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그녀는 어딘가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단정하면서도 예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표정으로 싸늘한 눈빛을 보내는 게 상대방에게 저절로 위압감을 가지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재언이 기억하는 김윤경은 저런 얼굴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저쪽 세계’에서는 그녀의 본명을 기억하지 못했었다.
당시 신재언은 해안가 절벽 근처를 지나가던 중에 벼랑 끝에서 피어오르는 증오에 흥미를 느끼고 발길을 돌렸었다.
그녀는 해안가 절벽에서 피범벅이 된 얼굴로 울부짖고 있었는데, 언뜻 봐도 상당히 불량해 보이는 남자들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피하면서 한참 동안 비명을 토해 내며 우는 그녀에게서 증오의 기운이 피어오른 것이었다.
이미 능력을 각성해 이용 가치가 떨어지는 그녀에겐 관심이 없었지만, 신재언은 드물게 변덕을 부려 덩치 큰 남자들에게서 그녀를 구해 주었다.
재언이 봤을 때 ‘평행세계’의 다크 카오스 신재언은 소설에서나 보았던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어둠에 빠진 사람처럼 온갖 똥폼을 다 잡고 세상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얹은 듯 구는 놈이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그녀를 쫓던 덩치 중에 가장 젊고 뺀질거리게 생긴 놈이 남자친구였다. 그는 재벌 3세로 촬영차 갔던 해외 촬영지에서 만남이 인연이 되어 연애를 시작했었단다.
그는 무명 아이돌이었던 김윤경의 뒤를 든든하게 내조해 주는 듯하다가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곧바로 이별을 통보했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납득하지 못한 그녀가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말하자 그는 받아들이는 척하다가 여행을 핑계로 이곳까지 그녀를 유인해 냈다. 납치를 시도하려 한 게 분명했다.
그녀는 도망치며 반항하던 도중 얼굴에 큰 흉터를 입고 능력까지 각성했다. 그녀의 저항이 꽤 거세지자 남자는 자신이 고용한 불량배들에게 그녀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려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필 그 순간에 신재언이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고 있었고 말이다.
결국, 재벌 3세와 불량배들은 신재언에 의해 그녀 대신 바다에 빠져 죽었다. 모든 소란이 가라앉은 뒤 신재언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절벽 끝에 서서 잔잔하게 파도가 치는 바다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이내 광대 가면을 쓴 남자가 신재언의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잡고 이끌었다. 신재언은 광대 가면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어깨를 잡은 손을 차갑게 쳐 낸 뒤 뒤를 돌아 텅 비어 있는 푸른색 눈동자로 김윤경을 쳐다봤다.
“무효화 능력이라고? 제법 쓸모 있을 것 같은 능력이네.”
믿었던 남자의 배신으로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그녀는 결국 아이를 유산하고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다크 카오스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부하를 자처했다.
그녀가 가진 무효화 능력은 생각보다 유용해서 히어로들을 일망타진하고 세상을 혼돈에 빠트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얼굴의 흉터가 마치 주름처럼 자리 잡아 노인처럼 보인다면서 사람들은 그녀를 마고(mago)라고 불렀다.
다크 카오스의 오른팔로 유명했지만 정작 다크 카오스인 신재언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건 물론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 주지 않았다.
재언은 그녀가 평범하고 찬란한 삶을 굳이 정리하고 ‘신재언’의 곁에 있는 걸 고집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엔 S급 히어로인 모자(母子)의 손에 허무하게 운명했다.
지금은 어째서인지 얼굴도 멀쩡하고 재벌 3세 애인 때문에 인생이 망하지도 않았으며 능력까지 잘 각성한 모양이었다. 대체 그녀의 운명이 바뀔 만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절벽 위에서 떨어트린 ‘저쪽 세계’ 재벌 3세 남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이쪽 세계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사이에 밖으로 도망간 좀비를 포획하고 상황을 살피던 김윤경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안쪽에 계신 분들,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대피해 있던 시민들이 건물 안으로 좀비들을 피해 도망친 사람이 있다고 말해 준 모양이었다. 재언은 커다란 그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마치 호랑이가 소리치는 것 같은 화통함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계속 안개에 싸여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저쪽 세계에서 그녀를 임신시켰던 그 쓰레기 재벌 남자요. 왠지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 마약에 취해서 어린아이를 자동차로 쳐서 죽이고 해외로 튀려던 걸 잡아서 발목을 자른 적이 있어요. 그 때문에 해외로 나가지 못했던 거군요.”
그랬다. 귀신들의 성녀 남동생인 저승사자를 처음 만나게 된 사건이었다. 그때, 마약에 취한 채 운전하던 젊은 남자의 차에 치여서 생을 마감한 어린 남자아이의 영혼을 만났었다.
아이를 죽였다는 죄의식도 없이 해외로 튈 준비를 하던 남자에게 재언이 자식들을 시켜 벌을 내렸다. 그 덕분에 거동이 어려워진 남자는 해외 촬영을 나간 김윤경과 인연을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김윤경은 남자와 만나지 못했으니 그와 교제도 하지 않았고 임신이나 납치당하는 일도 겪지 않은 채 능력을 각성할 수 있었다. 물론 대신 다른 일을 겪긴 했지만 말이다.
신재언의 작은 행동에 김윤경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마지 나비효과처럼.
‘하긴 여기서도… 누구는 존경받는 히어로가 됐는데, 저쪽에서 마고를 죽인 영웅은 이쪽 세계에서 나 때문에 가족과 재회도 못 할 빌런이 되어 버렸지.’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김윤경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재언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저쪽’ 세상은 멸망했고 자신은 다크 카오스 ‘신재언’처럼 돌이킬 수 없는 막장 인생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며 노후에는 퇴직금을 받아 시골에 땅 하나 사서 집을 짓고 소소하게 살고 싶은, 그런 작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세계 멸망은 무슨, 지금 있는 자식들이 사고 치는 걸 수습하느라 바빴다.
차민재와 나란히 밖으로 나오자 김윤경 대위의 시선이 재언에게 향했다가 떨어졌다. 재언은 뜨끔한 표정을 지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신들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군인에게 건물 안쪽의 상황을 설명했다.
제법 젊어 보이는 군인이 다가오다가 레헬을 보고 깜짝 놀라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김윤경 대위의 부대와 레헬이 부딪친 사건은 군인이라면 모를 수 없었다.
레헬을 보고 괜한 걱정을 했다며 혀를 찬 김윤경이 물었다.
“…안쪽에 생존자는?”
“없어.”
차민재의 짧은 대답에 재언이 덧붙였다.
“안에 시신 세 구가 있습니다.”
김윤경이 차민재를 미심쩍은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죽인 거 아니야.”
레헬과 싸우다가 손목이 잘렸다고 들었는데, 슬쩍 보니 그녀의 손목은 양쪽 다 제대로 붙어 있었다. 소문이 과장됐거나 현대의학과 힐러 계열 능력자들이 잔뜩 힘을 쓴 듯했다.
그리고 둘이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걸 보니 생각보다 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을 보자니 잘렸던 손목이 아프니까 썩 꺼져.”
“잘린 지 얼마 안 됐지? 하긴, 아플 만해.”
정정해야겠다.
두 사람 사이는 매우 나빠서 살벌하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히죽거리는 레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김윤경이 이를 갈며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뒤를 돌았다.
레헬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전염병을 옮기는 물체를 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떠오르는 게 어지간히 얽히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재언을 힐끔 쳐다보는 시선 또한 상당히 묘했다.
호감이 있거나 관심 있다는 눈빛은 아니었고 저건 어떻게 되어 먹은 녀석이길래 이런 개차반 같은 레드 헬 파이어의 곁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듬뿍 담긴 시선이었다.
신재언을 은인으로 여기며 선망하는 눈길로 쳐다봤던 마고를 떠올린 재언은 불손한 눈으로 관찰당하는 느낌이 굉장히 생경해서 속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그녀의 곁을 얼른 지나 사방이 막혀 있는 군 차량으로 올라가던 재언이 무언가를 보고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세요, 재언 씨?”
차민재가 의문 어린 목소리로 묻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재언은 한참 동안 말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제가 뭘 잘못 본 것 같아서요. 누굴 본 거 같긴 한데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라.”
그 뒤로도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 끙끙대며 중얼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 김 대리가 여기 있을 리 없어. 잘못 본 겁니다. 요즘은 꿈에도 나오지 않아서 쾌적한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몸서리를 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재언은 사건을 조사하고 건물 안의 수색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워낙 감염자들의 상처가 심하고 오래되어 정신 지배 감염이 끝나자마자 생명의 끈을 놓아 버린 게 확연히 보였던 덕분에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다.
군 차량에서 나와 사람들이 대피해 있는 장소로 향하던 중, 재언은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초조한 듯 손톱을 씹으며 상황을 살피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바로 빵집 사장 부부를 괴롭혔다던 스토커 남자이자 소설 위너좀비의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