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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59화 (259/324)

259화

차민재의 눈치를 보면서도 한참을 씩씩대던 김은원이 진정된 건 그로부터 30분 정도가 더 흘러서였다. 그에 반해 차민재는 여전히 질투의 눈빛을 불태우고 있었다.

김은원은 전혀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채 차민재를 불만 어린 눈으로 힐끔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전 그냥 안부만 물었는데 그 자식이 갑자기 덤벼든 거라고요. 억울해요!”

김은원의 이야기를 듣는 재언의 고개가 억울한 그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끄덕이면서도 살짝 기울어졌다.

이야기 속의 김은원과 상대 선수의 사이는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두 사람은 2년 전부터 대회마다 금메달을 주고받으며 선의의 경쟁을 펼쳐온 데다 나이까지 비슷했다. 서로의 SNS를 팔로우해 주고 피드가 올라오면 빠짐없이 ‘좋아요’를 눌러 줄 만큼 사이가 좋았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도 하고 대회가 끝나면 함께 밥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심지어 김은원은 상대 선수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그의 가족들과 즐거운 식사 시간을 인증까지 할 정도였다.

상대 선수의 이름은 러시아 국적의 예차프 모고스키. 직전 시즌 피겨 주니어 그랑프리 남자 싱글에서 러시아 대표로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김은원과 마찬가지로 미래가 기대되는 전도유망한 피겨 선수였다.

그만큼 공인으로서 논란이 일어나 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고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김은원의 무엇이 그의 버튼을 눌리게 만든 것일까.

그 점이 가장 의문이었지만, 재언은 김은원의 마음이 상할까 솔직하게 묻지 않고 에둘러 물었다.

“혹시 예차프 선수에게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알려 줄 수 있습니까?”

“…….”

조심스럽게 묻는 재언의 물음에 김은원은 팔짱을 끼고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자신들이 머무는 이 호텔은 러시아 빙상연맹에서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 및 관계자들에게 싸게 제공하는 4성급 호텔이었다.

러시아 선수들뿐만 아니라 김은원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선수들이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호텔 측에서도 그랑프리 시리즈가 시작하면 일반인 투숙객은 받지 않고 오로지 관계자들 예약만 받을 정도였다.

그러니 김은원과 예차프가 호텔에서 마주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 컨디션은 어때? 저번에는 안 좋아서 4위까지 밀려 버렸잖아.”

호텔 복도에서 만난 예차프와 인사를 나눈 뒤 김은원이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재언은 그 정도면 친한 친구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컨디션 조절은 선수에게 예민한 사항이기에 그 말을 듣고 예차프가 화를 낸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예차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그의 말에 대답했더랬다.

“그럭저럭… 요즘 잠을 잘 못 잤더니 힘드네. 그러는 원은 어때? 비행기 타고 왔지? 시차 적응도 해야 하는데 컨디션은 괜찮아?”

“나도 그럭저럭이지 뭐. 그보다 네 아버지랑 동생은 잘 지내? 저번 식사 초대에 감사하다고 한국에 놀러 오면 우리 아빠도 널 대접하고 싶다고 했어.”

김은원은 저 멀리서 경계 어린 표정으로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레일을 보면서 질린다는 듯한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저거 보여? 우리 아빠 진짜 과보호라니까. 대회에 나가는데 히어로를 고용했지 뭐야! 돈 낭비 아니냐고… 부끄러워 죽겠어.”

김은원이 투덜거리며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지만, 예차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험악한 얼굴로 김은원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해!”

“뭐? 왜 그래?”

김은원도 화를 버럭 내는 예차프의 반응에 당황해 목소리가 덩달아 높아졌다.

“네가 뭔데 그걸 궁금해하냐고!”

안 그래도 낯빛이 좋지 않아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이가 소리치며 달려들자 김은원이 당황해서 팔을 들어 그의 양 손목을 잡았다. 그때, 김은원을 지켜보고 있던 이레일이 달려와 둘을 떨어트렸다.

이레일의 힘에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예차프는 김은원에게 러시아어로 폭언을 마구 쏟아 냈다. 잘 이야기하다가 난데없이 뺨을 맞은 격이 되어 버린 김은원도 결국 참지 못하고 화가 난 기분을 그대로 내보였다.

그렇게 서로 욕설을 주고받던 중 신재언과 차민재가 방에서 튀어나와 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이다.

여기까지 들었을 땐 김은원이 별 이유 없이 욕을 들은 건 맞았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 그가 예차프의 무언가를 건드렸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 꼬맹이가 그렇게 나쁜 애로는 보이지 않는데…….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 그에게 역린으로 다가왔던 것일 수도. 제발… 더 이상의 소란은 반갑지 않아…….’

김은원이 잔뜩 울상을 지으며 구시렁거렸다.

“저번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지랄이냐고…….”

툭툭 내뱉는 말이 밉상이긴 한데, 그게 또 귀여워 보였다. 재언은 피식 웃으며 억울한 김은원의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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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온 재언은 뒤에서 다짜고짜 제 어깨를 끌어안은 민재에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기요, 민재 씨. 혹시 김은원 선수가 몇 살인지 알고 있습니까?”

“네. 새파랗게 어린놈이죠.”

“그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질투하고 싶어요?”

“흥.”

차민재가 코웃음을 치더니 재언을 끌어안은 채 소파로 이끌었다. 소파 위에 눕혀 온몸을 꽁꽁 휘감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힘에 재언은 바둥거리다가 포기하고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차민재는 재언이 자신의 품에 얌전히 안겨 오자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 지으며 눈앞에 보이는 머리카락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소란 때문에 하지 못했던 행위를 이어서 해 보려는 눈물겨운 수컷의 사투였다.

재언은 이미 흥이 다 깨진 상태였지만, 일부러 질투하는 척까지 해 가면서 분위기를 다잡으려 애쓰는 차민재가 귀엽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그도 못 이기는 척 휩쓸려갈까 했는데…….

똑똑-.

또 저지당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재언이 깜짝 놀라 민재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야말로 재언을 소파에 눕히고 새하얀 피부에 입 맞추려 했던 차민재는 비어 있는 제 품 안을 멍하니 내려다보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팀원일 수 있잖아요.”

미안한 듯 변명하며 문을 열자 보인 사람은 안타깝게도 재언의 회사 동료가 아닌 이레일이었다. 하필이면 상사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는 타이밍에 나타난 것인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레일이 재언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신 선생님! 김은원 선수를 위로해 주셨다고요. 덕분에 선수도 많이 진정됐는지 방에 들어갔습니다.”

“음… 이레일… 일단 힘내시고요.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재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마주 인사해 준 뒤 그가 방으로 들어올 수 있게 비켜 주었다. 안으로 들어온 이레일은 자신을 향한 살기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범인이 누구인지 방 안을 둘러보자 소파에 앉아 눈을 잔뜩 부릅뜬 채 자신을 노려보는 사장님이 보였다. 그에 살짝 뒷걸음질 친 이레일은 뒤따라 들어오는 재언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사장님이 왜 저렇게 성질 더러운 복어가 되어계신 건가요?”

“복어치곤 상당한 미인이죠…….”

제 애인의 외모를 찬양하는, 상당히 쓸데없는 재언의 대답을 애써 무시한 이레일이 결국 조심스럽게 차민재에게 물었다.

“저… 사장님께서 알아보라고 하신 걸 알아 왔는데……. 제가 뭘 방해한 건가요?”

“아니, 아주 유능한 사이드킥이야. 이렇게 빨리 알아 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차민재는 빈정거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를 말을 늘어놓으며 이레일이 건네주는 서류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예차프 선수의 뒷조사를 좀 했습니다. 2주 전부터 그의 아버지가 실종된 상태이고 동생은 현재 친척 일가에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가족들 안부를 물은 것만으로도 화가 났던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과연… 아버지는 실종 상태이고 동생은 친척 집을 전전하는 상황이라면 예민할 만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은원 선수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가족들 안부를 물었으니 화가 난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한테 화를 낸 건 성격이 너무 예민하지 않나 싶었다.

방 안에 비치된 냉장고 문을 연 재언은 안에서 육포를 꺼냈다. 러시아 대부분의 호텔 냉장고엔 술과 육포가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미성년자들도 머무는 호텔인데 술이 있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해할 순 없었지만, 러시아에선 도수가 낮은 술엔 나이 제한이 없다니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재언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술 대신 생수병의 뚜껑을 땄다. 그러고 보니 최근 체어맨이 러시아 전역에서 활동 중이고 했는데, 혹시라도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조금 걱정이었다.

체어맨 덕분에 살았지만, 그 때문에 부모를 잃은 저 소년을 그가 기억하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레일도 마찬가지로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로 기억을 못 하는 건지도 헷갈렸다.

“그리고… 예차프의 실종된 아버지가… 그 악랄한 다크 카오스의 여덟 자식 중 한 명인 체어맨에게 납치당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푸웁!”

재언이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물을 뱉어 내며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 냈다.

“콜록! 콜록, 콜록!”

“신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이레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한참 동안 기침을 이어 가던 재언은 입가에 흐르는 물을 겨우 닦으며 진정할 수 있었다.

“누구요?”

“네?”

“누가 누굴 납치했다고요?”

“아…….”

재언의 질문을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이레일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레일은 일반인에게는 절대로 정보를 유출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하는 편이지만, 이상하게 재언에게는 반항할 수도,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일반인에게는 철저하게 기밀인 사항을 주절주절 읊고 말았다. 뭐, 사장님도 모르는 척 재언에게는 다 말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며 말이다.

“예차프의 아버지. 드레고프 모고스키가 다크 카오스의 자식인 체어맨에게 납치당해 지금까지 실종 상태입니다.”

‘그 자식, 아동학대범이었나?’

절대로 체어맨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재언은 납치당해 실종된 상대방을 미심쩍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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