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잔인하기로 세상에서 손에 꼽는 빌런인 체어맨.
3m나 되는 장신에 나뭇가지 같은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으며 화상 자국으로 피부가 일그러져 항상 면사포를 쓰고 다니는 괴인.
그에 대한 무수한 소문 중에 공통된 점이 있다면 바로 신출귀몰하다는 것이다. 그의 능력은 어디든 갈 수 있는 문을 만들어 내는 것, 어딜 숨던지 체어맨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체어맨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어느 부부의 핸드폰에서 발견된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부부가 놀이터에서 노는 아들을 찍어 놓은 사진에 우연히 포착되고 말았다.
처음 공개되었을 때는 슬렌더맨이라는 미지의 괴담 속 존재로서 더욱 유명한 사진이었다.
이 사진을 찍었던 부부가 집 안에 아들만 덩그러니 내버려 두고 실종되었고 수색하던 히어로들에 의해 그들이 찍은 괴인이 체어맨이라는 것까지 밝혀졌다.
그들이 체어맨에게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받았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 체어맨을 붙잡지는 못했다.
‘물론 그 부부가 아들을 제물로 삼으려던 악마 숭배자였다는 건 언론에 공개되진 않았지. 아들을 학대하고 희롱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얼마나 외부적으로 이미지 관리를 잘했던 걸까.’
이레일이 보여 주는 체어맨의 사진을 보며 재언이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이레일을 뚫어지게 쳐다봤는데, 그가 마치 조별 과제 발표 도중 교수에게 질문을 받은 학생처럼 머쓱하게 웃었다.
“저… 신 선생님. 뭔가 할 말이 있으신가요?”
“아, 미안합니다. 너무 쳐다봤죠?”
“아니요. 뭔가 할 말이 있으신 것 같기에…….”
“아니, 그냥요. 이레일은 혹시… 이 사진을 보고 뭔가 떠오르는 건 없습니까?”
체어맨의 말을 너무 잘 들어서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리고 히어로가 되다니,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미심쩍은 재언의 눈에 이레일은 체어맨의 사진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살짝 기운이 빠진 재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남자가 사이코패스 빌런이라는 건 잘 알아요. 이 남자에게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입니다. 혼자 남은 자식들은 어떤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야 할까요.”
뭐, 그 부모라는 작자들을 그대로 두었다면 아이를 죽일 수도 있을 만큼 학대하던 사람들이지만 이레일이 그것까지 알 길은 없었다.
이레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기에 재언은 어깨를 으쓱하며 체어맨이 찍힌 사진을 뒤집었다. 그리고 이레일은 흰 면만 보이는 뒤집은 사진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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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를 전부 마친 이레일이 방을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재언은 불퉁한 복어가 아니라 삐친 고양이가 된 차민재의 눈치를 보며 냉장고에서 도수가 낮은 술을 꺼내 들었다.
“이거, 우리나라에선 술인데 러시아에선 음료로 분류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애들도 많이 마신다는데, 우리나라 선수가 이걸 먹으면 소년법 위반일까요, 아닐까요… 하하…….”
고양이가 되었던 건 자신인데 왜 민재가 점점 고양이처럼 변해 가는지 모르겠다. 차민재는 재언의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단단하게 여미고 있던 가운을 느슨하게 풀어 헤치며 김이 다 빠졌다는 듯 작게 속삭였다.
“흥이 다 빠졌으니까 이리 와요. 재언 씨, 피곤해 보여요.”
사실 해외 출장 가기 전에 재언이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야근도 하고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출장 준비를 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도, 쉬지도 못했다.
그나마 내일까지 자유시간이라서 쉴 생각이었는데 김은원과 예차프가 저러고 크게 다투는 바람에 신경 쓸 게 생겨 버렸다.
피곤한 상태를 의식하니 갑자기 두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재언이 피곤한 걸 알면서도 뜨거운 밤을 보내려 했던 민재는 참으로 파렴치하고 양심이 없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차민재의 말에 재언은 피식 웃으며 욕실에서 대충 씻고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그걸 아는 사람이?”
“빨리 끝내고 자려고 했어요.”
“그 거짓말, 믿어는 드릴게요.”
그렇게 재언은 꽤 쌀쌀한 기온에 오늘따라 따뜻한 차민재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점점 단잠에 빠지려던 찰나.
“-!!---!!”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잠귀가 그렇게 밝은 편은 아니지만, 잠자리가 달라진 것 때문에 평소보다 예민해진 재언이 눈을 잔뜩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골이야…….’
저절로 끙끙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에 차민재도 잠에서 깨 버렸는지 침실 등을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보고 올 테니 재언 씨는 여기 있어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같이 갑시다.”
차민재 혼자 가게 두었다가 다음 날 누군가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은 듣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피곤하더라도 같이 가는 게 나았다.
재언은 몸을 일으켜 흘러내린 가운을 벗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가자 긴 복도에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아까 들렸던 말소리만이 계속 이어졌다.
이 층의 다른 사람들은 컨디션 조절과 피곤함에 이미 꿈나라에 빠진 것 같다. 하지만 저 소란이 계속 이어진다면 잠에서 깰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시끄럽게 떠드는 쪽은 한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그나마 제정신인 모양이었다.
“조용히 해……. 지금 몇 시인 줄 알고 그렇게 크게 떠드는 거야.”
“하지만……!”
복도를 걸어갈수록 점점 더 가까워지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재언은 졸음기 어린 눈으로 차민재를 쳐다봤다. 그도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을 교환한 두 어른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소리 없이 걸어갔다.
재언이 묵는 방에서 가까운 곳에 공용 휴게실이 있는데 거기에 소년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재언도 잘 아는 김은원 선수였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운동을 다녀왔는지 가벼운 트레이닝복에 어깨에는 타월을 걸치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김은원보다 왜소한 체구지만 키가 큰 금발의 소년, 예차프였다.
서로 오해를 풀고 화해한 건지 두 사람의 분위기가 매우 자연스러웠다.
“아저씨가 실종되셨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분명 집에 계셨는데 갑자기 사라지셨어. 그날, 계속 동생하고 거실에 있었는데 방에 계시던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지 않으셨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오늘로 벌써 3주째야……. 한 번도 이렇게 말없이 사라지신 적이 없었는데, 무슨 봉변을 당하신 게 분명해.”
예차프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족이 실종된 상태에서 대회에 출전하는 그의 속이 얼마나 까맣게 문드러졌을까. 게다가 예차프의 말을 들어 보면 그는 굉장히 좋은 부모이자 매니저였다.
하지만 재언은 교묘하게 세뇌당해 판단력이 흐려진 아이들이 자신이 당하는 불합리한 폭력을 폭력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아버지야… 남들한텐 잘 모르겠지만… 나한텐 정말 좋은 분이셨어. 내 꿈을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왜 아버지가…….”
울먹이는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재언은 그의 목소리에 잠시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학대를 받은 게 아닌가? 아니면 세뇌를 심하게 당했다던가? 체어맨이 잘못 알았다고?’
속으로 한참 동안 고민하던 재언은 두 소년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뒤에서 차민재가 그를 불러도 모른 척 입을 막으며 두 사람을 살폈다.
묵묵히 예차프의 이야기를 듣던 김은원은 팔을 들어 올리더니 그의 어깨에 얹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손을 움찔거렸다.
‘저건 또 뭐람?’
몇 번이나 허공 위에서 움찔거리던 손이 예차프의 어깨를 덥석 잡고 끌어당겼다.
‘청춘이네!’
재언의 어깨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데려온 히어로들 있지? 거기에 대단한 사람이 있거든. 내가 한번 부탁해 볼게. 꼭 네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됐어. 난 의뢰비를 내줄 돈이 없단 말이야.”
예차프의 거절에 김은원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한테 내라고 안 할 거거든?”
“그러면 네가 낸다고? 네가 왜?”
“…내가 돈이 더 많으니까!”
재언은 속으로 ‘어이구야’를 몇 번이고 외며 청춘 드라마를 찍고 있는 둘을 피해 차민재와 방으로 돌아왔다. 일단 두 사람의 갈등이 일단락된 건 확실했다.
피곤해서 머리는 아픈데, 잠이 완벽하게 깨어 버렸다. 재언이 한숨을 쉬면서 단언했다.
“만약 예차프 선수가 학대당한 게 아니라면, 이번 사건에 체어맨은 관여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아동학대범들만 잡아가니까요?”
“어? 알고 계셨네요?”
“협회에서 숨기고 싶어 하는 진실 중 하나죠.”
‘역시.’
체어맨이 납치하는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알리지 않은 거였다. 재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거예요. 그러니까 체어맨은 절대 예차프의 아버지를 납치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를 존경하는 빌런이 모방 범죄를 저지른 것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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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익… 히이이익.”
중년의 남성이 비명을 지르며 문을 열고 도망쳤다. 하지만 문을 열자 나오는 기다란 폐가의 복도를 지나면, 또다시 문 앞으로 돌아왔다. 마치 거대한 미로에 빠진 것처럼 남성은 출구를 찾지 못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곳 하나 없이 엉망이었다. 마치 고문이라도 당한 것처럼 만신창이었다. 결국, 지쳐 버린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자 그의 앞에 긴 다리가 와서 섰다.
“자, 선택하세요. 다섯 가지 선택지 중 당신이 살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입니다. 잘못된 나머지를 선택한다면 당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겁니다.”
긴 다리를 가진 이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그의 말에는 무시무시한 뜻이 숨겨져 있었다. 남성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려 기었다.
그에 면사포를 뒤집어쓴, 키가 큰 괴인이 잇몸이 보이도록 미소 지으며 남성의 발목을 잡고 질질 끌었다. 남성의 끔찍한 비명이 폐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