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민재의 집에 오면 재언은 항상 나서서 분리수거를 도맡았다. 분리수거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 엄격하게 배웠던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인의 집에 와서도 배달 음식을 먹은 뒤에 묻어 있는 음식물을 깨끗하게 씻고 라벨을 떼어 내 하나하나 분리했다. 차민재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내뱉으며 손뼉을 칠만큼 완벽한 분리수거 솜씨였다.
재활용 쓰레기를 열심히 분리하는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아유, 훤칠하니 잘생겼네. 어느 동 살아요?”
그때 웬 중년 여성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걸었다. 이웃 주민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는 편인지 그녀는 분리수거를 하러 나온 재언의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아니고 애인이 여기에 삽니다.”
재언은 대답을 듣자마자 차게 식어 가는 눈빛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애써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재언의 웃는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의 표정이 왜인지 인자하게 변했다. ‘그래, 얼굴이 잘생겼으면 다 용서되지…….’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말투에 재언은 쓰게 웃으며 분리수거를 다 끝냈지만,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저쪽에 상가 보이지? 저기에 김치찌개가 싸고 맛있는데 여자친구랑 꼭 가 봐요.”
“네. 가 볼게요.”
“그리고 저기 있는 빵집 빵도 맛있어요.”
“아, 저도 가 봤습니다. 사장님께서 장사를 접으신다던데…….”
그녀의 말에 맞장구쳐 주며 분리수거 쓰레기를 담아 두었던 커다란 가방을 가지런히 접었다.
“아휴… 그 젊은 부부가 고생이 많았지……. 하필 그런 사람이 옆집이라서. 밖에 말이라도 새어나갈까 무섭다니까. 이러다 집값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런 사람이요?”
“…어디 소문내지 말아요?”
재언은 날카롭게 대답을 종용하는 여성의 기백에 눌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어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목소리를 낮추고 작게 속삭였다.
“정말. 이사 가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그 사람, 아주 해괴한 망상 병자야. 옆집 부부가 살인마에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고 소리치고 다니고, 맞은편에 사는 여자가 사실은 시체라느니 뭐니. 오밤중에 경찰까지 왔었다니까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몸서리를 쳤다.
“그것도 모자라서 빵집 사장 내외 집 주변에 오물을 뿌리질 않나… 몰래 집 안에 들어가려고 하질 않나……. 정말 뻔뻔하고 이상한 미친놈이지 않아요?”
재언이나 민재는 모르고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정도로 난리였던 모양이다.
여성은 이사 가야 할 쪽은 그 스토커 망상 종자인데 왜 멀쩡히 가게를 잘 꾸려 오던 젊은 사장 부부가 이사를 가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다며 연신 혀를 끌끌 찼다.
“그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이랍니까?”
“글쎄… 돈이 많은 건 알겠는데. 뭐라더라. 작가? 아무튼 조심해요. 아휴, 밖에서 너무 떠들었네. 그런 이상한 놈이 산다고 소문나면 집값 떨어지니까 아저씨도 비밀로 좀 해 줘요.”
아저씨가 아니라는 반박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재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황당한 얼굴로 혼자 남겨진 재언은 10초 정도 멍하니 서 있다가 다리를 움직여 민재의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중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은 솜뭉치가 재언의 종아리와 발목에 머리를 비비며 길게 울었다. 허리를 숙이고 배추를 들어서 안아 쓰다듬으며 거실로 들어온 재언은 분리수거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고이 접어 가지고 왔던 재활용 가방을 펼쳤다.
그리고 잠시 후, 외출했다가 돌아온 차민재에게 정신이 이상하다고 했던 남자의 정체를 들을 수 있었다.
“네? 그 남자가 ‘위너좀비’의 원작 작가라고요?”
놀란 재언의 물음에 차민재가 입고 있던 얇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너좀비’는 얼마 전에 재언이 시청했던 영화의 원작 소설이었다. 소설 자체는 엄청나게 유명한 건 아니었지만, 고어 공포 소설 쪽에서는 독특한 세계관과 잘 짜인 스토리로 충성 독자가 많은 마이너한 작품이었다.
영화를 만든 신인 감독도 해당 작가의 팬이라고 인터뷰에서 직접 언급까지 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소설 원작을 찾아보려는 일반인이 늘어나 몇 주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끔 있어요. 한 작품에 깊게 빠져서 능력을 각성하는 창작자가요. 재능이 있는 천재들이 대부분 그런 욕망을 각성시키기도 하는데……. 재언 씨도 한번 휘말린 적 있잖아요?”
“아.”
PC 배틀 게임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능력을 각성한 학생 때문에 게임 세계에 휘말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각성한 능력자, 이서연은 현재 능력 억제 아이템을 착용하고 능력자 특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들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그녀가 각성했을 때 구현했던 게임 세계 속에서의 현실감을 떠올린다면 ‘위너좀비’ 작가의 각성은 그보다 더 위험해질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하필 고어 공포 소설을 만들어 내는 작가가 자신이 쓴 글을 현실화한다니, 생각만으로도 귀찮은 능력이었다.
“…과연, 좀 수상하긴 하네요…….”
“히어로 협회에서도 그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영화화되어 흥행한 작품이 좀비물이니까요.”
히어로 협회가 마냥 노는 건 아니었는지 범인이 좀비와 관련된 능력자라는 것까지 밝혀낸 듯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차민재가 말한 정보는 아직 기밀인가 보다. 뉴스나 인터넷에선 히어로 협회나 경찰은 의문의 사건이 이어지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느냔 기사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수상하지만 바로 체포하지 않는 건 그의 알리바이가 제법 확실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한창 이름이 알려지는 작가이다 보니 강제로 수사했을 때 말이 많아지는 걸 우려한 거죠.”
“내일 서점에 가서 그 작가 책을 찾아봐야겠어요. 저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게 이쪽에서도 한 명이 지금 이를 박박 갈고 있거든요.”
재언이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범인을 허무하게 놓친 타락한 추기경이 지금도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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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왕래가 잦은 역 근처 서점.
차민재와 데이트도 즐길 겸 서점에 들어간 재언은 서점 한쪽을 차지한 소설책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 영화화한 포스터가 크게 세워져 있고 한쪽 책장이 모두 ‘위너좀비’로 가득했다.
꽤 잘 팔리는 편인지 진열대 위에 책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재언이 포스터를 구경하는 동안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13권이 더 팔렸다.
“히키 홈?”
작품 제목만 알고 있어서 몰랐는데, 작가 필명이 히키home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히키코모리라는 단어를 말장난같이 쓴 것이 아닐까 싶었다.
책을 들어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쳐본 재언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바로 보이는 일러스트 그림이 상당히 잔혹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좀비가 사람을 뜯어먹고 있는 적나라한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를 한 장 넘기자 섬뜩한 눈알이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는 그림이 나왔다.
책 표지에 빨간 19세 딱지가 붙어 있더니 어지간히 잔인한 소설인 것 같았다.
재언은 선 채로 소설을 대충 읽다가 여기선 느긋하게 읽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계산해서 들고나가기로 했다. 아주 잠깐 봤지만 스토리 진행은 영화와 거의 흡사했다.
능력 없는 주인공이 냉장고에 먹을 것이 떨어져 갈 때쯤 오랜만에 마트나 가 볼까 하는 독백 후에 좀비가 거리를 점령하는 것으로 소설이 시작되었다.
주인공에 대한 소개가 진행되는 3페이지 분량에 깨물린 채 죽은 시체들이 도시 곳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암시와 함께 말이다.
“그런 사람이 왜 옆집의 젊은 부부한테 그러는 걸까요? 경찰도 부르고 스토킹까지 했다던데요. 주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한가 봅니다.”
“협회 추측으로는 무의식 각성자가 아닐까 예상하더군요.”
능력이 폭주하며 각성하는 능력자가 있는 반면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각성하는 능력자도 존재했다. 능력자 본인도 각성했는지 모르는 경우인데, 사실 위험한 능력일수록 이쪽의 피해가 훨씬 컸다.
만약 작가가 자신이 쓴 소설에 빠져서 옆집 부부를 살인마로, 앞집에 사는 멀쩡한 사람이 좀비가 되었다고 망상하고 있는 거라면? 그래서 이번 사건들이 그의 작품 세계관이 무의식에 능력으로 반영되었던 거라면?
하지만 그렇다기에 회사에서 재언을 공격하려 했던 좀비들이 갑자기 없어졌던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언은 이번 사건은 골치가 상당히 아플 것 같은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책을 샀으니까 슬슬 밥이라도 먹죠. 혹시 닭갈비 괜찮습니까?”
“상관없어요.”
“오는 길에 닭갈비 집을 봤거든요. 계속 생각나는 게 오늘 먹어야겠습니다.”
가방에 책을 넣고 차민재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마자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민재가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 액정에는 이레일의 이름이 떠 있었다.
“말해.”
차민재는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시비라도 걸듯이 단 두 마디만을 말했다. 하지만 레헬의 사이드킥으로 3년간 온갖 고생을 해 왔던 이레일은 굴하지 않고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하는 중이었다.
통화 중인 차민재를 이끌며 닭갈비 가게의 간판을 찾던 재언은 저 멀리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운 기운에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으… 으겍… 으극…….”
“어?”
“으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상처투성이의 어떤 남자가 사지를 뒤틀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젊은 남성을 붙잡고 목을 물어뜯었다.
주변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하는 사이 괴한에게 물려 피를 철철 흘린 채 바닥에 쓰러졌던 젊은 남성이 흰자를 희번덕 치켜뜨며 마찬가지로 사지를 잔뜩 뒤틀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마치 영화에서나 봤던 좀비처럼 도망가는 여성의 신발을 붙잡아 넘어트린 다음 그 위에 올라탔다.
“뭐, 뭐야?”
좀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