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의 작은 등은 성한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멍으로 빼곡해 울긋불긋했다. 이건 아이가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사고로 생긴 멍이 아니라 누군가가 고의로 힘을 실어 때린 흔적이었다.
재언이 겪어 온 바, 어린아이의 몸에 이런 식으로 구타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보호자에 의한 학대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이는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동양인 남성이 자신을 무릎 위에 앉히더니 상의를 들어 올리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 소란스러움에 옆에서 택시 문을 닫던 예차프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 작은 몸의 어디에서 그런 속도와 힘이 나오는지 아주 빠른 속도로 상의를 잡고 있는 재언의 손을 탁-, 쳐 내고 몸을 돌렸다.
“사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냐, 형… 그냥… 속이 안 좋아서.”
예차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동생의 안색을 살폈다.
“동생이 차멀미가 있나 보네요.”
재언이 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살짝 힘주어 끌어안았다.
“제가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린아이를 데리고 깊숙이까지 들어가는 건 안 됩니다. 우리는 일반인이니까요.”
“네……. 전 그냥, 아버지께서 무사히 살아계시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됩니다.”
아버지가 인생의 유일한 이해자라고 했던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예차프에게선 증오 한 점 찾을 수 없었다. 물론 학대당하는 아동들은 보호자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보호자와 떨어지게 되는 상황을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될 즈음에는 자신이 당한 학대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괴로운 일이었는지를 실감하며 증오를 싹 틔우기도 한다. 그렇기에 재언은 예차프가 아버지에 대해 걱정하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에게서 증오가 흘러나오는지 계속해서 살폈다.
그러나 몇 번을 봐도 그에게 증오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체어맨이 아니라 모방범의 소행이거나 혹은 체어맨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실수로 오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건 오해 따위가 아니었다. 예차프의 동생은 재언을 힐끔거리면서도 자신의 상처가 혹시라도 형에게 보였을까 조마조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자꾸 움츠러들었다. 형에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의 바람과는 달리 재언은 어떤 상황에서든 아동학대는 주변인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가해자인 부모가 사라졌을 때 임시 보호자를 맡아야 할 이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예차프에게 전부 말하기 전에 먼저 잔뜩 겁에 질린 아이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재언이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이자 순식간에 그들을 감싼 공기가 달라졌다. 택시가 출발할 때 아무도 없었던 조수석에 예차프보다 어려 보이는 소년이 한 명 나타났다.
헤드셋을 목에 걸고 나타난 소년의 두 손에 돔 모형의 반투명한 물체가 놓여 있었다. 엔레이드맨의 둠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재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의 작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꼬마야. 이름이 뭐니?”
“…….”
“걱정하지 마. 우리가 하는 말은 네 형에게 들리지 않을 거야.”
재언의 속삭임에도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들어 올렸다. 형제가 닮은 구석이 많아서 그런지 미인인 형과 마찬가지로 아이도 무척 귀여웠다.
아이가 제 형의 눈치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려고 하기에 재언은 별수 없이 다른 조치를 취했다.
재언이 엔레이드맨을 바라보고 고개를 까딱이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반투명한 물체 안에서 꽃잎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재언과 아이는 택시 안이 아닌, 사방에 꽃이 만개한 꽃밭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재밌게 봤구먼.’
갑자기 무슨 꽃밭을 만들어 내나 싶었는데 아마도 이전에 보았던 로맨스 영화를 꽤 감명 깊게 본 듯했다. 남녀 주인공이 꽃밭에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 속 명장면이 떠올랐다.
“로맨스 영화 같은 건 감성에 젖는 그런 사람들만 보는 거예요. 저는 그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TV 리모컨을 들고 로맨스 영화를 재생하는 재언에게 엔레이드맨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팔짱을 끼었었다. 그러더니 영화가 시작된 직후부터 재언이 방을 나갈 때까지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재언이 눈앞에서 펼쳐진 엔레이드맨의 로맨틱한 꽃밭에 혀를 차며 아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이것 보렴.”
“…어?”
엔레이드맨의 결계는 아주 정교해서 진한 꽃향기도 감촉도 모두 선명했다.
“여기에 형은 없어. 이곳은 너와 나 둘뿐이란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내게 말해 줘도 돼. 먼저, 네 이름은 뭐니?”
“…알렉산드르에요.”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랄 만도 한데 아이는 꿈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어려서 받아들이는 속도가 남다른 건지 침착한 태도로 순순히 대답했다.
“사샤라고 부르면 돼요.”
“그래, 사샤. 이곳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너만을 위한 곳이야. 그러니 내게 숨김없이 말해 줘도 돼.”
재언은 아이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먹도록 최대한 상냥해 보이게 목소리를 꾸몄다.
“네 몸에 상처가 많던데. 혹시 왜 그렇게 됐는지 내게 설명해 줄 수 있니?”
다그친다는 느낌을 받으면 아이가 겁에 질려 대답을 회피할 수도 있으니 말하는 속도까지 평소보다 느릿하게 조절했다. 그런 재언의 물음에 사샤는 머뭇거리면서도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건 비밀이에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라고요.”
“누구랑 약속한 건데?”
“그것도 말할 수 없어요. 그것도 비밀이에요.”
어린아이는 보이는 것보다 당차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나한텐 다 말해 줘도 돼.”
“아저씨한테 말해 버리면 비밀이 아니게 되잖아요.”
아이가 참으로 똘똘하고 야무지다고 감탄하는 것도 잠시, 재언은 걱정이 앞섰다. 대체 아이를 무슨 말로 현혹했기에 이렇게까지 자기가 당한 일을 숨기려 드는 것일까.
“하지만 난 이미 네 비밀을 알고 있잖아.”
“…….”
“그러니까 나에겐 말해도 괜찮아.”
“그러면 형한텐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
앞으로 사샤의 임시 보호자가 될지도 모르는 예차프에게 학대 사실을 비밀로 했다가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다. 교묘한 어른인 재언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입에 담는 대신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네 형이 그렇게 때린 거야?”
“아니에요!”
그러자 사샤는 펄쩍펄쩍 뛰며 재언의 질문에 격하게 반응했다.
“형은 절 때리지 않아요! 저한테 잘해 준단 말이에요!”
“그러면 널 이렇게 만든 사람이 네 형은 아니라는 거지?”
아이는 할 말을 잃은 듯 머뭇거리더니 잔뜩 주눅 든 채 중얼거렸다.
“이건… 다 제 잘못이에요. 아빠는 자기 꿈을 이뤄 줄 아들을 원했는데 저는 피겨가 싫어요. 제가 좋아하는 건 하키예요. 그래서 아빠가 나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건 다 제 잘못이에요. 말 잘 듣고 열심히 하면 아빠가 가슴 아프게 날 때리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요.”
“가슴 아프게라…….”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재언은 사샤의 상의를 살짝 들췄다. 말하는데 정신이 팔린 아이는 자신의 옷을 가슴께까지 들추는 재언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맞아요. 아빠는 절 때리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그래서 항상 다섯 개 중에 선택할 수 있게 해 줬는데 제가 항상 틀린 걸 골랐대요.”
사샤의 복부와 가슴은 다른 곳보다도 상태가 더 심각했다. 이 여린 몸이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면 결국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폭력은 첫 시작이 어려울 뿐, 반복될수록 수위가 높아지고 죄책감까지 사라진다. 결국, 아이들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갈 수밖에 없었다.
폭력의 역치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부모들은 평소대로 훈육했을 뿐인데 죽을 줄 몰랐다며,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변명만 늘어놓게 된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살해였다.
“아버지. 이 꼬마, 한 번 더 폭력에 노출되면 내장이 파열돼 죽었을 겁니다.”
엔레이드맨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안절부절못한다고 했더니 역시나 그도 이번 납치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언이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체어맨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섣불리 말하지 못했던 듯했다. 그러다 납치 이유를 조금씩 납득하고 있으니 이제야 말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쓰레기였습니다. 돈을 잘 벌어다 주는 첫째에겐 상냥한 이해자인 척 아버지인 척 위선을 떨면서 첫째가 자주 집을 비우는 틈을 타 아이를 심하게 때리곤 했습니다. 아이가 말한 다섯 가지 선택이란 모두 속임수로 사실 어느 방식으로 맞을지 고르는 학대일 뿐입니다.”
엔레이드맨이 결계를 재조정해 재언에게만 보이도록 그날의 광경을 보여 주었다.
아이의 아버지, 드레고프는 자신의 솥뚜껑만 한 손을 쫙 펼쳐 어린 아들의 눈앞에 들이대었다.
- 자. 여기 다섯 개 중에 하나를 골라 보렴. 네가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한 거면 내가 널 때리는 일은 없을 거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사샤는 고개를 번쩍 들고 작은 손으로 남자의 검지를 움켜쥐었다. 더는 맞고 싶지 않다는 다급한 손짓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사샤의 손을 털어 내며 저열하게 웃었다.
- 넌 또 틀린 선택을 했어. 넌 정말 비열하고 못돼 먹은 아이구나. 내가 내 아들에게 손을 대게 했잖아. 넌 오늘 내 발로 널 훈육하는 선택을 골랐어. 네가 고른 것 때문에 난 또 널 때리면서 가슴이 찢어질 거야.
때리지 않는단 선택지가 있는 손가락이 어느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남자는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을 펼쳤고 그런 선택지 따윈 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샤가 어떤 손가락을 고르든지 마음속으로 정해 놓고 있었던 폭력의 행위를 정할 뿐이었다. 남자는 자비 없이 사샤의 복부를 발로 힘껏 찼다. 그리고 다시 아이의 눈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 올바른 걸 선택할 때까지 이 아비는 널 포기하지 않겠다. 다시 고르렴, 사샤! 네 형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도록 나도 노력하마!
2층에 있는 드레고프의 방은 사샤의 비명과 때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끔 방음벽을 튼튼하게 설치해 놓았다. 그 탓에 훈련을 끝내고 돌아와 동생을 위해 로봇 장난감을 조립하고 있던 예차프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드레고프가 사샤의 배를 다시 발로 차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린 그때, 그의 뒤로 거대한 문이 벼락처럼 꽂혔다. 문이 열리고 그 속에서 기다란 팔이 튀어나와 드레고프의 머리와 목을 움켜잡은 채 그대로 끌고 들어갔다.
몸을 웅크린 채 다가올 폭력을 기다리고 있던 사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몸에 고통이 가해지지 않자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 안에서 아버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빠는 이 사실이 형에게 알려지면 우리 가족은 다 끝이라고 했어요. 형의 미래가 산산조각이 날 거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이 일은 비밀로 해 주세요. 형이 지금까지 노력해 온 게 나 때문에 끝나면 안 돼요.”
“…….”
단란하다고 했다.
김은원이 예차프의 가족들은 굉장히 단란하다고 했었다.
그 환상이 깨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어린아이는 자신만 입 다물면 행복할 수 있다는 세뇌에 빠져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재언의 푸른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