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그들은 정말로 본인들이 작품 세상 속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런 식으로 너무나도 쉽고 허무하게 죽음을 선택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범죄 동기가 대단한 것도, 비장한 각오로 알례리의 비인간적인 실험에 동참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본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에 들어가고 싶다는 정신 나간 이유였다.
재언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CCTV의 위치를 확인했다. 가로등 위에 CCTV 한 대가 차민재와 부부가 있었던 쪽을 정확하게 향하고 있었다.
엔레이드맨의 둠(doom)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모습까지 찍힐 방향은 아니었다. 그러니 차민재가 저리도 태연하게 시신들을 살피고 있는 것일 테다.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죠.”
“이레일에게 연락해 두겠습니다.”
차민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레일과 히어로 협회의 사람들, 경찰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레일은 도착하자마자 멀뚱히 서 있는 민재와 재언에게 허겁지겁 다가왔다. 자다가 급하게 온 건지 반짝이는 금발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편한 운동복을 입고 도착한 그의 행색은 마치 외국의 고등학생처럼 어려 보였다.
“사장님! 이번 ‘좀비 감염’ 사건의 진범을 찾은 것 같다고요?”
전화로 간략하게 들었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길 원하는 이레일에게 재언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레일은 재언에게 설명을 들으며 현장을 수습하는 히어로와 경찰들을 눈으로 좇다가 설명이 끝나자마자 그쪽으로 다가갔다.
“잠시만요. 시신 좀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아내 쪽 시신을 먼저 확인한 뒤 남편 쪽 천을 살짝 걷어 냈다. 아내의 능력으로 그나마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남편의 신체는 이미 걸쭉한 액체처럼 변해 바닥에 줄줄 흐르고 있었고 머리만 덩그러니 남은 끔찍한 몰골이었다.
“으윽…….”
아무리 여러 사건으로 흉측한 몰골을 많이 봐 왔다지만 단연코 꿈에 나올까 무서운 광경이었다. 이레일이 짧게 혀를 차며 천을 내려놓은 뒤 다시 민재에게 달려왔다.
“…사장님 말씀대로 남편 쪽 시신이 녹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 하기 조심스럽지만 정말 끔찍한 모습이었어요.”
안 그래도 퀭한 이레일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이는 이레일의 상태에 재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이레일. 혹시 몸이 좋지 않은 거 아닙니까?”
“아… 안녕하십니까. 신 선생님, 경황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네요.”
이레일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요즘 꿈자리가 사나워서 잠을 설치고 있거든요. 부끄럽게도 이 나이 먹도록 악몽이나 꾸고 있습니다.”
“무슨 꿈이요?”
재언의 물음에 이레일은 머뭇거리면서 눈을 깜박이다가 애써 괜찮은 척 미소 지었지만, 그마저도 어색했다.
“기억나질 않습니다. 그냥 악몽을 꾸는 것 같아요.”
“네…….”
재언은 기억도 안 난다는 악몽에 더 깊이 파고들 생각은 없어 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타락한 추기경 쪽을 신경 써야 했다. 공격받던 여성 쪽 일을 수습하면 모습을 감추라고 명령하긴 했는데, 일이 잘 수습되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으니 계속 신경 쓰였다.
그 이후, 경찰이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를 수색해 음식을 저장하는 커다란 냉동고 속에서 그들 집의 원래 주인인 신혼부부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부부가 좀비 사건 주범으로 특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추가적으로 부부의 사망 시간쯤부터 히어로 협회에 구금 중이었던 좀비들의 정신 지배가 끝났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신 지배가 끝난 직후 상태가 심각했던 대부분이 사망했고 좀비가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만이 몇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들이 위너좀비의 작가 히키home의 스토커 팬이었다는 것까지 알려지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장근우를 믿어 주지 않고 별종 취급하고 사건 용의자로 몰며 욕하던 인터넷 여론이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것이다. 심지어 장근우가 비정상적인 성욕을 가졌다며 없는 소문까지 지어내던 사람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재언은 현재 장근우를 동정하고 두둔하는 이들 중에 과연 그를 한 번이라도 욕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의문을 품었다. 그래도 혐의가 벗겨지며 장근우에게 동정 여론으로 바뀐 건 그나마 좋게 생각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번에 영화화하는 네 번째 작품 ‘어느 작가의 회고록’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화제성을 가지게 되었다. 누명도 벗고 작품도 알려지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테러범으로 얼굴이 공개된 부부가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쉽게 목숨을 끊는 CCTV 장면까지 언론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재언은 그에 대한 여론까지는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아서 관련 글이나 기사를 애써 무시했다.
며칠 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우연히 마주친 장근우는 이전보다 혈색이 좋아진 얼굴로 재언에게 아는 척하며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그땐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한 것도 없는데요, 뭘.”
“그놈들을 잡아 준 히어로 레드 헬 파이어와 아는 사이셨다면서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렇게 정신 차리고 살지 못했을 겁니다.”
그에게 굉장한 히어로가 애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레드 헬 파이어라는 걸 알아차렸을지 걱정되었다.
다행히도 장근우는 그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아니면 다른 히어로라고 생각하는지 별로 그것에 관해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그때 이후로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일 이후로 정신과에서 상담받고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정말 최악이었던 게 뭔지 아십니까? 저 같은 피해자는 정신과 상담을 받을 정도로 힘들게 만들어 놓고 본인들은 죄책감 없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그래도 치료받으면서 약도 먹고 있어서 불면증은 많이 사라졌어요. 차기작 준비도 순조롭고요.”
재언이 봤을 때도 그는 이전보다 말을 더듬는 것도 없어졌고 어색하게나마 눈을 마주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어도 전 열심히 살아가겠죠……. 평범한 사람처럼 하루를 보내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번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열심히 살아 보려고요.”
장근우는 후련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하며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었다.
재언이 이게 무엇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차기작이에요. 곧 서점에 풀릴 예정이긴 한데 도와주신 답례로 드릴게요. 혹시 싫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아, 아닙니다. 위너좀비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의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다니,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재언은 책을 건네받고 장근우와 짧게 인사한 뒤 헤어졌다.
집에 도착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샤워까지 끝낸 재언은 소파에 앉아 장근우에게 받은 책을 펼쳤다. 글귀를 따라 읽어 내려가던 재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차기작은 이번 사건을 모티브로 했으며 작가가 모델인 듯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서도 본인을 주인공을 내세울 생각을 다 했구나 싶어서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재언이 한참 책을 읽고 있을 때 현관이 열리고 민재가 집으로 들어왔다. 겉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친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재언의 다리 옆에 앉았다.
“몇 시에 퇴근했습니까?”
알고 있으면서 은근하게 묻는 목소리가 수준급이다. 재언은 책을 가슴에 얹어 놓고 발목을 잡는 차민재의 손길을 느끼며 시계를 쳐다봤다.
지금이 대략 밤 열 시 정도이고 장근우를 만났을 때가 퇴근하던 중인 저녁 일곱 시 정도였으니 세 시간 동안 독서하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은 일찍 끝나서 먼저 집에 왔습니다. 그것보다 미안해요. 이 책,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간단한 요깃거리도 못 만들고 있었네요. 배고프진 않습니까?”
“고프긴 한데 다른 게 더 고파서요.”
“…….”
이런 저질개그는 어디서 배워 오는지 모르겠다. 재언은 은근히 몸을 부딪쳐 오는 차민재를 진정시킬 요량으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차민재는 가끔 이렇게 어리광을 부려 오곤 했다. 처음엔 이놈이 미쳤나 싶어서 무시했던 재언은 침대 위에서 굉장히 고달파진 이후로 최선을 다해 그를 다독여 주려 애썼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리광일까.”
점점 위로 올라오는 차민재의 얼굴을 잡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는 몇 번을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끝장나는 미인이고 재언이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눈, 코, 입이 달린 건 똑같은데 이렇게까지 차원이 다른 존재일 수 있는지 매번 너무나도 신기했다.
차민재는 자신의 얼굴을 구경하는 재언에게 눈웃음을 지어 준 뒤 그의 튼실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려다가 얹어져 있는 책의 표지를 구경했다.
“이 책은…….”
“오늘 만났던 장근우 씨가 줬습니다. 아직 정식 출간 전이라네요.”
재언이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책을 들어 올렸다.
“이번 사건을 모티브로 썼다고 하는데, 여기 저랑 민재 씨도 등장합니다. 한 번 볼래요?”
책에 쓰여 있는 내용 중에 특히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부분을 찾아서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물론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건 아니고 주인공의 조력자이자 조연으로 나올 뿐이었다.
소설 속에서 재언은 정의로운 청년이었고 차민재는 사건의 해결을 도와주는 정의로운 히어로였다. 중요한 건 두 청년이 연인관계라는 것이다.
상업지 소설에 등장하는 동성 커플에 재언은 정말 장근우가 자신과 레헬의 관계를 눈치챈 것 같기도 해서 매우 찝찝해졌다.
미묘한 표정으로 변해 가는 재언과는 달리 차민재는 한참 동안 ‘둘은 연인이었다.’라는 문구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몸을 때리는 새하얀 눈이 싫었다. 눈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소년에게 눈은 지독한 추위와 고통만을 안겨 줄 뿐이었다.
손끝에 닿는 얼음결정이 점점 낮아지는 소년의 체온에 녹지 않을 정도였다. 온몸이 식어 가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의 머리맡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소년은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얼굴 생김도, 체격조차도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건 확실했다.
마치 뿌연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잊었지?
정말…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멋지고, 다정했던 사람이었는데…….
“저를 잊으세요.”
갈라진 목소리는 정중하고 다정했다. 사람들에게서 외면만 받았던 소년에게 그는 유일한 어른이었고 따르고 싶은 아주 존경스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인데 기억 끝자락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니.
‘…아저씨.’
이레일은 눈물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차가운 눈이 내리는 날. 항상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었던 다정한 사람.
눈이 올 때마다 머리 위로 드리우던 짙은 녹색의 우산.
당신의 어깨에 소복하게 쌓여 있는 눈에도 개의치 않고 굶주리고 힘없는 내게 우산을 씌워 주고 빵과 잼을 주었었지.
난 당신을 알고 있어.
당신은 대체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