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차민재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에렌 성이 조종하는 망자를 바라보았다.
“저게 바티칸에서 주장하는 타락한 추기경의 세 가지 죄악 중 하나로군요.”
차민재의 중얼거림에 재언이 턱을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에렌 성은 능력을 각성하기 전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추기경이었으니 차민재가 그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피의 바티칸 살육’ 이후 바티칸에서 에렌 성의 죄는 신께 전부 고하기도 어려울 만큼 추악하며 셀 수 없을 정도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악 세 가지를 참담한 심정으로 공개한다고 발표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에렌 성은 감히 교황의 자랑이자 신의 아들인 성기사 바실리오를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또한 자신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 주었던 성기사를 배신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시신을 망자로 만들어 끌고 다니는 참혹한 짓을 저질렀다.
또한 에렌 성은 절친한 친우였던 베드로의 목숨마저 앗아 갔다. …(중략)… 이것이 에렌 성이 저지른,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다.]
“타락하여 독실한 신자이자 고위 사제인 유일한 벗을 죽여 그 시신을 욕보이기 위해 망자로 만들어 데리고 다닌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었죠.”
“그렇게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차민재도 딱히 바티칸의 주장을 전부 믿는 건 아닌지 별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재언은 그 모습을 생경한 기분으로 바라보며 타락한 추기경이 능력을 각성하고 바티칸으로 돌아갔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에렌 성이 황산에 일그러진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전보다 더욱 반짝이고 아름다워진 외모로 돌아오자 처음엔 많은 사람이 넋을 놓고 기적이라며 그를 추앙했다. 신께서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윽고 그들은 그의 멀쩡한 외모가 신께서 사랑으로 기적을 내리신 게 아니라 악마와 영혼을 바꿔 만들어 낸 타락의 증거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물론 그들 모두 에렌 성이 황산을 뒤집어쓰고 얼굴이 녹아내리는 일을 당했을 땐 뒤에서 괴물이라 부르며 업신여기고 아름다웠던 이의 나락을 즐겼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에렌 성이 타락했고 그가 바티칸의 사제들을 학살했다는 것. 그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이후에는 그의 유일한 벗, 베드로가 타락한 추기경의 학살에 용감하게 대항하다가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영웅담까지 퍼졌다.
그때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재언으로선 만들어진 날조가 진실처럼 퍼지는 광경을 보며 선동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베드로는 에렌 성을 팔아넘기고 바실리오를 속여 죽게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고위 사제로 승급했다.
새하얀 사제복을 입었음에도 마지막까지 싸우기는 무슨, 타락한 추기경과 마주치자마자 벌벌 떨며 납작 엎드렸다.
“에, 에렌 성… 용서해 주세요. 우리는… 우리는 정말 친했잖아요. 당신은 내게 자비를 베풀어 줄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 말을 들은 타락한 추기경이 크게 화를 내며 들고 있던 지팡이로 남자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야말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 뒤로 재언은 타락한 추기경이 남자의 시신에 무슨 짓이라도 할까 싶어서 슬그머니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베드로는 망자가 되면서 살아생전 가졌던 것보다 더욱 많은 양의 신성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에렌 성을 질투하고 끊임없이 미워해 입을 잘못 놀린 자의 말로였다.
망자가 된 베드로의 신성력이 에렌 성과 필적할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티칸은 그가 살아생전 볼품없는 힘을 가진 일개 사제였다는 사실을 지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친구를 배신했던 남자는 에렌 성과 비슷한 힘을 가진 바티칸의 보물이 되어 있었다.
그 이후에도 바티칸은 에렌 성의 명예를 깎아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았다.
바실리오가 다시 살아나 에렌 성의 명예를 되찾아 주지 않는 이상, 타락한 추기경은 영원히 타락한 신부로서 망자들과 지옥 길을 함께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일의 전말을 아는 재언으로선 답답하고 씁쓸한 마음뿐이었다.
“알려진 만큼 타락한 추기경이 최악인 건 아닙니다. 저는 그가 어쩔 수 없는 복수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니까요.”
재언은 억울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타락한 추기경의 편을 들면서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그러자 민재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입을 열었다.
“전 그놈들을 믿지 않습니다. 신이 선택한 건 그들이 아니라 저 사내니까요. 사실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이 정도 되면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의 ‘정의’가 무엇인지 심히 궁금해진다.
어쨌든 대중들의 비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좀비를 치료해 살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듣고 힘을 조절하는 걸 보면 그의 정의도 마냥 생각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재언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흔들며 타락한 추기경이 부리는 고위급 사제와 감염된 좀비의 대결에 눈길을 돌렸다.
총 네 명의 좀비와 망자 한 명의 대결 구도는 수적으로는 불리해 보이지만, 타락한 추기경의 힘은 S급 히어로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능력자이니 그가 당할 리 없었다.
타락한 추기경은 위대하신 아버지의 앞에서 좀비 따위를 놓쳤던 굴욕을 만회하려는 듯 전보다 더욱더 강하게 좀비들을 몰아붙였다. 좀비 두 명이 타락한 추기경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자 베드로가 두 팔을 교차한 자세로 좀비의 앞을 막아 세웠다.
베드로는 물린 손목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다른 쪽 손으로 들고 있던 총을 꺼내 좀비의 턱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에서 터져 나온 새하얀 빛이 감염자의 머리를 세로로 관통했다.
지금 쏜 것은 총알이 아니라 신성력이 응집시켜 놓은 힘이었다. 이건 네크로맨서나 신성력과 반대되는 힘을 가진 능력자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신의 탄환’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가진 이 총알이 마냥 과장은 아닌지 흰자위를 번뜩이던 감염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보통 사람처럼 돌아왔다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그런 감염자들을 살펴보던 타락한 추기경이 피눈물을 흘리며 재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 이 남자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었어?”
“네. 그를 지배하던 힘이 끝나자마자 숨을 거뒀습니다. 치명상을 입었는데 조종당해 여기까지 움직였던 모양이군요.”
“끔찍하군.”
재언이 몸서리를 치는 동안에 베드로가 다른 감염자들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감염자들이 하나둘씩 일어서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타락한 추기경은 그들 중 두 명을 쫓아가 제압했지만, 마찬가지로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두 다리가 멀쩡한 마지막 좀비 한 명의 도망치는 속도로 봤을 때 살아 있을 확률이 가장 높긴 했지만, 저대로 방치했다간 그 또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건물 밖으로 나간 좀비를 쫓기에는 여기저기에 히어로들이 포진해 있어서 위험했다.
“타락한 추기경, 돌아와!”
재언은 더 이상 쫓아 나가지 말라는 의미로 타락한 추기경을 불러 세웠다. 묘하게 불길한 기분이 느껴지는 직감 때문이었다.
타락한 추기경이 망자와 함께 사라짐과 동시에 도망쳐 나간 좀비의 머리 위로 커다란 포획망이 덮쳐졌다. 역시나 바깥을 살펴보자 군 차량이 빼곡하게 건물을 에워싸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중이었다.
“김윤경이다!”
삼삼오오 대피해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군 소속의 S급 히어로와 동일한 힘을 가진 능력자. 정부에서 애지중지한다는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능력자 군인이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열광하는 기색으로 바뀌었다. 아마 그녀가 전직 아이돌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을 구해 줄 유일한 영웅이어서였다.
애초에 연예계에 관심이 없었던 재언은 김윤경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반면 차민재는 대한민국이 떠들썩해질 정도로 시끄러운 만남을 그녀와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빌런들을 과잉 진압하고 범죄와 악법을 교묘하게 넘나들며 이용하는 레헬을 진압하려다가 왼쪽 손목이 잘렸었기 때문이다.
그때 레헬은 인터넷상의 온갖 곳에서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다. 그래 봤자 인터넷과 별로 친하지도 않은 그가 신경 쓸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이윽고 재언은 창문 너머로 김윤경이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차량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를 뒤로 묶은 그녀는 생각보다 앳되어 보이지만, 키가 크고 덩치도 제법 좋았다. 매섭고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는 김윤경을 보며 재언은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불현듯 ‘저쪽 세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재언이 경악한 얼굴로 차민재에게 물었다.
“그녀가 어떻게 정부 소속이 되었죠?”
“…글쎄요.”
‘저쪽 세계’에서의 그녀는 ‘신재언’의 오른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