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요즘 애들은 싸워도 금방 화해하니까요.”
다음 날 아침,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들고 찾아온 이레일이 상쾌한 표정으로 간밤의 소란에 대해 감상을 남겼다.
룸서비스는 선수들에게만 제공된다는 호텔의 독특한 방침 때문에 다른 관계자들은 각자 알아서 식사를 챙겨야 했다.
재언이 아침을 어떻게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이레일이 나타나 두 사람분의 간단한 아침 식사를 건네주었다.
‘상사의 애인 아침 식사까지 챙겨 오다니, 조금 미안한걸.’
이레일의 센스에 감탄하면서도 사장과 함께 출장을 나오면 얼마나 피곤하고 귀찮을지 직장인으로서 공감이 갔다.
재언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이레일을 쳐다보자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니요. 이레일 씨 잘생겼네요.”
차민재의 옆에 있을 땐 잘 못 느꼈는데 이레일도 나름 준수하니 잘생긴 얼굴이었다. 물론 누구나 차민재의 옆에 서면 오징어가 되긴 한다. 아마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데 재언의 대답을 듣자마자 헉하고 숨을 들이마신 이레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차민재는 지금 욕실에 들어가 씻는 중이었고 재언의 목소리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으니 들리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 세계 최강의 남자가 애인의 목소리를 단 하나로 놓치지 않으려 할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지난밤 좋은 시간을 연달아 방해받은 탓에 상당히 불만이 쌓여 있어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분명 일거리가 해일이 밀려오듯 몰아칠 예정이었기에 여기서 더 큰 시련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다가 사장님이 들으면… 생각만으로도 무섭습니다!”
이레일은 진심으로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재언은 사색이 된 그의 반응을 피식 웃으며 장난처럼 가볍게 넘기고 이레일의 전신을 눈으로 훑으면서 새삼스러운 듯 말했다.
“아니, 정말로요. 키도 큰 거 같고, 어깨도 넓어졌는데…….”
“어렸을 때는 작았는데 지금은 잘 먹어서 그런지 아직도 크는 것 같긴 합니다. 이번에 연봉이 올랐거든요.”
맡은 사건 의뢰비만 받는 줄 알았는데, 부가적으로 연봉도 받는 건가 싶었다. 보아하니 레헬이 사이드킥으로 들어온 그를 금전적으로 잘 챙겨 주는 듯했다.
그래도 사이드킥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후계자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히어로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보통이라고 하던데 두 사람은 비즈니스적인 면모가 더 드러나서 그건 조금 신기했다.
‘그보단… 김치찌개 먹고 싶다.’
한국을 떠난 지 하루 만에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재언은 이레일이 사 온 음식들을 뒤적거렸다.
“이레일은 레드-헬-파이어를 존경해서 한국까지 쫓아온 거라고 했잖아요. 결국 그의 사이드킥이 된 것도 그렇고… 지금 생활에 만족해요?”
재언이 은밀한 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삭였다. 다른 자식들처럼 완전히 복종하는 건 아니지만, 재언으로 인해 능력을 각성한 만큼 그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평소의 이레일이었다면 어색하게 웃으며 빠져나갔을 질문에 탁한 눈빛으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고향에 있을 때 왠지 모를 허전함을 계속 느꼈어요. 분명 사장님을 다시 만나면 외로움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이상해요. 그때보다 지금이 더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공교롭게… 이런 식으로 꼬여 버리네.’
멍하니 창문을 응시하는 이레일의 옆모습을 보며 재언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잃어버린 조각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찾아 헤매던 마음의 조각이 레헬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도 이미 예전에 눈치챈 것 같았다.
“뭐, 그것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레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민재가 욕실에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것도 젖은 머리를 능력으로 말리면서 말이다.
분명히 방금 씻고 나왔을 땐 머리가 젖어 있었는데 소파로 향하는 그 짧은 몇 초 만에 머리가 뽀송하게 말라 있었다. 빌런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헬파이어 능력으로 머리를 말리다니, 이 얼마나 재능 낭비인지.
재언은 이레일의 눈을 마주 보던 걸 멈추고 상쾌하게 웃으며 차민재에게 커피를 건네주었다.
“아무리 선수들이라 해도 아직 미성년자들이니까요. 이상한 짓 못 하게 잘 감시하자고요. 저희 쪽도 김은원 선수를 전담해서 맡을 테니까 이레일은 수고스럽겠지만 예차프 쪽을 잘 봐주세요.”
“물론입니다. 곤란에 빠진 시민을 그냥 지나칠 순 없으니까요.”
이레일은 정의로운 히어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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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차프는 김은원과 1, 2위를 다툴 정도로 실력이 좋은 선수라고 했는데 오늘 출전한 경기에서 실수를 연발하면서 낮은 점수를 받아 예선을 통과하지 못할 확률이 높아졌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빌런에게 납치당했으니 냉정한 상태로 대회를 치르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어른이어도 힘든 일인데 아직 열일곱에서 열아홉 정도의 나이일 그가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어제 김은원에게 털어놓으면서 그나마 추스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동요를 숨기진 못한 듯했다.
그런 예차프가 가여우면서도 재언은 빈말로라도 그런 못된 빌런이 있느냐며 험담할 수가 없었다. 체어맨이 끼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아직도 예차프의 아버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식들이 뒤에서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 범법행위를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쪽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도 체어맨에 관해서 만큼은 이상하게 묘한 신뢰가 있었다. 그가 허튼 생각으로 일반인을 건드리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예차프는 경기가 끝나고 자신의 처참한 점수를 보더니 인사나 인터뷰도 하지 않고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실버 링 귀걸이를 귀에 끼고 있던 김은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예차프가 향한 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러다가 김은원까지 점수를 엉망으로 받으면 이번 프로젝트에 차질이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재언은 당장이라도 경기를 때려치우고 친구의 뒤를 쫓을 것 같은 기세인 그를 진정시켰다.
“김은원 선수, 저쪽에는 제가 한번 가 볼 테니까 일단 시합에 집중해 주세요.”
이미 이레일에게 사정을 전부 설명한 이후인지 김은원은 불안한 눈빛을 하면서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언은 들고 있던 액세서리 케이스를 옆에 있던 김 사원에게 넘겨주며 이레일을 돌아봤다.
“신 선생님…….”
“같이 갑시다. 어제 두 선수가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거든요. 저도 걱정이 되네요.”
이레일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섰다.
두 사람이 예차프를 찾으러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휴게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들은 슬픔에 잠긴 그의 뒷모습에 차마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저렇게 슬퍼할 정도면 분명 좋은 아버지였겠죠. 대체 왜 이런 비극을 저 어린 학생이 견뎌야 하는지……. 체어맨 그 빌런은… 정말 최악의 빌런입니다.”
이레일은 울고 있는 예차프를 보면서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못 낸 채 조용히 분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레일이 무고한 가정을 파탄 낸 상대에게 분노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재언은 이레일의 반응보다도 예차프의 행동이 조금 더 신경 쓰였다. 도저히 저 눈물이 거짓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한동안 쩔쩔매고 있을 때 뒤에서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들, 여기서 뭐 해요? 우리 형은 왜 계속 쳐다보고 있어요?”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자 이제 막 열 살 정도 되었을 법한 아이가 잔뜩 의문이 섞인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인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당황스러우면서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였다. 바로 휴게실 안에서 울고 있는 소년과 아주 똑 닮아 있었다.
“형!”
갑작스럽게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예차프가 황급히 눈물을 수습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둘은 누가 봐도 혈연인 듯 똑같이 생긴 형제였다.
예차프는 자신을 향해 달려와 안기는 동생을 끌어안은 채 입구에 서 있는 신재언과 이레일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은…….”
“아, 예차프 선수… 저는 히어로입니다. 당신의 도움이 되고 싶어서 왔어요.”
이레일이 얼른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자신을 소개하며 예차프에게 다가갔다. 히어로라는 말을 듣자마자 예차프는 경계를 풀고 건네받은 명함을 뚫어지게 몇 번이고 읽었다.
이레일은 아버지를 잃은 가여운 소년을 도와주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았다.
재언은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밖으로 나와 예차프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레일을 쳐다보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엔레이드맨을 불렀다.
“엔레이드맨. 체어맨은 뭐 하고 있어?”
“체어맨 말씀이십니까…….”
재언의 부름에 엔레이드맨이 모습을 드러내 허공에 둥둥 뜬 채 팔짱을 끼었다.
“그는 지금 사냥감을 사냥 중입니다. 부르신다면 부를 순 있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재언은 엔레이드맨의 표정이나 분위기에서 왠지 모르게 그가 허둥지둥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재언이 그에 대해 더 캐물으려는 순간 이레일이 휴게실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왔다.
“이레일? 어디 갑니까?”
재빠르게 엔레이드맨을 등 뒤로 숨긴 재언이 당황해하면서 묻자 이레일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앞만 바라보며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악독한 빌런을 잡으러 갑니다. 저는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어? 잠깐만요, 이레일!”
뛰듯이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이레일을 소리 높여 불러 세우려고 했다. 재언의 등 뒤에서 허리춤을 끌어안은 숨은 엔레이드맨은 이레일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