 현상에 재언은 어지러움을 느끼고 이마를 짚었다. 왠지 모르게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플래시 빛이 한정되어 있고 엘리베이터 버튼의 위치를 잘못 알아서 그런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복도에 있는 전등을 켜는 스위치를 찾아 올려 보았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위치가 on이라고 쓰여 있는 글씨 쪽으로 움직였는데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어둠에 싸여 있는 복도는 적막함이 흘렀다.

“…이번 럭키 가이 능력 증명은 어떻게 하지?”

신재언이 럭키 가이로 매달 50만 원씩 연금을 받는 것처럼 정부에 등록된 능력자들은 모두 연금을 받는다. 물리적이지 않은 능력들, 정신계나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들도 히어로 협회가 내세운 기준을 통과해야 능력으로 인정받았다.

3년에 한 번씩 증명을 갱신하는데, 재언이 마지막으로 받았던 증명이 대략 2년 반 정도 전이었으니 곧 갱신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럭키 가이는커녕 언럭키 가이로 바뀔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신재언의 옆에서 환한 빛이 펑 터졌다. 이윽고 새하얀 신부복을 입고 머리 위에 후광을 단 타락한 추기경이 재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가진 자체 발광 덕분에 시야가 환해졌다. 백금색 지팡이를 들고 피눈물을 흘리며 타락한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곳은 사기로 넘쳐납니다. 게다가 저 어둠 끝에서 불길한 기운들이 일렁이고 있군요…….”

타락한 추기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 속에 잠긴 복도 끝에서 찰박, 찰박하는 물기 어린 걸음 소리가 들렸다. 맨발로 젖은 땅을 밟은 소리가 기괴하게 복도를 울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괴기스러운 광경이었다. 점점 다가오는 것의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유심히 살펴보던 재언은 저도 모르게 기겁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좀비다!”

동공이 보이지 않아 흰자밖에 없는 눈동자와 온몸에 피 칠갑하고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흉터를 가진 사람이었다. 여기저기 물어뜯긴 흔적이 있는, 죽은 사람 말이다.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 앞에서 이런 잔재주를 부리다니……. 사특한 자들을 벌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의 친구 베드로여…….”

타락한 추기경이 피눈물을 흘리며 누군가를 부르자 그림자 속에서 깨끗한 신부복을 입은 망자가 튀어나왔다.

창백한 피부에 푸른 반점이 있는 건 그가 평소 부리는 망자와 다를 게 없지만, 타락한 추기경이 가진 것과 똑같은 지팡이를 들고 있는 망자는 무언가 달랐다.

모습이 드러난 망자, 베드로는 이름에 담긴 뜻 그대로 타락한 추기경을 배신했던 남자였다. 남자는 친구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나락으로 떨어진 타락한 추기경을 비웃었다.

결국, 타락한 추기경을 목숨만큼 사랑했던 성기사마저 속이고 두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바티칸의 고위 사제였다.

능력을 각성한 타락한 추기경이 모든 원흉인 바티칸의 사제들을 모조리 쓸어 죽이고 망자로 데리고 다녔는데 베드로도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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