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44화 (244/324)

244화

“재언 씨, 잠시 물러나 계세요.”

차민재가 재언의 어깨를 잡고 뒤로 물렸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번화가에서 오로지 범인만을 노리고 공격하는 건 고도의 집중과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지만 히어로 레헬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에 민재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 안 됩니다, 사장님!

“…….”

어찌나 크게 소리를 쳤는지 통화 모드가 스피커도 아닌데 이레일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재언의 귀에도 날아와 박혔다.

- 그 사람들은 ‘어떤’ 빌런에게 정신적 조종을 당하는 피해자들입니다! 치명상을 입지 않은 감염자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사장님께서 직접 손을 쓰신다면 나중에 피곤해질 겁니다. 협회에서는 일단 포획을 목표로…….

“뭐? 지금 제압하지 않으면 피해가 더 커지는데?”

- 지금 계신 곳으로 김윤경 대위가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장님께서는 물러나 주세요. 사람을 무는 행위로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 감염을 전파해 조종하는 악질적인 능력입니다. 범인은 높은 확률로 사람의 공포심을 양식 삼아 자신의 능력을 발동하는 정신계 능력자일 것 같다고 합니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이레일의 말에 재언은 상황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좀비 같은 몰골로 사람들을 공격하는 저들 또한 빌런의 정신 지배를 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이란 소리였다.

재언은 어쩌면 저 중에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단 말을 듣자마자 ‘히어로’ 레드 헬 파이어는 나설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좀비가 된 이들을 레헬이 모두 태워 죽여 버린다면, 다른 사람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아마도 빌런을 태워 죽였던 것보다도 훨씬 커다란 후폭풍이 불어닥칠 것은 틀림없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좀비들에게 물어뜯겨 피해자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레헬이 다른 멀쩡한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게 지금은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들은 히어로에게 완벽한 정의와 도덕을 원했다. 그들은 레헬이 저 감염자들을 죽이는 순간 히어로의 자질에 적합하지 않다며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이게 바로 빌런이었던 ‘레헬’과 히어로인 ‘레헬’이 가진 차이였다.

- 이 사태를 잠재워 줄 수 있는 사람은 현재 김윤경 대위, 단 한 명뿐입니다. 그녀가 감염자들이 날뛰는 걸 제압한 뒤에 협회가 생존자들은 치료를 위해 데려갈 겁니다.

빌런이었던 ‘레헬’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분방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무적이었다. 반면 히어로 ‘레헬’은 타인을 지키려고 능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 발목을 잡는 게 ‘정의’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민재 씨, 일단 우리도 자리를 피합시다. 여기선 사람이 많아 충분히 힘을 쓸 수도 없어요. 이레일도 생각이 있으니 우리 보고 물러나라고 한 거겠죠. 저쪽 건물로 감염자들을 몰아넣을 방법이나 찾아봅시다.”

재언이 주말이라 비어 있는 작은 건물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건물 입구에서 감염자들이 걸어 다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빈 건물이라고 하긴 애매하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멀쩡한 사람들의 시선은 피할 수 있었다. 번화가 한복판보다는 움직이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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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히어로 협회가 설립되기 전에는 능력자 빌런들이 도시 한복판을 테러하는 일이 일상일 만큼 잦았다. 강한 능력을 가진 몇 명의 빌런이 대한민국을 집어삼키다시피 해도 정부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 설립 초창기에조차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능력자들이 협회에 가입하기보다는 본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빌런들에게 시달리며 마음속 깊이 복수심과 정의로움을 싹 틔우던 2세대 능력자들이 히어로가 되어 맞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세계 최강이라 일컫는 레드-헬-파이어의 등장과 함께 대한민국은 세계 최다 S급 히어로 보유국이 되었다. 그 이후로 도심 한가운데에 이 정도로 크게 테러를 저지른 빌런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먼저 파견된 급이 낮은 히어로 몇 명이 뒤쪽에서 시민들의 대피를 돕기 시작했다. 곧이어 넓은 로터리에 가득했던 사람들이 감염자들을 피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그동안에도 이레일은 차민재에게 제발 무리하지 말고 김윤경 대위의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있어 달라는 말만 끊임없이 반복했다.

민재는 대답해 주지도 않으면서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이레일이 상사 다루기가 수준급인 건지 차민재가 나름대로 이레일의 말을 들어주는 건지 잘 모르겠다.

감염자, 통칭 ‘좀비’라고 부르는 희생자들은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히고 온몸이 물어뜯긴 흔적들로 가득했다. 흰자위를 잔뜩 드러낸 채 움직이고 있는 좀비 중 몇 명은 도저히 살릴 방법이 없을 것만 같은 참혹한 몰골이었다.

그들의 발치에는 아직 완전히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쓰러져 경련하는 중이었다.

“으…….”

너 나 할 것 없이 끔찍한 모습에 재언은 혀를 차며 고개를 털었다. 사람이 사람을 이로 물어뜯는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란했다.

마치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식도에서 닭갈비가 올라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붉은 양념에 닭고기와 야채… 한동안 닭갈비는 쳐다보지도 못할 것 같다.

“아. 민재 씨, 좀비들이 저쪽으로 몰려가고 있어요.”

사람들이 대피하는 방향으로 슬금슬금 발길을 돌리는 좀비 무리를 발견한 재언이 그쪽으로 손가락질했다. 그러자 좀비 무리의 눈앞에 레헬의 헬파이어가 작게 피어올랐다.

재언은 사람들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이레일의 걱정스러운 당부가 떠올라 레헬을 쳐다봤다. 다행히도 그는 헬파이어를 막무가내로 사용해 태워 죽일 생각은 없는 듯 불꽃을 좌우로 흔들기만 했다.

일렁이는 불덩어리의 열기와 밝은 빛에 좀비들의 눈동자가 불꽃을 따라 흔들렸다. 눈앞의 불덩어리를 향해 좀비들이 움직이는 걸 확인한 레헬은 불꽃을 천천히 이동시켜 자신들이 있는 건물 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리게 한 뒤 불꽃을 없애 버렸다.

우득, 소리를 내며 돌아간 머리들을 보고 있으려니 저들이 과연 정신 지배에서 벗어나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빠른 화면 전환 덕분에 끔찍한 좀비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현실은 피해자들이 빌런의 능력에 감염되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불분명해 매우 참혹한 광경이었다.

거기다가 아무리 이쪽으로 좀비들을 유인했다 하더라도 사냥감을 물색하던 좀비들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광경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정확히는 달려오는 감염자가 네 명뿐이지만, 재언은 기겁한 표정으로 차민재의 뒤를 따라 비어 있는 건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재언은 사실 공포 영화는 재밌게 시청해도 공포 게임에는 영 젬병인 남자였다. 쫓기는 듯한 감각을 몸서리칠 만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과 좀비들이 건물에 들어와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지자마자 틈틈이 기회를 노리고 있던 타락한 추기경이 신재언의 그림자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저번에 보여드린 추태를 만회하여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의 신뢰를 되찾아오도록 합시다, 나의 친구여. 내가 힘을 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빌딩 전체가 환해질 정도로 빛나는 후광을 가진 채 좀비들의 앞에 선 타락한 추기경의 모습은 마치 그들을 구원하러 나온 성자 같아 보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소환된 망자 베드로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바티칸에서 악마를 소탕하기 위해 파견된 고위 사제들은 아닐까 착각하게끔 보였다.

그저 타락한 추기경이 올리는 기도는 신이 아닌 신재언을 향한 추앙이었지만 말이다.

“타락한 추기경, 절대로 죽이면 안 돼!”

재언이 외치는 말에 타락한 추기경은 왠지 모르게 잔뜩 감동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런 사특한 자들 또한 자비롭게 품으려 하시는 건 아버지께서 내리신 시련. 저 타락한 추기경이 기쁜 마음으로 섬기겠습니다.”

“…아니, 그런 뜻은 없는데…….”

모습을 드러낸 타락한 추기경을 재언의 옆에 있던 차민재가 굉장히 흥미로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재언은 그의 시선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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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때아닌 좀비의 습격으로 떠들썩하고 재언이 타락한 추기경에게 명령을 내리는 동안 지금 막 공항에 도착한 어린 소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검은색 후드티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년이 짙은 남색 머리카락에 후드 모자 안에서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별을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리던 소년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라, 라오! 신부님께서 떨어지지 말, 말라고 하셨어!”

그러자 순식간에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라앉은 어두운 남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소년은 몸을 돌려 또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여기에, 파, 파, 파견을 나온 거니까 의젓하게 신부님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안 돼! 여기엔, 그, 그, 사악한 악마가 살고 있다고 했어.”

“다크 카오스라고. 이 멍청이야.”

“그래! 그 악마를…….”

말을 심하게 더듬는 여자아이를 옆에 서 있던 또래보다 덩치가 큰 남자아이가 타박했다. 이 어린 신도들은 바티칸이 직접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지내는 소년, 소녀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오로지 신이 아닌 지옥의 길잡이를 찾아 헤매던 망자가 타락한 자의 축복을 받은 금빛 눈동자를 숨기며 기도했다.

“그대의 발걸음이 지옥을 향한다면, 내가 반드시 그대를 찾아 따를 테니…….”

‘울지 마세요, 아름다운 나의 성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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