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당신이…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이레일은 얇고 반투명한 면사포 너머로 ‘그’가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 봤을 땐 다크 카오스의 위압감에 가려져 제대로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그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니 지금 이 떨림과 기대감은 분명 거대 빌런을 앞에 둔 히어로로서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꼬마 신사님, 그는 제 사냥감이랍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의감만 넘쳐 피를 본 이들을 많이 봐왔지요. 이대로 목숨을 저버리기엔 아까운 인생이니 부디 이대로 조용히 뒤돌아 당신만의 정의를 펼쳐 주세요.”
체어맨은 잔인하다고 소문난 빌런답지 않게 매우 정중하고 신사다운 말투로 이레일에게 어른인 척 충고했다.
“만약 당신을 죽인다면 우리들의 위대한 아버지께서 슬퍼하실 게 분명하니, 저는 꼬마 신사분께 기회를 주고 있는 겁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께 무한한 감사를 표하십시오.”
체어맨의 말투는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아도 이레일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듯 여유로웠다.
이레일은 그제야 자신이 왜 세계 거대 빌런을 잡으러 오면서 러시아 히어로 협회에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체어맨을 노려보며 말없이 생각에 가만히 있던 그는 쓰러져 기절한 상처투성이 남자를 어깨에 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보다 더 체구가 크고 무거워 보이는 남자를 손쉽게 둘러메는 게 겉으로는 누가 봐도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능력자들은 각성하면서 영혼의 욕망을 담기 위해 일반인보다 육체적인 힘도 덩달아 증가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했다.
드레고프를 둘러메고 일어난 이레일은 빠르게 다리를 놀려 건물 안쪽으로 달아났다. 일단 몸을 숨긴 뒤 손목시계에 있는 버튼을 눌러 인근의 히어로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체어맨은 도망가는 이레일을 느긋하게 바라만 보다가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몸단장을 마친 체어맨이 문을 소환해 낸 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문에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술래잡기인가요. 그건 제 특기이기도 하지요……. 조금 심심했던 차에 놀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폐공장 건물 안쪽으로 도망치면서 지원을 요청한 이레일은 눈앞에 보이는 문 중에 아무 곳이나 골라 들어갔다.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곳에 드레고프를 내려놓고 벽에 기대게 한 뒤 상처를 살폈다.
“이렇게 끔찍하게…….”
드레고프의 몰골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그를 둘러멨던 이레일의 어깨와 등, 팔이 피로 물들 정도였다.
더욱더 끔찍한 점은 이렇게 상처가 심각한데도 그의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의 목숨을 최대한 끊지 않고 고문하는 것에 특화한, 악독하기 짝이 없는 빌런이었다.
“…사, 살려 줘…….”
정신이 드는지 드레고프의 바짝 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이레일은 자신이 섣불리 움직인 탓에 인질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해질까 봐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속 한구석에서 드레고프에 대한 거북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사람이 무고한 시민을 해칠 리 없어. 분명 이 남자는 뭔가…….’
“으윽…….”
깨질듯한 두통이 밀려들어 왔다. 이레일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들을 애써 모르는 체하며 드레고프가 계속 정신을 차리고 있도록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그대로 주무시면 안 됩니다.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방금 히어로 협회에 지원을 요청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정신을 붙들고 계셔야 합니다.”
이레일은 드레고프를 위로하면서도 점점 더 멍해져 가는 자신의 머릿속도 어떻게든 부여잡으려 애썼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묘하게 심장이 술렁거려와 가슴이 답답하더니, 지금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이상한 생각이 자신을 잠식해 갔다.
‘정신 지배를 당하는 것 같은…….’
체어맨의 능력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문을 만들어 내는 것뿐이다. 분명 정신 지배 능력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어째서?
“히어로… 날 구해 주러 온 건가… 살았다…….”
이레일의 정성이 통했는지 드레고프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몸에서 힘을 뺐다. 그의 눈동자 안에 가득 담긴 안도감을 확인한 이레일은 방금까지 이 사람을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게 분명하다. 한국에 돌아가서 정신계 능력자에게 당한 건 아닌지 확인해 봐야겠다.
손목시계에 달린 버튼을 꾹꾹 누르며 이레일은 주변의 진동을 확인하는 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단 지금은 드레고프를 데리고 탈출하는 게 더 중요했다.
“…헉.”
진동을 이용해 체어맨의 위치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던 이레일은 갑자기 가깝게 느껴지는 체어맨의 진동을 느끼고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폐공장은 대한민국의 작은 도시 하나만큼 크고 넓었지만, 그건 체어맨의 능력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다 히어로 협회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상태도 불안정했다. 능력을 각성하고부터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체어맨이 가지는 진동은 마치 심장 박동처럼 쿵쿵거리며 이레일의 마음속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강렬하고 생생한 울림이 이레일의 정신을 방해했다.
‘안 돼! 일단 지금은 인질을 데리고 탈출하는 게 먼저야. 허튼 생각하면 안 돼.’
자신이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체어맨의 진동에 이레일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자신에게서 나는 진동을 완전히 차단했으니 제아무리 거대 빌런이라 해도 그렇게 빨리 자신들을 찾아낼 수 없을 거라며 되뇄다.
이레일은 괜히 폐공장 밖으로 나가 다른 시민들이 말려들지도 모르는 일을 선택하기보다는 열심히 도망 다니며 지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으윽… 그, 그 괴물이 쫓고 있어……. 그 괴물이…….”
이레일의 등에 업힌 드레고프가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일반인이 악독한 빌런의 모진 고문과 쫓김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건 너무 악질이었다. 마치 강자가 약자를 사냥하며 즐기는 질 나쁜 놀이가 아닌가.
머리가 계속 멍해지려는 걸 의지로 붙잡으며 잠금장치가 없는 어느 방의 입구에 도착한 이레일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보기만 해도 굉장히 섬뜩한 고문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닥에는 핏물이 마르지 않아 흥건했고 피 묻은 날붙이가 트레이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레일은 고문실 안의 피가 누구의 것인지 곧바로 눈치챘다. 등에 업혀 있는 드레고프가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다시 여기로 왔어. 다시 여기로 와 버렸다고! 버, 벌칙을 받을 거야. 이제 난 견딜 수 없어……. 여기로 다시 돌아오느니 주, 죽는 게 나아!”
“진정하세요, 드레고프 씨! 여기엔 저와 드레고프 씨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러다 들키면…….”
아무리 이레일이 육체적으로 일반인보다 뛰어나다고 한들 온 힘으로 버둥거리는 그를 무방비한 상태에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드레고프가 바닥에 꼴사납게 뒹구는 것과 동시에 이레일도 그의 무게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이레일이 몸을 일으키며 숨을 몰아쉬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장신의 사내가 검은색 우산을 들고 방구석 한편에 서 있었다.
“꼬마 신사님. 지금이라도 그 남자를 두고 간다면 당신을 쫓지 않겠습니다.”
“웃기지 마십시오……. 이렇게, 무고한 시민을 괴롭히다니… 남겨진 그의 가족들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 본 적 있습니까?! 전… 전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의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
벌떡 일어나 드레고프를 자신의 뒤쪽으로 숨기며 이레일이 소리쳤다.
“당신같이 재미 삼아 사람을 죽이는 빌런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겠지!”
거친 말을 내뱉으면서도 묘하게 가슴께가 답답했다. 아마도 폭언을 쏘아 대는 자신이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며 이레일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가 걱정되어 대회에 집중하지 못했다면서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신께 기도하던 예차프의 우는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이레일은 체어맨의 손에 부모가 죽었을 때 그 정도로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숨 막히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난… 난 당신에게 감사해…….”
체어맨을 똑바로 바라보며 서두를 떼어 보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 나쁜 말을 하는 것에 거부감이 생겼다. 그 때문에 오히려 반감이 생긴 이레일이 더욱더 강하게 소리쳤다.
“만약 그때 당신이 내 부모님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날, 날 구해 준 사람이 히어로가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당신 같은 저열한 빌런이 되었겠지! 그러니까 이 사람을 넘기고 도망칠 수 없어. 내게 히어로가 되라고 말해 준 은인을 위해서라도!”
두서없이 나오는 대로 내뱉는 말에 체어맨은 그 자리에 서서 이레일을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면사포에 가려진 그의 얼굴과 표정은 당연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고집불통이 다 되었네요.”
체어맨의 목소리가 쓰디쓴 것을 삼킨 듯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이레일은 자신이 소리친 것에 퍼뜩 놀라 온몸을 굳히더니 체어맨보다도 더 상처받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난, 아저씨.”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허우적거리다가 체어맨의 옷자락을 잡기 위해 팔을 앞으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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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잠깐만요! 지금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위험하다니까요?”
“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래요. 절대 방해되지 않을게요. 그냥 빨리 확인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그래요.”
택시에 올라탄 재언이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보여 주던 중에 갑작스럽게 뒷좌석 문을 열고 난입한 예차프와 어린 동생 때문에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체어맨이 자신과 자신이 데려온 일행을 공격할 리 없겠지만, 그래도 아예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에 데려가기엔 영 꺼림칙했다.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꽤 오랜 시간 나오지 않아 마음 놓고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그런 자신을 안에서 계속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을 완전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기에 재언은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위험하니까 제 곁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재언은 한숨을 푹 쉬면서 자신과 예차프의 가운데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는 동생의 겨드랑이를 잡아 들어 올려 무릎에 앉혔다. 그러다가 헐렁한 상의를 입고 있던 아이의 옷자락이 자연스레 위로 밀려 올라갔다.
그리고 재언은 아이의 등에 선명하게 보이는 난도질당한 자국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누가 말릴세라 재빠르게 한쪽 팔로 아이를 안고 상의를 들어 올렸다.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멀쩡했지만, 옷으로 가려진 부분은 상처투성이였다.
“…이건.”
체어맨이 어째서 드레고프를 납치했는지 드디어 알아냈다.
예차프가 아버지를 걱정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학대의 대상은 예차프가 아닌, 그의 어린 동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