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51화 (251/324)

251화

재언은 더러운 꼴로 주저앉아 우는 장근우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게 뭐람…….’

울고 있는 사람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은 더욱 냉정해졌다.

‘…만약 이 남자 말이 사실이라면 작가를 상상 이상으로 좋아하는 팬이 벌이는 쇼라는 거잖아? 좋아하는 작가를 쫓아다니면서 자기가 그린 팬아트를 보여 주는 팬같은…….’

어디로 도망가든 쫓아오는 집요함. 게다가 상대 쪽은 아파트 단지에서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젊은 부부였다.

“‘위너좀비’가 끝나면, 다, 다, 다음 작품에서 저는 살해당할 거예요. 흐어엉…….”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고 도움을 청해도 오히려 자신 쪽이 이상한 취급을 받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것이다.

“이제 정말로 제가 죽으면 범인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이 되겠죠? 미리 유언장이라도 써 놔야겠어요.”

비록 저도 모르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미주알고주알 전부 떠든 셈이 되었지만, 장근우는 특별히 도움을 기대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느꼈던 괴로운 심정을 토해 내서 그런 건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재언이 생각하기에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 젊은 부부는 그때의 상황조차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절대로 쉽게 잡히지는 않겠지.’

하지만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정직하게 말하기가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서 꾹 삼켰다.

“으음… 제 애인이 히어로거든요. 장근우 씨를 도와줄 방법이 뭐가 있는지 최대한 알아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사람, 대단한 히어로니까.”

일단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했으니 이제 와 발 빼기는 머쓱해질 것 같고 재언은 장근우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그를 달랬다.

“저… 진짜 도와주실 겁니까?”

“본인은 범인이 아니라면서요. 그리고…….”

그를 토닥이던 손을 떼고 허리를 똑바로 편 뒤 고개를 들어 먼 산을 응시했다.

“뭔가… 원흉을 알 것 같기도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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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이 있다. 작가에게 작품은 자식과도 같다고.

재언에게는 피가 이어지지 않은 자식이 여덟 명 있다. 어쩌다 생긴 여덟 자식은 다들 말도 잘 듣고 복종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자식이 두 명 이상 있으면 그중에 한 명은 말을 안 듣는 사고뭉치 자식이 있다고 하던가. 개성 강한 자식 중에서도 유난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뭉치가 있었으니, 재언에게는 그게 바로 마약왕 알례리였다.

“…솔직히 장근우 씨의 증오에는 거짓이 섞여 있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그렇다기엔 빵집 사장님들이 너무 멀쩡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도 딱히 증오는 찾아볼 수 없었고… 그래도 전 왠지 모르게 장근우 씨가 하는 말이 더 신뢰가 가요. 수상한 점도 있고…….”

“첫 번째 작품이 빠진 거 말씀입니까?”

배추에게 밥을 주고 거실로 들어온 민재가 재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출판사에서 의뢰했다던 히어로 사무실이 제 사무실이었습니다.”

그때 주방에서 사료를 씹어 먹다 말고 배추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소파로 후다닥 달려와 폴짝 뛰어올랐다. 두 사람 사이에 몸을 비집고 들어온 배추의 턱을 쓰다듬자 고양이가 고로롱 소리를 내며 길게 누웠다.

이전에 배추가 먹는 양이 줄어들었다며 차민재가 지나가듯 말했던 기억이 났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자신이 고양이었을 때에 그랬다면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게 답답했다. 왜 집사들이 같이 사는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는지 알겠다.

“과거 장근우의 행적을 조사하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에 살았던 빌라에서 동네 사람들의 실종 사건이 겹쳐서 발생했거든요. 시신이 발견된 건 실종되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다음이었고요.”

이어지는 차민재의 말에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재언이 정신을 차리고 귀 기울였다.

“누가 봐도 장근우가 집필했던 ‘연쇄살인마의 베이커리’와 연관 지을 만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경찰들도 장근우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고요. 곧 체포 영장이 발부될 것 같습니다.”

재언은 억울하게 구치소에 끌려갔던 그때가 떠올라 기분이 저절로 떨떠름해졌다.

“지금은 ‘위너좀비’가 시작됐습니다. 만약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은 능력자 극성팬이 이런 일을 벌인 거라면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어요. 첫 번째 작품이 쏙 빠졌어요.”

“그렇죠. 제가 팬이라면 첫 번째 작품부터 구현하고 싶었을 거예요.”

“맞아요. 지금같이 좀비 감염체도 만들 수 있는 능력자라면 외계인이 나오는 첫 번째 작품도 무리 없이 구현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는 건… 범행 초기에는 그럴 힘이 없었다는 게 저희 추측입니다.”

차민재의 말에 재언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장근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던 점을 털어놓았다.

“민재 씨 말대로 저도 부부 중 어느 쪽이 능력자든 범행을 벌이는 과정에서 각성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제 추측이긴 한대… 정상적인 ‘선천적 각성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누군가가 관여되었을 확률이 아주 높아요.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 누군가만 생각하면 저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일의 끝엔 마약왕이 관여되어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정말 장근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부는 어떤 루트로 마약왕과 접촉했고 인위적으로 능력을 각성하는 실험을 당한 건 아닐까 해요.”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고 그 절실함이 영혼에 각인되어 능력으로 발현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정말로 장근우의 세계관에 들어가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죽을지도 모르는 실험을 견딘 거라면, 그것 참 대단한 사람들끼리 만나게 된 거군요.”

히어로 협회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레헬의 사무실에서 독단적으로 알아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이 사건의 끝에 알례리가 있을지도 모른단 사실이었다.

아무리 버린 자식이라지만 재언은 이번 사건을 히어로들 모르게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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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은 조각난 장난감에게 장근우를 감시하라고 보낸 뒤, 자신은 빵집의 사장 부부를 감시하기로 했다.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 엔레이드맨의 둠(doom) 속에 네 명이 숨었다.

결계의 주인인 엔레이드맨, 푸른색 눈물 보석이 박힌 검은색 피에로 가면을 쓴 신재언, 하얀색 후광으로 반짝이는 타락한 추기경, 마지막으로 결계 속 모든 이들의 불편한 눈초리를 한눈에 받는 광대 가면의 남자가 있었다.

푸른색 눈물 보석이 박힌 검은색 피에로 가면은 우여곡절 끝에 자식들이 생일선물로 만들어 준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가면’이었다. 이전에 저주받은 보석가를 탈탈 털어 만들어 낸 ‘바다의 보석’으로 만들어 냈다.

그때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줄줄 흐를 만큼 자식들이 어마어마하게 사고를 쳤었다. 저주받은 보석가에게서 보석을 받고 끝난 사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미국에 사는 능력자들 전용 아이템 틀을 만들어 내는 최고의 대장장이 금속 능력자를 납치해 가면을 만들게 했다. 그 때문에 미국 정부, CIA나 FBI를 비롯해 미국의 히어로 협회들이 들고일어나 하마터면 전쟁이 일어날 뻔했었다.

거대 빌런들이 한 번에 움직여 올해 가장 핫한 세계적 이슈를 만들어 놓은 이유가 다크 카오스의 생일선물 때문이라면 누가 믿어 줄까.

당연하게도 사건의 전말을 알던 차민재는 재언이 ‘푸른 눈물 보석이 박힌 피에로 가면’을 들고 나타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재언 씨가 원한다면 히어로를 그만두고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도 가능한데……. 재언 씨 스케일 큰 건 이쪽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네요.”

“이건 진짜 제 뜻이 아니에요…….”

괴로워하는 재언을 놀리는 레헬의 목소리에 즐거운 기색이 완연했다.

재언은 광대 가면을 쓴 ‘레드-헬-파이어’의 모습에 심란한 속마음을 가면 안으로 감췄다. 이게 옳은 일인지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예전에 읽었던 히어로와 빌런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로맨스 작품을 읽은 적이 있었다. 둘은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정체를 숨겼다가 들키면서 평화와 사랑 사이에서 끝없이 고통받는데, 왜 차민재는 오히려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계의 평화는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아버지의 선택에 저 같은 미천한 이는 어떤 의문도 가지지 말아야겠지만… 지금은 조금 의문입니다.”

타락한 추기경이 아름다운 얼굴에 곤란한 표정을 띄웠다.

항상 마이페이스에 재언을 향한 뚜렷한 믿음으로 사는 그에게까지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역시 ‘레드-헬-파이어’는 세상에 적이 없을 만큼 막강한 히어로가 맞았다.

재언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를 히어로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검게 물든 광대’ 쯤으로 생각해…….”

실제로 ‘검게 물든 광대’는 저쪽 세상에서 차민재가 가졌던 빌런 명이었다.

히어로 명은 ‘레드-헬-파이어’고 빌런 명은 ‘검게 물든 광대’라니. 본인 앞에서 웃을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타락한 추기경은 재언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이는 레헬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성기사를 소환했다.

영적인 힘으로는 베드로를 꺼내는 게 효율적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좀비에 한에 효과가 있어서였다. 능력자를 감시하고 일망타진하는 일에는 물리적인 힘이 더욱 강한 성기사가 더욱 유용했다.

“그렇군요……. 자신의 신념과 신의를 저버리면서까지 그는 아버지께 헌신하는 겁니까. 저 또한 그 절실한 마음, 이해합니다.”

타락한 추기경의 시선이 망자가 된 성기사를 향했다.

“바실리오 역시 스스로 심장을 꿰뚫는 금기를 저질러 저를 따라 지옥에 가려 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기 위해 절대 금기시되는 짓을 저지른 이를 보는 타락한 추기경의 눈빛이 무덤덤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레드 헬 파이어가 히어로의 정의에 반한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바실리오, 그가 지금의 제 모습을 용서해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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