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62화 (262/324)

262화

이레일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의 부모는 어떻게 포장해도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결국엔 자식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는 그때 받은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고 지금도 괴로웠던 어린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불타는 집 안에 쓰러져 있던 자신을 히어로가 구해 주었다는 것만이 그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레일은 평범한 이들이 행복하고 평탄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자신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히어로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느 빌런도 일반인의 평화를 깰 수 있는 권리 따위 없다고 굳게 믿었다.

어째서 열심히 살아가는 가족이 저렇게 고통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빌런의 입장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레일과 재언을 보고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예차프는 동생을 끌어당겨 옆에 앉힌 뒤 입을 열었다.

“돈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제가 대회에 나가고 상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집안 사정이 많이 좋아졌어요. 동생도 선수를 목표로 연습했지만, 운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지금은 학업에 충실할 수 있을 정도로요…….”

동생의 어깨를 끌어안은 그가 이레일의 눈치를 한번 봤다.

“아버지가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고 저도 견디기 힘들어서…….”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청년이 겪기엔 괴로운 일이었다.

이레일 또한 예차프의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고 부모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괴로운 기분이 들었었다.

그러니 좋은 아버지를 잃은 예차프가 얼마나 힘들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빌런을 향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레일은 예차프의 아버지를 반드시 구해 내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김은원 선수에겐 레드-헬-파이어, 사장님이 붙어 있으니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이레일이 잔뜩 분노한 얼굴로 휴게실 밖으로 뛰쳐나오자 재언이 깜짝 놀라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예차프 또한 동생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따라 나왔다.

“이레일, 이레일! 잠깐만요! 이 넓은 땅에서 그들을 대체 어떻게 찾으려고요?”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거예요? 저도…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히어로 님. 제발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차례로 자신을 잡는 목소리에 퍼뜩 뒤를 돌아 두 사람을 본 이레일이 머뭇거리더니 자리에서 멈췄다. 자신 혼자였다면 위험한 곳이라도 무턱대고 빌런이 있는 곳에 쳐들어갔을 텐데 아무 힘도 없는 저들이 쫓아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무리 신재언이 묘한 분위기를 가진 정의로운 사람이어도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었고 그건 예차프도 마찬가지였다. 무자비한 빌런이 있는 곳까지 저들이 따라오게 할 순 없었다.

재언은 일단 진정한 것처럼 보이는 이레일을 끌고 다른 선수나 관계자들의 눈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신 선생님은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위험합니다…….”

“나보다 지금 머리를 식혀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이레일. 일단 진정하고 민재 씨한테 연락합시다.”

“사장님께서 나서 주신다면 일을 쉽게 해결할 순 있겠죠……. 일단 사장님께서 나타나는 순간 다 버리고 도망치니까요. 게다가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빌런이니까 더욱 도망치기 쉽겠죠.”

그건 맞는 말이었다. 레헬이 뜨면 가장 먼저 도망가라고 명령한 게 자신이었으니까.

비록 자신을 약자로 생각해 주는 것에 대해 양심이 조금 찔렸지만, 다른 능력자들에 비해 공격력이 없는 능력을 가진 건 맞으니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납치된 드레고프 씨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사장님께서 나서신다고 해도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를 빌런을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릴 거고요.”

체어맨이 걱정되긴 했지만, 재언은 이레일에게 히어로 협회에 연락하는 게 낫지 않겠냐 같은 정상적인 조언은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이레일은 본능적으로 혼자서 체어맨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저는 체어맨이 어디 있는지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음파와 진동을 가집니다. 그리고 제 능력의 범위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저는 반드시 체어맨이 내는 진동을 찾아낼 것이고 그가 어디로 도망가든 쫓을 겁니다.”

재언은 그의 말에 속으로 탄식했다.

‘집착이 이 정도면 소름 돋을 정도네. 체어맨이 어디로 가든 쫓아가겠단 소리잖아? 그의 능력이 설마 체어맨을 찾기 위해 특화되었을 줄이야……. 이 정도면 그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체어맨에게 명령을 내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이레일은 말을 마치고 능력을 사용하는 듯 한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체어맨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인데 사장님께서 오시면 김은원 선수의 경호에 구멍이 생깁니다. 그러니 저 혼자 그를 찾으러 갈 테니 사장님께 말씀 좀 잘 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레일이 머리에 열이 오른 상태에서도 나름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재언은 홀린 듯 발길을 움직이는 이레일을 잡지 않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엔레이드맨이 사냥을 시작했다고 했지. 그러면 예차프의 아버지를 납치한 건 체어맨이 맞는 것 같은데……. 대체 왜 납치한 거지?’

재언은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 이레일의 상의 후드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 고개를 돌려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예차프와 그의 동생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도 같이…….”

아버지를 구하고 싶어서 저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려는 모습이 거짓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재언은 몸을 들썩이는 예차프의 어깨를 잡아 진정시켰다.

“그를 쫓아가는 건 위험합니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저도 동행한 히어로에게 연락해 볼 테니까…….”

재언은 핸드폰을 꺼내 차민재에게 전화를 걸려고 버튼을 누르다가 다시 화면을 끄고 예차프와 시선을 마주했다.

“…예차프 선수.”

“네?”

“혼란스러운 건 알지만 몇 가지만 여쭙고 싶어서요.”

예차프는 재언이 김은원과 함께 온 사람이라는 것만 알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재언을 이레일과 비슷한 히어로 쪽 사람이라고 생각한 듯 예차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언도 그에게서 대답을 끌어내기 위해 굳이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혹시… 아버지에게 학대당하거나, 아니면 그에게 폭력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밖에서와 집 안에서 보이는 행동이 다르던가요. 저에겐 다 말해도 괜찮습니다. 어디에도 알리지 않을 겁니다.”

재언의 말에 예차프가 망설임도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매우 불쾌해했다. 그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절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엄하셨지만 잘하면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분이세요. 하물며 손찌검이라니요!”

“아… 그렇군요.”

재언이 말하면서 기분이 격해지는 듯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그에게 사과하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때, 타이밍도 좋게 예차프의 품에 있던 그의 어린 남동생이 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형, 나 화장실.”

“아… 그래……. 저, 화내서 죄송했습니다. 김(Kim)한테도 그렇고… 아버지 일에 예민해져서 자꾸 화가 나고… 그래요.”

예차프가 공손하게 사과의 말을 건네며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 눈물을 훔치더니 어린 동생을 데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형제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재언도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혀를 차며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곁에 있을 엔레이드맨을 불렀다.

“엔레이드맨. 체어맨이 어디 있는지 찾았어?”

“네. 여기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폐공장에서 사냥감을 가지고 놀고 있더군요.”

“아직도?”

“네. 그건 체어맨의 놀잇감이니까요.”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레일이 그를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기억을 잃었다면서 체어맨의 진동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보면, 머리로는 잊었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다는 그런 소리인가 싶었다.

형제가 들어간 화장실을 한번 쳐다본 재언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조용히 그 길을 안내해 줘. 일단 이레일이 체어맨을 만나기 전에 자초지종을 들어야겠어.”

그 길로 밖으로 나간 재언은 택시를 잡아 엔레이드맨이 알려 준 주소로 향했다.

@

이레일은 심장이 거세게 뛰는 걸 느꼈다.

이 두근거림은 분명 악독한 빌런을 만나기 전에 느끼는 불안과 초조, 공포에서 비롯된 게 분명했다. 그의 귓가에 울리는 진동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이레일은 빌런 체어맨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었다. 물론 아예 면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전에 다크 카오스가 그를 대동한 채 도심에 나타났던 적이 있어 얼핏 봤었다.

그때 느꼈던 진동을 지금도 기억하는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오로지 그의 진동만이 귓가에 울리고 있을 리 없었다.

어느덧 이레일은 다 쓰러져가는 폐공장 앞에 도착했다. 문득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 내리는 밤…….”

자신은 이런 폐공장에서 사는 떠돌이 가출 소년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몸이 약하고 왜소하다는 이유로 구걸하러 다녔고 그렇게 얻은 돈은 덩치 큰 패거리들에게 모두 빼앗겼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오수를 마셔 버린 그날, 장이 꼬이는 듯한 고통에 배고픔이 더해져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지냈던 폐공장과 비슷한 건물 앞에서 이레일은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 고동, 그리고 익숙한 진동을 느끼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두 손을 뻗으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으어… 어어어어으으…….”

“헉…….”

과거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멍했던 이레일의 머릿속이 갑자기 깨끗하게 비워졌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했다. 히어로 협회에 바로 연락해 지원 요청을 해야 했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혼자서 이곳까지 와 버렸다.

당황스러워하는 이레일의 눈앞에 쓰러진 이는 속옷 바람으로 온몸에 끔찍한 고문 흔적을 단 남성이었다. 남성은 고통과 공포로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레일을 보자마자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바로 예차프의 아버지, 드레고프였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오셨군요. 어린 꼬마 신사님, 이곳은 위험한 곳이니 모른 척 나가 주신다면 저도 손을 쓰진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레일은 몸을 숙여 기절해 버린 드레고프를 끌어안은 채 저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는 면사포를 뒤집어쓴 키가 큰 괴인. 가늘고 긴 팔다리 때문에 마치 슬렌더맨 같다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