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55화 (255/324)

255화

“이레일 씨, 부지런하시네요. 아직 새벽 여섯 시밖에 안 됐는데. 설마 퇴근 안 한 건 아니죠?”

레드 헬 파이어 사무실의 데스크 직원인 강미정이 출근하자마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녀는 이 사무실에서 자신이 가장 먼저 출근한다는 걸 알기에 당연히 사무실이 비어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눈앞에 레드-헬-파이어의 사이드킥이 떡하니 보였다.

“아… 미정 님. 언제나 수고 많으십니다.”

“저야 그만큼 돈을 받으니까……. 설마 이레일 씨 밤새웠어요?”

강미정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가방을 두면서도 경악에 찬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요즈음 이레일이 잠을 제대로 자기는 하는지 눈가가 퀭해서 보고 있기가 안쓰러웠다.

“이번 사건이 그렇게 힘든 거예요? 제가 의뢰를 확인했을 땐 분명 C급 히어로 몇 명만 파견하면 되는 간단한 건이었는데…….”

“아,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조사할 게 있어서 온 겁니다.”

이레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강미정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도 말을 더 얹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아침부터 간밤에 쌓인 업무들을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강미정의 업무시간은 오전 여섯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로 정해져 있지만, 그녀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을 저녁 여섯 시까지 추가로 근무하곤 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히어로 업계만큼은 연장 근무 시간에 제한이 없어서 추가 근로 수당만으로도 상당히 짭짤한 급여가 지급되었다.

그런 강미정과는 다르게 이레일은 레헬의 사이드킥이자 히어로로 등록되어 있어 기본급이 따로 없고 사건별로 건당 인센티브를 받는다. 강미정처럼 추가 근무를 해도 별 이득이 없다는 소리였다.

레헬의 사무실은 사건을 해결하는 비율이 높고 히어로들의 능력도 좋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사무실의 모든 히어로가 일주일에서 이주까지 예약이 가득 차 있는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인 레헬은 몇십만 원짜리의 소소하고 별것 아닌 의뢰에서부터 몇십억을 호가하는 국제적인 이슈까지 자기 기분에 따라 변덕스럽게 사건을 맡곤 했다.

누군가는 세상의 평화를 지켜야 하는 히어로가 개인 이득에 따라 사건을 맡는다고 종종 비난하곤 했다. 히어로들은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는 입장이었다.

“이레일 씨가 열아홉 살에 한국에 왔었나요? 제법 화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장님이 원래 사이드킥을 두지 않고 있기도 했고…….”

그녀의 물음에 이레일이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에서 레드-헬-파이어에게 신세를 지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한국까지 쫓아와 귀화까지 한 A급 히어로 이레일의 사연은 그때 당시에 굉장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었다.

거기다가 레헬이 사이드킥으로 일하고 싶다는 이레일을 말리지도 않고 사무실에서 부사장급 대우를 해 주며 지낼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젯거리였다.

하지만 이레일조차 왜 레헬이 자신을 쉽게 받아 주었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이레일이 레헬을 정식으로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힘에 감탄하는 동시에 실망감을 느꼈다는 건 확실했다.

능력을 막 각성했을 당시에 이레일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쫄쫄 굶었던 과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의 진수성찬과 어마어마한 지원금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눈물 날 정도로 그리웠던 사람이 자신을 구해 준 히어로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레헬을 직접 만나 당신을 존경하고 있었다고, 곁에서 조수로 일하게 해 달라고 비행기에서 오는 내내 시뮬레이션했던 말들을 내뱉으면서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내가 존경했던 사람은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인데.’

레드-헬-파이어는 아름다웠다. 같은 남자인 이레일이 감탄할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이 사람이… 아니야.’

이레일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거부감이 치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아, 이거 하시게요? 사실 누구를 지목할지 고민 많이 했거든요. A급 이상으로 의뢰한 것 치고는 제시한 금액이 짜긴 한대……. 비행기 운임을 포함한 이동경비까지 전부 책임진다고 해서 고민 중이었거든요.”

강미정의 말이 잠시 과거 회상에 빠져 있던 이레일의 정신을 돌려놓았다.

다른 히어로들이 아직 맡지 않은 의뢰를 기계적으로 클릭하고 있었는데, 하필 멈춰 있던 의뢰서가 그의 고향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바로 피겨선수인 자기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버지가 ISU 피겨 그랑프리 시리즈 중 러시아에서 열리는 대회 출전 기간 동안 경호해 줄 히어로를 찾는 의뢰서였다.

“그래도 이 사건은 이레일 씨가 딱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러시아가 고향이잖아요.”

“…네.”

고향인 러시아까지 가야 하는 의뢰를 보며 이레일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요즘 계속 고향이 나오는 악몽을 꾸는 걸 보면 그곳에 정답의 실마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미세한 희망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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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 씨, 같이 점심 어때요?”

“아, 임 과장님… 전 좋습니다. 새로운 팀은 어때요?”

“아휴, 말도 마. 재언 씨가 그리웠어.”

승진하면서 새로운 팀에 배정된 임 과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재언은 항상 같이 점심을 먹었던 같은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전에 같이 먹자고 했었던 짬뽕 가게로 향했다.

“어휴, 지금 팀에 있으려니까 이전 팀이 너무 그리워 죽겠다니까요? 특히 곽 과장… 나이도 많으면서 머리가 굳어서 꼰대 기질이 다분해……. 웃겨, 정말.”

두 사람은 메뉴를 하나씩 주문하고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과장으로 승진한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녀를 향한 사내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한국지사 사장과의 불륜설도 여전했고 그녀의 뒤를 봐주는 백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래서 새로운 팀에 섞이는 것이 쉽지 않은 듯했다. 재언은 누가 봐도 이례적인 승진이라 질시와 부러움으로 인해 붙은 꼬리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임 과장은 소문에 딱히 신경 쓰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재언도 확실하지 않은 말들은 무시하는 편이라 평소처럼 임 과장을 대했다.

“고생 많으시겠어요.”

“앞으로 6개월 이상은 그 팀하고 쭉 가야 할 것 같은데, 도통 안 맞아. 어휴… 일이 힘들면 사람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내가 전에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랑 프로젝트를 꾸렸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야.”

임 과장의 푸념은 점심을 다 먹고 카페에 들를 때까지 이어졌다.

재언이 카페 옆에 있는 흡연실로 자리를 옮겨 임 과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다른 쪽에서 오는 직장인 무리 안에 있는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어, 재언 씨!”

바로 인사팀에 근무하고 있는 남무혁이었다. 그는 오늘도 눈에 띄는 멋진 패션을 자랑하는 중이었다.

흰색 와이셔츠 안에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의 얼굴 다섯 개가 떡하니 붙어 있는 셔츠가 선명하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충분했다.

인사팀은 홍보팀과는 달리 인원 변동이 적고 처음 신입 때 배정받았던 팀이 그대로 쭉 이어진 덕분일까. 인사팀의 다른 팀원들은 그의 패션을 이제 ‘남무혁 패션’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밥 드시고 오는 거예요? 임 과장님도 안녕하십니까.”

“네. 남무혁 씨도요?”

“저쪽 가게에서 순두부찌개 먹고 왔어요.”

임 과장과 인사를 나눈 남무혁이 신재언에게 가까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그것보다 재언 씨, 그거 봤습니까? 이번에 color’s에서 곧 신곡 발표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는 저도 승진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음 달엔 운세가 완전히 폭발할 예정이에요.”

초고속으로 승진하는 임 과장과는 정반대로 남무혁은 승진 기회가 올 때마다 이상하게 삐끗해 4년 내내 사원이었다.

실적으로 경쟁하는 홍보팀과는 달리 인사팀은 지속적인 근면 성실함을 본다고 해서 주어지는 기회가 다르긴 한데, 재언이 봐도 남무혁은 느린 편이었다.

일도 실수 없이 잘 해내고 사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데 왜 계속 승진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특히 이전에 남무혁보다 후배가 먼저 승진하게 되는 일까지 생겨서 나름 속앓이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덕질도 해 가면서 주눅 들지 않고 활발하게 회사 생활하는 걸 보면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긴 하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그러면 임 과장님도 나중에 뵙겠습니다.”

남무혁이 넉살 좋게 인사를 마무리한 뒤 자기 팀원들에게 돌아갔다.

‘또 무대 콘서트 티켓 무료로 줄 테니까 보러 가자고 조르겠네…….’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생각하는 재언에게 임 과장이 물었다.

“재언 씨는 남 사원이랑 친한가 봐요?”

“네. 나이도 비슷하고 어쩌다 보니 친해지게 됐거든요.”

“난 저 사람 좀 거북하더라.”

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패션이 너무 이상해.”

“하하하. 호불호가 갈리긴 하죠……. 그래도 사람은 좋습니다.”

그렇게 점심시간을 마무리하고 다시 업무로 복귀한 재언에게 곧바로 팀 회의가 잡혔다. 배부르고 졸릴 시간에 회의라니, 정말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극악무도했다.

재언은 발표하는 팀원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메모하는 척 태블릿 PC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였다. 실제로는 ‘아… 졸려…’라던가 ‘퇴사하면 퇴직금 얼마지?’라는 쓸데없는 낙서였지만 말이다.

“이번 분기 모델은 최근에 핫한 운동선수와 계약했습니다. 이번에 러시아에서 대회가 열리는 모양인데, 거기에 합류해서 촬영도 겸할 예정이에요. 대회 시작 전날에 귀걸이를 전달할 예정인데 착용한 사진을 이번 홈페이지 메인으로 쓸 예정입니다.”

러시아 대회와 요즘 떠오르는 운동선수면 피겨스케이팅 남자 선수, 김은원이었다. 각종 대회에서 상을 쓸어 담고 있는 열여덟 살의 어린 선수였다.

다음에 개최되는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기대하는 천재 선수에 잘생겨서 인기가 아주 많았다. 저번부터 계속 전속 모델 계약 의뢰를 넣었는데 답변이 없다가 이번 시즌에 함께하기로 한 모양이다.

‘러시아라, 러시아면… 지금 체어맨이 활동하고 있는 곳 아닌가? 거기에 사냥감이 있다고 엄청나게 신나 보였지.’

세계의 아동학대범을 여럿 잡아 고문하는 체어맨은 빌런으로 각성하기 전에는 굉장히 우울하고 거친 사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정중한 존댓말을 쓰고 신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재언은 지금 그의 모습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체어맨과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날 정도로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의 온몸에 구더기가 살을 파먹고 있었기에 재언과 만나지 못했다면 체어맨은 일주일도 살지 못하고 객사했을 확률이 높았다.

체어맨은 베트남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리엔 롱 쑤안. 부모에게 받은 이름은 옛적에 가져다 버린 아동학대의 피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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