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이건… 진짜 우연이 맞겠지?’
재언은 이번에 회사 브랜드 메인 모델이 된 피겨 스케이트 김은원 선수의 일정을 따라 프로젝트 팀원들과 함께 해외 출장이 잡혔다. 공항에서 선수 및 관계자들과 만나 인사를 나눈 뒤 비행기 탑승 수속을 밟을 예정이었다.
팀원들을 따라 선수 관계자들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한 재언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하품을 간신히 삼켰다. 재언이 9박 10일로 해외 출장 스케줄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차민재가 잔뜩 토라졌기 때문이다.
애인의 해외 출장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기세인 히어로를 밤새 달래 주느라 진을 다 빼 버렸다. 히어로 때문에 위험에 빠진 세계를 구하는 빌런이라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이번 프로젝트 시작이 하필 홍보모델의 러시아 그랑프리와 겹쳐서요. 거기다가 이번엔 나도 승진이 달린 일이라. 이번만 착하게 기다리자?”
심통 난 차민재를 어린애 다루듯이 품에 안고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달랬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진정시키고 다음 날 출장 가는 자신을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던 애인이 눈앞에 떡하니 기다리고 있을 때의 심경이란.
재언은 공항을 꽉 채운 사람들을 의식하며 당당하게 선수 관계자들과 함께 들어오는 차민재를 아는 척도 못 하고 근질근질한 입을 겨우 참아 냈다.
그래도 다행히 차민재의 옆에 있다가 재언을 발견한 이레일이 슬그머니 다가와 아는 척해 왔다.
“안녕하세요, 신 선생님. 계약한 업체에서 촬영팀이 올 거라고 얘기는 들었지만… 그게 설마 신 선생님네 회사일 줄은 몰랐네요.”
“이레일… 그러니까… 민재 씨는,”
“김은원 선수의 아버님께서 우리 쪽 사무실에 경호 의뢰를 넣었거든요. 저야 고향에 한 번 들른단 생각으로 의뢰비 상관없이 받았던 건데……. 갑자기 어젯밤 사장님께서 자기도 가겠다고…….”
모른 척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차민재는 이레일과 재언의 시선이 자신 쪽을 향하자 고개를 돌려 매우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재언은 저도 모르게 마주 손을 흔들며 이레일의 푸념을 한 귀로 흘렸다.
“사장님의 몸값을 생각하면… 아무 이득도 없는데 왜 굳이 의뢰를 받으시겠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신 선생님을 보고 알았습니다. 연애하시더니 사장님도 참사랑꾼이 된 모양입니다.”
“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재언은 이레일과 대충 인사를 마친 뒤 팀원들에게 돌아왔다.
“김은원 선수네 아버지가 아들을 정말 아낀다고 하더니……. 레헬을 경호원으로 고용까지 하고, 돈이 진짜 많은가 봐요.”
아니, 김은원 선수의 아버지가 아들을 무척 아끼는 건 맞지만, 레헬을 고용할 정도의 의뢰비도 아니었다. 해외 출장 가는 애인을 쫓아오기 위해 수작을 부린 남자의 뻔뻔한 행태일 뿐이었다.
재언은 팀원들의 오해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예쁘게 웃고 있는 레헬을 쳐다봤다.
이윽고 김은원 선수가 공항에 도착하고 재언과 팀원들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김은원 선수는 잡지나 TV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고등학생인 그는 버드맨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김은원이 팔짱을 끼고 경호를 맡게 된 히어로, 레헬을 힐끔 쳐다보며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왜 온 거야? 같이 사진 찍히면 내가 못생겨 보이잖아.”
대놓고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재언은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한 걸 겨우 참아 냈다. 잘생긴 사람과 같이 사진 찍고 싶지 않다는 게 딱 그 나이대의 투정 같아서 귀여웠다.
재언은 팀장이 김은원 선수와 인사하는 동안 차민재와 몇 번이고 눈이 마주쳤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만큼 큰 키에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척 눈빛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이레일을 대동하고 공항에 나타난 레헬의 모습에 재언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엄청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왠지 이런 게 진짜 연애하는 기분이라 목덜미가 근질거리고 머릿속이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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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요즘 경호원은 얼굴 보고 뽑아요?”
김은원 선수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재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또다시 툴툴거렸다.
“전 경호원이 아닙니다. 반가워요, 김은원 선수. 이번 xx 홍보팀 신재언입니다.”
재언이 싱긋 웃으며 불퉁한 표정의 김은원에게 명함을 건넸다.
버드맨과는 다르게 이쪽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는 천재라 그런지 솔직하고 건방진 면모가 엿보였다. 하지만 워낙 흉악한 놈들이 많은 세상, 이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동급생을 죽을 때까지 괴롭히는 학생도 있는데 자기보다 잘생긴 남자에게 질투하는 어린 소년을 대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재언의 명함을 건네받아 힐끔 확인한 김은원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챙겼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 재언은 누가 볼세라 화면을 가리며 차민재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래서 러시아까지 따라오려는 겁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의뢰를 받아서 가는 것뿐인데요.]
[이젠 뻔뻔하기까지?]
모른 척 뻔뻔하게 구는 그의 답장에 재언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은 채 핸드폰 전원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황당하긴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9박 10일간 해외 출장 때문에 애인을 만나지 못하는 것보단 함께 가서 같이 있는 쪽이 훨씬 나았으니까 말이다.
몇 시간 뒤, 러시아에 도착해 호텔에서 짐을 풀고 있던 재언은 애인의 얼굴을 드디어 대놓고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같이 다니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던 차민재가 자유시간이 주어지자마자 재언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호텔방문이 닫히자마자 몸을 비집고 들어와 껴안는 수작까지 부렸다.
“의뢰 때문에 왔다면서요.”
차민재가 크고 다부진 몸뚱이를 기대 오는 통에 아무리 힘이 좋고 덩치가 있는 재언이라도 서서 지탱하기가 힘들었다. 재언은 그대로 쭉쭉 밀려 침대에 같이 드러누웠다.
“겸사겸사요.”
“이제 와서 겸사겸사입니까?”
차민재는 재언의 위에 올라타 양껏 입술을 부딪친 뒤 옆으로 마주 보며 누웠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팀장이 방 하나를 혼자 쓰고 나머지 사원들이 두 명씩 2인실을 배정받아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팀장이 다른 사원하고 같이 2인실을 쓰기로 하면서 1인실이 비어 버렸다.
1인실을 쓰고 싶은 다른 사원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정했는데, 이번엔 럭키 가이가 잘 발동되었는지 재언이 이겼다. 그 덕분에 1인실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2인실에 다른 팀원과 함께 있다가 차민재가 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이번에는 일이 편해요. 대회에 우리 쪽 브랜드 액세서리를 낀 선수의 사진을 찍으면 되는데, 대회가 시작될 때만 좀 바쁘고 그 외에는 전부 자유시간이에요. 별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거 같은데, 민재 씨는요?”
“흐음. 아들을 시샘하는 다른 선수들로부터 경호를 맡아 달라는 과보호 의뢰입니다. 저도 그렇게 바쁘진 않을 거예요.”
그 대답을 들은 재언이 미소를 지으며 민재의 상의 단추를 풀고 그의 어깨를 잡아 능숙하게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으려는 순간,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와장창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을까. 재언은 한숨을 쉬면서 민재를 옆으로 밀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험악한 얼굴로 변한 차민재의 등을 토닥이며 밖으로 나오니 김은원 선수와 이레일,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험악한 분위기로 격하게 말다툼하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김은원 선수와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싸우고 있었고 이레일은 그사이에 껴서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었다.
큰 소리에 하나둘씩 호텔 복도로 나온 재언의 팀원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구경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재언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김은원 선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 자식이 계속 시비를 걸잖아요! 이거 놔 봐요. 한마디 더 해야겠으니까!”
재언의 물음에 착실하게 대답해 주면서도 김은원 선수는 자신을 막고 있는 이레일의 손을 뿌리치며 누군가를 노려보았다. 같은 선수인 듯 보이는 누군가는 유럽계의 외국인 선수였다.
눈가에 흉터가 있긴 하지만, 지금 싸우면서 생긴 것은 아니고 옛날에 생긴 흉터인 듯했다.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같은 동료로 보이는 이들이 앞을 막고 있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호텔 복도에서 아주 시끄럽게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는 점이다.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게 무슨 철천지원수인가 싶을 정도였다.
한국 기자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큰일이다. 이러면 재언의 회사 브랜드 이름에도 먹칠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랬다간 프로젝트도 무사히 마치지 못하게 될 테고 따 놓은 승진도 저 멀리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재언은 다급한 마음에 일단 김은원 선수의 어깨를 잡고 품에 안았다. 자신의 품에서 씩씩거리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이레일에게 손짓했다.
재언의 손짓에 이레일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얼른 상대 선수 쪽으로 다가가 두 사람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재언의 품에 안긴 김은원 선수는 여전히 씩씩거리긴 했지만, 잔뜩 화가 난 기운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신 주임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복도에 나와 있던 팀원 중 한 명이 재언에게 물었다. 재언은 김은원 선수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소란스러워서…….”
일단 갑작스러운 소란에 이쪽으로 몰려오는 다른 나라 선수들이나 관계자들을 피해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재언은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팀원들에게 손짓한 후 김은원 선수를 데리고 복도 맞은편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게 무슨 난리야…….’
재언이 김은원 선수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혀를 내둘렀는데, 어떻게 눈치챘는지 품 안에 있던 그가 몸을 움찔하고 떨더니 고개를 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저 자식이 갑자기 덤벼들었다고요! 난 잘 지내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갑자기 엄청 노려보더니 달려들잖아요!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김은원 선수가 우다다다 말을 내뱉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에 당황한 재언이 소년을 품에 안고 등을 두드리자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민재가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떨어트리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일단 떨어져서 얘기하죠?”
씩씩거리며 화를 내뱉으려던 김은원 선수가 차민재의 얼굴을 보고 주춤했다. 예쁘게 생긴 것도 있는데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위압감 때문에 저절로 움츠러들었던 탓이다.
다른 이들은 세계 최강이라 칭하는 S급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에게서 나오는 위압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재언의 눈에는 쩨쩨하게 어린애한테 질투나 하는 속 좁은 남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