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53화 (253/324)

253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재언이 빵집에서 나온 여성의 뒤를 쫓아가 버리고, 차민재 혼자 그곳에 남아 장근우와 부부를 감시하던 때였다.

사랑스러운 애인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을 정도로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간이었다. 그냥 저놈들을 내버려 두고 애인의 뒤나 쫓아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오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계에 몰린 장근우가 칼을 들고 부부를 향해 겨누며 소리치고 있었다.

만약 재언이 봤다면 저 양반은 왜 또 저런다며 머리를 짚었을 광경이었다.

그래도 차민재는 어느 정도 그의 상황을 공감했다. 아무리 경고하고 신고해 봐도 도리어 이상한 눈초리나 받는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참다가 터진 것이다.

“너희들이… 너희들이 범인이잖아! 저 여자도 죽이고 그다음엔 나도 살해할 거지! 그렇지?!”

부부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악을 쓰는 장근우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깜짝 놀라는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차민재가 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두 사람은 놀랍도록 평온한 얼굴로 장근우를 쳐다봤다.

서로의 손을 잡은 채 남편 쪽은 빙그레 웃고만 있었고 아내가 입을 열었다.

“위험하게 칼을 들고 설치면 어떻게 해요, 작가님.”

“역시… 내가, 내가 위너좀비 작가라는 걸 원래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계속 끈질기게 스토킹해 온 거고… 현실과 상상을 구분 못 하는 건 오히려 너희 쪽인데……!”

부부는 손님을 상대하는 것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한참을 키득거리다가 아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장근우의 머리 위로 피를 흘리는 부엉이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맹금류의 공격에 장근우는 비명을 지르며 다급하게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부엉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장근우가 주머니에 몰래 숨겨 놓았던 녹음기를 꺼내 아내의 손바닥 위로 가져다주었다.

“머리를 제법 쓰셨지만, 티가 많이 났어요…….”

위협용으로 가져온 식칼도 바닥에 떨어트렸고 어떻게든 자백을 유도해 내 녹음할 녹음기도 빼앗겼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피가 마른 채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살해당하는 게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부부는 넋이 나간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장근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빼앗은 녹음기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뒤를 돌았다.

한참이 지나도 자신에게 아무런 고통도 가해지지 않자 장근우가 의아한 듯 눈을 떴다. 부부는 장근우를 무시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왜 날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거야?! 차라리 나, 날 죽여!”

장근우는 마지막 발악인 것처럼 절규를 원 없이 쏟아 냈다. 하지만 그의 필사적인 외침에도 부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작가님… 무슨 말씀이세요. 작가님께서 죽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에요……. 작가님은 어느 작가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마지막에 내장이 뜯긴 채로 죽을 거예요.”

말투는 상냥한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굉장히 끔찍했다. 장근우의 네 번째 작품 <어느 작가의 회고록>은 주인공이 작품 활동을 위해 어느 섬에 들어갔다가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쓴 소설이기에 장근우는 주인공의 최후가 얼마나 끔찍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모든 괴이한 현상을 해결하고 겨우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이 가득한 배 안에서 작가는 자신을 쫓아온 미지의 존재들에게 내장이 뜯긴 채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도대체… 도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야……. 내 소설을 좋아한다면서. 내가 그 소설을 집필한 작가인데.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절망에 빠진 장근우를 본 아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좋아해요.”

고저 없었던 목소리에 담긴 유일한 감정에 장근우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작품부터 팬이었어요. 제겐 실제 사는 현실보다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이었으니까요. 사랑하는 남편을 만난 것도 모두 작가님 덕분이에요. 그는 저와 아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우리는 정말 행복했어요…….”

황홀하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돌변했다.

“새로운 소설을 볼 때마다 그 작품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당신은 우리를 배신했어요.”

“내가? 뭘 배신했는데!”

“돈에 눈이 멀어서 쓰레기 같은 작품을 냈잖아요.”

“…뭐?”

충격을 받고 눈이 커다래진 장근우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그녀는 생기를 잃은 얼굴로 장근우를 노려보았다.

“그 쓰레기 같은 다섯 번째 작품에… 나와 남편은 살 의지를 잃고 말았어요. 상업지를 내겠다며 돈을 노리는 당신의 욕심 때문에 우리 부부는 한순간에 삶의 의지를 빼앗겨 버린 거죠. 당신이 그 기분을 알아? 내 세상이 무너지는 그 기분을.”

말이 안 통했다. 예전부터 느낀 거였지만 저들은 거대한 벽이었다. 차라리 짐승과 대화해도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말대로 장근우의 작품을 대다수 사람이 네 개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마지막 한 작품이 더 있었다.

로맨스 소설이었다. 출판사와 계약을 맺으며 차기작으로 대중적인 장르를 고민하다가 인터넷에 올려봤는데 처음 쓰는 장르인 데다가 장근우도 글을 쓰는 데 흥미를 느끼지 못해 급하게 완결을 내고 말았다.

그렇게 다섯 번째 작품은 화제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묻혔다.

글이 자신과 안 맞으면 안 보면 될 걸 고작 장르가 다른 작품을 냈다고 세상이 무너졌다느니 삶의 의지를 무너졌다느니 하면서 작가에게 보복하다니.

“처음에는… 그냥 놀려 줄 생각이었어요……. 작가님이 허둥지둥거리는 게 보기 좋아서요. 그래서 일부러 빵 반죽을 손봐서 사람 손처럼 만들어 보여드렸었죠……. 하지만 점점 내가 사랑하는 작품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두근거려서 제대로 잠도 못 자던 그때, 저희 부부 앞으로 한 남자가 찾아왔어요.”

여자의 말을 들으며 장근우는 남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상상을 실제로 바꿀 힘을 주겠다고 약속했죠. 나와 남편은 그의 말에 홀려 어떤 실험에 참여했고 저는 타인의 공포로 정신을 지배해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각성했고 남편은 환각 능력을 각성했지만…….”

그런데 그 순간 빙그레 웃고 있던 남편의 몸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철퍽 소리가 나며 얼굴이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끔찍한 장면에 장근우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기절했다.

여자는 익숙한 일인 듯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의 머리를 주워 녹아내린 몸 위에 대충 올려놓았다. 실험이 끝난 후 몸이 녹아 없어지기 시작하는 남편을 앞에 두고 ‘그 남자’는 섬뜩하게 웃었다.

“…나는 대용품을 찾고 있어, 시체를 조종하는 능력을 가졌지만 너는 실패작이구나.”

그리고 첫 만남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안타깝게도 남편의 몸이 녹아 버리고 저도 실패작이라며 버려졌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이제 곧 작가님의 작품은 영원히 네 번째인 ‘어느 작가의 회고록’에서 멈출 테고 사람들은 그 더러운 작품을 기억하지도 못할 거예요! 바로 지금처럼요!”

일련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던 차민재는 손바닥 위로 헬파이어를 만들어 놓고도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흔적도 없이 불태워 죽이면 아무도 모르게 일을 해결할 수 있는데.”

쉬운 일이다. 사람을 그대로 산화시켜 죽이고 증거 따위 남지 않도록 잿더미까지 태워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게 훨씬 쉽고 간단했다.

차민재는 광대 가면을 벗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무언가를 결정한 듯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매무새를 정리하고 그들 쪽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나는 히어로니까……. 그가 원하는 대로.”

차민재가 손을 휘저어 부부의 주변에 헬파이어로 벽을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열기에 여자가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인상을 흐릿하게 만들어 주는 안경을 쓰지 않은 레드-헬-파이어의 얼굴을 곧바로 알아봤다. 사방이 막혀 있어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히어로가 등장했는데도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머나… 혹시 전부 들켰나요?”

처음엔 무시하려고 했는데 자신을 앞에 두고도 태평한 빌런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던지라 흥미가 생겼다.

“혼자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고 뭘 들켰냐는 거야?”

“모두 끝났네요.”

레드-헬-파이어의 악명은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빌런은 없었다. 그가 일부러 놔준 것이라면 모를까 잡겠다고 마음먹은 빌런을 놓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많은 수의 감염체를 조종해 덤벼도 헬파이어 하나면 모두 불타 죽을 게 뻔했다. 죽이지 않더라도 감염체들을 피해서 자신을 제압하는 건 레헬에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여성은 손에 든 파우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대한민국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무기에 차민재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권총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총탄마저 순식간에 녹인다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무슨 짓을 하려나 궁금했다. 그녀는 권총을 들어 레헬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남편의 머리에 한 방 쏘았다.

“이번 생은 다 끝났으니, 저희는 다음 작품으로 갑니다. 그러면 그때 다시 만나요, 작가님!”

그녀는 활발하게 소리친 뒤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누고 망설임 없이 총을 쏘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차민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부부 쪽으로 걸어갔다. 연막작전이 아니라 진짜로 죽었는지 확인할 생각으로 그녀의 머리를 발로 톡 밀었다.

그녀는 관자놀이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 있었다. 속이거나 도망친 게 아니라 정말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삶을 작품 속, 혹은 게임 아바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미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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